[동경대전읽기 03] 사람이 짐승으로 살면 안 된다는 명령
[동경대전읽기 03] 사람이 짐승으로 살면 안 된다는 명령
  • 천안아산신문
  • 승인 2026.08.24 16:4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어제 8월20일(목) 오후 5시에 북면 연춘리 <쉼>카페에서 복구정 읽기모임 세번째 시간을 가졌다. 8월로 들어오면서 짧게라도 여름방학을 지내며 쉬는 게 좋겠다는 판단 때문에 천천히 진도를 나가기로 한 것이다. 진도는 도올선생의 『동경대전 2』 30쪽까지 나간 상태다. 중요대목을 간단히 짚어보기로 한다.

동학의 경전 『동경대전(東經大全)』은 여러 편의 글들을 싣고 있는데 가장 처음 나오는 글이 「포덕문(布德文)」이다. 이 글의 제목에 관한 도올선생의 풀이를 보자.

“포덕문布德文”이라는 제목은 수운 본인이 지은 것이다. “포布”는 “깐다”, “편다”, “베푼다”, “알린다”, “반포한다”는 뜻이다. “포덕布德”이란 결국 “덕을 널리 편다”는 뜻이다. “포덕문”은 곧 덕을 널리 펴는 글이다. 그런데 왜 수운은 “포교布敎” 혹은 “포도布道”라 하지 않고 “포덕布德”이라 했을까? 여기에 바로 수운의 인간주의적 진실성이 있다. 도道는 본시 “하늘의 길”이며, 그것은 그 자체로 스스로 그러한 대로(自然而然) 있는 것이며, 함이 없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다(無爲而化. 「동학론」). 따라서 그것은 선포의 대상이 아니다.

선포란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며, 인간의 수행의 범위에 있는 것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힘써야 할 것은 도道가 아니요 덕德이다. 덕德이란 인간이 도道로부터 얻어得 축적해나가는 것을 말한다.

== 김용옥(2021), 『동경대전 2』(통나무), 23~24쪽.

도올선생은 “도덕道德”이라는 어휘에서 “도道”와 “덕德”을 따로 분리하면서, 각각 “하늘”과 “인간”을 대응시킴으로써, “포덕布德”의 “덕德”이 “하늘”이 아니라 “인간”의 측면에서 “선포”의 내용을 이루며 결과적으로 “수운의 인간주의적 진실성”을 나타내는 요소라고 설명하고 있다. “도”와 “덕”이라는 비교대립항의 관계를 제시하면서 그 관계속의 차이를 주목하게 하는, 비교적 이해하기 쉬운 설명이라서 “포덕布德”이란 어휘에 담긴 “인간”적 측면을 효과적으로 강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과연 이런 부분은 도올선생의 강의가 주는 명쾌함의 묘미를 잘 보여준다.

조선시대 말 어진(임금초상) 화가였던 김은호 화백이 그린 수운 최제우 초상(왼쪽초상)과 역시 어진 화가였던 채용신 화백이 그린 주자 초상(오른쪽초상)
조선시대 말 어진(임금초상) 화가였던 김은호 화백이 그린 수운 최제우 초상(왼쪽초상)과 역시 어진 화가였던 채용신 화백이 그린 주자 초상(오른쪽초상)

한편, 솔직히 말하자면 “덕德”이란 도대체 무엇인지 좀 막연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런 느낌에 대해 나는 또다른 측면에서 “포덕布德”의 “덕德”을 살펴볼 필요를 떠올린다. 일반적으로 수운 최제우 선생은 조선시대 선비들의 공통 학문인 성리학을 깊이 공부한 인물로 소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기존의 성리학적 지식으로 만족되지 않는 무엇인가가 있으니 굳이 성리학적인 논의를 끌어오지 않고 그 테두리를 벗어나는 “동학”을 제창하게 된 것 아니겠는가. 조선시대 내내 뭇 선비들에게 필독서였음과 동시에 성리학의 학문세계로 이끄는 기본입문서로서 주자(朱子)에 의해 12세기에 편찬된 책 『근사록(近思錄)』을 중요 참고문헌으로 살펴보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수순일 것이다. 이 책에서는 “덕德”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을까?

염계선생이 말하기를 “진실로 아무것도 함이 없더라도 움직이려는 찰나(刹那)에 선악(善惡)이 나눠지는 것이다. 덕에는 [다섯 가지가 있는데] 사랑하는 것을 인(仁)이라 하고, 마땅한 것을 의(義)라 하고, 이치를 예(禮)라 하고, 두루 통해서 아는 것을 지(智)라 하고, 옳은 것을 지키는 것을 신(信)이라 한다.

== 주희·여조겸의 『근사록』(성원경 역, 2004, 명문당), 43쪽.

“덕德”에 대한 어휘적 정의가 위의 인용문에 나와있는 것처럼 정확하게 한정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 해도, “덕”이 보통 오상(五常)으로 불리워지는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하면 앞서 언급했던 것과 같은 막연함은 퍽 해소될 듯하다. 이 인용문은 사실 다른 점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나중에 본문읽기를 통해 확인되겠지만 수운선생이 “인의예지(仁義禮智)”가 더 이상 효력이 없다며 “수심정기(守心正氣)”로 바꿔 그 실천을 주장하는 대목이 나오기 때문이다. 유교 그리고 성리학의 핵심 항목인 “인의예지(仁義禮智)”가 전격적으로 다른 것으로 대체된다는 사실 그것만으로도 이미 기절초풍할 사상적 혁명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오랜 세월 유지해왔던 유교사회의 근간인 “덕德” 개념에 일대 파란이 닥쳐온 것이라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런데 수운선생은 왜 이렇게도 파격적인 “덕德” 개념의 교체를 주장하게 된 것일까? 전통적으로 지켜왔던 견고한 신념을 일거에 바꿔야 할 만큼 시대적 절박감을 가지고 대안을 찾아낸 결과일 것이다. 이 절박감이란 먼저의 글에서 소개했듯이 서양문물의 도래 상황이 주는 불안감에 다름아니었을 것이다. 서양문물은 겉으로 “하늘”을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남의 땅을 빼앗는다는 소문이 그 불안감을 더욱 증폭시키고 있었을 것이다. 서양문물의 도래는 어쩌면 우려하는 대로 조선백성들이 인간으로서 생활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전통적인 도덕체계가 완전히 붕괴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지켜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덕德” 개념은 닥쳐올 위기를 대비해 획기적으로 교체돼야 했을 것이다.

이런 가운데 유교경전들 중에서 그나마도 위기상황을 미리 그려볼 수 있는 참고자료가 있을 수도 있다. 수운선생이 수중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경전들 중에서 주의깊게 다시 고찰해보았을 책에서 성찰의 재료로 삼을 만한 부분을 아래와 같이 끌어와본다. 바로 저 유명한 유교경전 『맹자(孟子)』의 한 대목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도리를 볼 때, 배불리 먹고 따스하게 입으며 평안히 살기만 하고 가르치지는 않는다면 새나 짐승에 가깝게 된다오.

== 『맹자』(김학주 역, 2013,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12쪽.

위 인용문은 이런 의미에서 중요한 참고가 된다. 백성들이 아무리 잘 먹고 잘 입으며 “평안히” 살아도 그냥 내버려둔 채 아무 가르침이 행해지지 않는다면 그 백성들은 “짐승”에 가까워진다는 위기의식이다. 그렇게 물질적으로 좋아 보이는 세상도 사람들이 “짐승”이 될 가능성이 농후한데, 하물며 서양문물에 의해 백성들이 자기 가진 것을 빼앗긴다면 더욱 더 심각하게 모두가 “짐승”의 처지로 전락하게 될지도 모를 일인 것이다. 가진 것을 빼앗기지 않으면서도 사람으로서의 가르침도 잃지 않도록 하는 적실한 대안을 절박하게 구하지 않을 수 없다. 수운선생은 분명히 이런 위기의식에 대해 심각하게 반응을 보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위 인용문의 의미는 이런 해석에 있는 것이다. 결국 수운선생은 자신의 고뇌를 녹여내어 이웃들에게 “포덕布德”을 결심하고 글을 썼다. 그렇다면 여기서의 “덕德”이란 옛날 것의 재탕일 수는 없는 것 아니겠는가. 전혀 새로운 위기상황에서는 당연히 전혀 새로운 대응방안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노동운동가 김진숙의 책 ‘소금꽃나무’와 영화 ‘그림자들의 섬’ 중 한 장면. 이 장면 속에서 두 손을 들고 활짝 웃는 얼굴을 보여주는 이가 김진숙이다.
노동운동가 김진숙의 책 ‘소금꽃나무’와 영화 ‘그림자들의 섬’ 중 한 장면. 이 장면 속에서 두 손을 들고 활짝 웃는 얼굴을 보여주는 이가 김진숙이다.

가르침을 제대로 받지 못하면 사람이 “짐승”이 될 수 있다는데, 아니 어차피 사람도 같은 동물 부류 아니던가? 물론 현대 생물학적인 분류체계에 의하면 사람이나 “짐승”이나 다 같은 범주인 동물에 해당한다. 하지만 위에서 말한 위기의식 속의 “짐승”은 좀 다른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성리학 기본서 『근사록』의 첫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저 유명한 「태극도설」에서는 이렇게 제시하고 있다. “오직 사람만이 최대의 신령스럽고 우수함을 얻어 형체를 갖추어 생겨나게 한 것이다.” 여기서는 사람과 “짐승”을 대별해놓고서 바로 사람만이 “최대의 신령스럽고 우수함”을 가진 존재로서 인정받고 있다. 결국 이런 논의에서 “짐승”이라는 것은 생물학적인 측면에서가 아니라 으뜸존재로서의 사람이 타락하여 자신의 인격성을 잃어버린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사람의 “짐승”으로의 타락과 관련하여 긴요하게 참고해볼 만한 책이 있다. 서양에서도 특히 옛 소련에서 20세기 전반부에 의미깊은 학술활동을 했던 바흐친이라는 학자의 문명비판이 담긴 내용을 확인할 수 있어서 유용하다.

어떤 사회계급이 붕괴의 단계에 이르러 역사의 무대로부터 후퇴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때, 그 이데올로기는 가능한 모든 변화를 시도하면서 “인간은 무엇보다도 먼저 동물이다”라는 하나의 테마를 집요하게 반복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이 ‘계시’(revelation)에 입각해서 역사와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가치들을 새롭게 재검토하려고 한다. 그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유명한 정식에서의 ‘사회적’이라는 부분은 완전히 무시되어 버린다.

== 바흐친·볼로쉬노프의 『프로이트주의』(송기한 역, 1989, 예문), 19쪽.

위의 인용문은 한 사회에서 도덕체계를 지탱하도록 되어있는 상층계급이 스스로 자신을 유지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 즉 부패와 비리와 같은 부정적인 사유로 사회적 신뢰성이 바닥으로 추락한 경우 그 상층계급은 인간을 동물의 차원으로 재설정하여 비판의식을 잠재우려는 이데올로기적인 시도들을 전개한다는 내용을 보여준다. 이런 내용은 성리학세계의 선비들이 본다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하다. 도덕적으로 인간적인 모범을 보여주어야 하는 상층계급이 도리어 인간적 존재임을 포기하고 인격이 무시되는 생물학적 범주인 동물로 인간을 재설정하고 보편화하면서 스스로 도덕체계를 붕괴시키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위의 인용문처럼 상층계급의 도덕성이 무너진 상태로 서양문물이 한반도에 도래하는 상황을 예측한다면 누구라도 수운선생과 같은 깊은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서양문물의 도래는 선비들이 우려하듯이 인간을 “짐승”으로 전락시키는 부도덕한 세계의 펼쳐짐에 다름아닌 것이고, 더구나 서양문물이 우월한 위치에 있는 한 인간을 동물로 간주하는 보편화는 결코 힘을 잃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개선의 여지는 전혀 없어 보이는 것이다.

위의 인용문이 들어있는 책은 유럽의 가장자리에서 유럽과는 다른 사회질서 속에 있는 저자에 의해 아주 가까운 자리에서 유럽을 관찰하면서 쓰여진 것이라는 특징이 있다. 유럽에서 대서양을 건너 당도하는 아메리카대륙은 어떠했을까? 북아메리카 선주민들에 의해 묘사되는 앵글로색슨계 백인들의 부도덕한 모습을 냉소적으로 엿볼 수 있는 책이 있다. 관련된 부분을 아래에 옮겨와본다.

인디언의 대지에 뿌리내린 이 ‘위대한 신비’에 대해 문명인들은 좋아하지 않는다. 어떤 것도 그들의 파괴의 손길을 막지 못한다. 베어넘기지 않은 숲, 우리 안에 가둬 넣지 않은 들짐승, 네 발 달린 인간에게 착취당하지 않은 대지에 대해서 그들은 참지 못한다. 문명인들에게는 그것들이 ‘길들여지지 않는 야생(野生)’으로만 보인다.

== 시애틀 추장 등의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류시화 역, 1993, 정신세계사), 63쪽.

위 인용문 속에서 언급되는 “문명인”은 물론 자신들을 “문명인”이라 자칭하는 앵글로색슨계 백인들을 가리킨다. 화자로 구술하는 북아메리카 선주민은 자신들의 거주처인 북아메리카 자연환경이 보여주는 건강한 생태적 풍경들에 대해 그 파괴적인 백인들은 그대로 놓고 보기를 아주 싫어한다고 묘사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아주 흥미로운 묘사는 이것이다. “네 발 달린 인간에게 착취당하지 않은 대지”라는 표현 속에서 특히 눈에 도드라지게 비쳐지는 “네 발 달린 인간”이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 이 “네 발 달린 인간”은 표현의 내용상 “착취”를 일삼는 존재인 듯하다. 아마도 문제가 되는 “문명인”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겉모습으로 “인간”인 것은 맞는데 “네 발 달린” 모습이라고 한다면 네 발 달린 짐승과 같다는 비유일 수 있는 것이다. 즉 짐승은 아니지만 결국 짐승 같은 인간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듯하다. 여기서는 도리어 “문명인”을 자처하는 백인들이 “야생”이라 모욕당하는 선주민들로부터 짐승 같지 않은 짐승이라는 비난을 역으로 받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짐승”이라는 단어는 중립적인 의미로 동물을 가리키기는 하지만 때로는 상대의 잔인하고 악독한 측면을 “짐승”에 빗대어 던지는 욕설이기도 한 것이다. 아마도 더 심한 욕설이 있다면 얼마든지 그런 욕설도 그 악마적 존재를 비난하는 데에 퍼부어지겠지만 여전히 상대를 제압하기에는 역부족을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 상대는 보통 완력이 월등히 크기 때문이다. 반면에 아무리 중립적이라도 자신을 떳떳하고 어엿한 사람으로 인식하는 존재에게 누군가 “짐승” 취급한다면 그 사람은 크게 모욕을 당하는 것이 된다. 이런 모욕을 겪은 사람이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기게 되는 경우에는 더욱 큰 회한에 빠지게 된다. 이런 예를 우회적으로 보여주는 짧은 문장을 참고로 하나 가져와본다.

먹고살기 위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넘어간 일이 얼마나 많았을 것이며, 죽고 싶도록 부끄러웠으나 내가 무슨 힘이 있냐는 체념과 타협한 일은 오죽이나 많았겠는가.

== 김진숙의 『소금꽃나무』(2007, 후마니타스), 53쪽.

사실 모욕당한 사람은 피해자다. 그런데 피해자가 도리어 자신의 부끄러움에 대해 더 큰 상처를 느낀다. 위 인용문의 책을 쓴 저자는 오랜 동안 해고상태로 복직요구를 하며 노동운동에 헌신한 인물이다. 위 인용문은 지난날의 회고 속에서 크게 인간적인 모욕을 당했던 일화를 소개하면서 결국 용기있게 행동하지 못한 옛날의 자신을 연민 어린 감정으로 토닥거려주는 내용이다. 그런데 거기서 “먹고살기 위해”라는 표현을 깊이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먹고살기”는 인간으로서는 너무나 당연한 행위인데도 불구하고 다른 인격적 활동은 엄두도 내지 못한 채 그저 “먹고살기”에만 머문다면 대체로 인간 노릇을 못하고 사는 것으로 자탄하게끔 만드는 모습인 것이다. 자신이 “먹고살기”에만 급급하여 “짐승” 취급을 당하는 것도 감수해야 한다면 아무리 망각하더라도 때때로 불쑥 떠오르는 “부끄러움”은 피하기가 어렵다. 의식은 억제한다고 하지만 무의식은 인간적 모멸을 마냥 눌러두지 않는 것이다. 아마도 100년도 더 넘은 옛날에 수운선생이 우려했던 서양문물의 도래로 말미암은 백성들의 “짐승” 노릇이 그런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부끄러움”은 변화를 추동하는 가녀린 희망인지도 모른다.

이천선생이 말하기를 “군자는 험난(險難)을 당하게 되면 반드시 스스로를 반성하여 어떤 잘못이 있어서 그렇게 되었는가를 살펴야 한다. 착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곧 고쳐야 하고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으면 더욱 힘쓸 것이니 이것이 스스로 덕을 닦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 주희·여조겸의 『근사록』(성원경 역, 2004, 명문당), 96쪽.

역시 다시 『근사록』 속에서 유용한 부분을 옮겨와봤다. “험난(險難)”을 당했을 때 자신을 되돌아보고 부끄러움이 없도록 고쳐나가는 것만이 모욕 속에서도 “짐승”으로 타락하지 않고 사람으로 떳떳하게 사는 길일 것이다. 어느 순간도 도덕적으로 허물어지지 않는 완벽한 사람으로 살기는 극히 어려운 일이다. 위기상황은 어느 때건 예고없이 닥칠 수 있다. 피할 수 없이 모욕을 뒤집어쓸 수도 있다. 그럴 때마다 낙담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게 부끄러움을 딛고 사람으로 다시 일어서기를 애쓰는 것, 그것이 바로 위 인용문 속에 표현된 바 “스스로 덕을 닦는 것”을 일컫는 것일테다. 여기서 말하는 “덕德”은 앞서 거론했던 “인의예지(仁義禮智)”와는 또다른 측면을 가지는 “덕”이다. 평상시에 조건이 좋을 때라야 해볼 수 있는 “덕”이 “인의예지(仁義禮智)”라면, “험난”과 같은 위기상황에서 꼭 잃지 않고 보듬고 가야 할 “덕”은 자신을 고쳐가려 애쓰며 스스로 닦는 “덕”이어야 할 것이다. 어쩌면 수운선생이 새로운 “덕”으로 제시한 “수심정기(守心正氣)”도 큰 틀에서는 거기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수운선생의 제안은 어쨌든 “마음을 지키고 기운을 바르게 하는 덕”으로 좀 차원을 달리하는 해법으로 여겨져야 할 것이다. 당대의 성리학자들은 굳이 하려고 하지 않는 “포덕布德”을 수운선생은 몸소 적극적으로 실천했다는 커다란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이제 마무리지을 때가 온 것 같다. “포덕布德”의 “덕德”에 관해서는 이 정도쯤 부연설명을 해줘야 그래도 허전함을 달래줄 수 있지 않을까? 수운선생이 당시에 느꼈을 절박감을 생각한다면 이 정도의 논의도 아주 미약한 것으로 간주될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흥미진진하게 공부거리가 줄줄 나오는 것같다. 앞으로도 즐겁게 공부가 되었으면 좋겠다.

글 송길룡(천안역사문화연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