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와 교육의 기준은 생명이다
종교와 교육의 기준은 생명이다
  • 천안아산신문
  • 승인 2026.04.16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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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교 장로님께서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내왔다. 평생 아이들을 가르쳐 온 경력을 자랑스러워하시던 교장 선생님이었다. 천지개벽이 일어나도 매주 일요일이면 교회를 찾는 분이다. 저녁 10시, 하루를 마무리하고 잠자리에 들려던 시간에 도착한 메시지였다. 종교 이야기려니 하고 지나치려다가, 혹시 중요한 말씀일까 싶어 구석에 밀어두었던 휴대전화를 다시 열어보았다.

‘더 보기’를 눌러 읽어 내려가는 동안 몇 번이나 눈을 깜박여야 할 만큼, 글은 길고도 낯설고 무거웠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와 이스라엘의 베냐민 네타냐후에 대한 강한 지지, 그리고 이란과 팔레스타인을 향한 단정적인 비판이 이어졌다. 전쟁 속에서 희생된 12살 미만의 175명 어린 생명에 대해서는, 그저 운이 닿지 않았을 뿐이라는 문장도 포함되어 있었다.

사회적으로 존경받아 온 교육자이자, 신앙을 삶의 중심에 두고 살아온 장로의 생각이라고 하기에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종교는 어떤 고난 속에서도 인간에 대한 연민을 잃지 않고, 자신의 이익보다 타인의 고통을 먼저 바라보려는 노력 속에서 이어져 왔다. 교회든 사찰이든, 그 안에서 반복되는 가르침의 중심에는 늘 사랑과 평화, 그리고 생명에 대한 존중으로 이어져 왔다. 더 높은 세계를 약속하기에 앞서, 이 땅에서 서로를 해치지 말라는 최소한의 기준을 제시해 온 것이다. 이러한 가치의 흐름은 자연스럽게 교육으로 이어져 왔다.

학교 역시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공간이 아니다. 선과 악을 분별하고 타인을 이해하는 법을 배우는 곳이다. 그래서 우리는 교사를 ‘선생님’이라 부르며 그 역할에 깊은 의미를 부여해 왔다. 그런데 평생 교육자의 길을 걸어온 한 사람이, 집단의 이익을 위해 보복과 질서라는 이름 아래 폭력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저항할 힘조차 없는 민간인과 아이들이, 이름조차 다 불리지 못한 채 하늘의 별이 된 현실을 두고, 그것을 불가피한 희생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특정 국가에 대한 맹목적 신뢰나, 흑백으로 나뉜 시선에 기대어 어떤 죽음은 괜찮고 어떤 죽음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었다. 우리가 믿어 온 종교와 교육의 존엄은 흔들리기에 충분했다. 사랑을 말하던 사람이 죽음을 설명하기 시작할 때, 그 언어는 어느새 다른 결을 띠게 된다. 평화를 가르치던 사람이 폭력을 이해하라고 말하는 순간, 교육 역시 그 의미는 죽게 된다.

나는 조심스럽게 되묻는다.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우리는 예수를 성자라 부르며, 그의 삶을 따르는 신앙인이라 말할 수 있는가. 또한 인류애가 희미해진 자리에서, 과연 ‘선생님’이라는 이름은 어떤 의미로 남을 수 있는가.

이름과 직함으로 자신을 설명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아니다. 오히려 어려운 순간에 어떤 선택을 했는지, 강자와 약자 사이에서 누구의 손을 잡아주었는지가 그 사람의 가치와 위상을 보여준다.

종교와 교육이 지켜야 할 최소한의 기준은, 어떤 경우에도 인간의 생명을 단순한 수단으로 삼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다. 그것을 지키려는 노력 속에서 우리가 믿어 온 종교와 교육의 가치는 더욱 숭고하고 단단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글 최기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