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님, 이름이 아니라 정말 피를 나눈 제 형님이 되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 말은 혈기 왕성한 10대 청소년의 고백이 아니었다. 서른셋을 넘긴 사내가 오래 망설인 끝에 꺼낸 부탁이었다. 나는 그 말을 가볍게 받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의형제(義兄弟)가 되어 스무 해 가까이 관계를 이어왔다. 서로의 삶을 과도하게 침범하지 않되, 필요할 때는 말없이 등을 내어주는 사이가 되었다.
그의 부고는 어느 행사장에서 지인을 통해 들었다. 부고를 전한 이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담담했다. 마치 일정 변경을 알리듯,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박남종이 죽었대,”
박남종, 쉰셋. 몸도 생각도 팔팔했다.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은 아이가 죽다니, 둔기로 머리를 맞은 것 같았다. 불과 보름 전에 또 하나의 의제(儀弟)이면서 벗이었던 동지 김대양의 장례식장에 가서 겨우 향 하나 피어주고 왔는데 이것이 무슨 일인가 싶었다.
“어떻게? 왜?”
나는 수 없이 되물었다.
남종이가 근무하는 승마장에서 하루 업무를 마치고 숙소에서 TV를 보다가 쓰러져, 119에 의해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문제는 다음이었다. 병원에서는 치료에 앞서 보호자 확인이 필요했고, 그 절차를 기다리는 동안 그는 숨을 거두었다고 했다. 전해 주는 이는
“살릴 수 있는 시간이 있었는데,”
요즘 병원을 찾으면 접수창구에서 우선 신분증을 요구받는다. 의료보험 남용을 막기 위한 정부 정책이라는 설명이 뒤따른다. 그리고 외국인 노동자나 부정 수급을 차단해 건강보험 재정을 지키겠다는 명분도 덧붙는다. 제도의 취지를 이해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공공 재정을 지키는 일은 중요하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이 절차가 치료보다 앞서기 시작했다. 신분 확인 후 접수가 가능하고, 그 후 접수가 되어야 의사를 만난다. 응급 상황에서도 보호자 여부, 비용 문제, 책임 소재가 먼저 검토된다. ‘응급’이라는 말은 행정 앞에서 자주 힘을 잃는다.
얼마 전 한 지인은 급성 세균 감염으로 백혈구 수치가 급격히 올라 1차 의료기관에서 소견서를 받았다. 이를 들고 서울의 한 대형 종합병원을 찾았지만, 원무과에서 먼저 요구한 것은 치료가 아니라 보증금이었다. 선납을 마친 뒤에야 의사를 만날 수 있었다고 했다. 생명이 위중한 상황에서도 행정과 비용이 의료 행위보다 앞서는 장면은 이제 낯설지 않다.
정부는 의료 시스템이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말한다. 제도는 선진국 수준이고, 수치는 관리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장에서 벌어지는 풍경은 다르다. 응급실은 만성적인 인력 부족에 시달리고, 의료진은 법적 책임과 행정 절차 사이에서 판단을 미루게 된다. 그 사이 ‘살릴 수 있었던 시간’은 누구의 책임도 되지 않은 채 흘러간다.
박남종은 직장이 분명한 의료보험 적용 대상이었다. 그런 그를 병원에서 먼저 확인하려 했던 것은 그의 심장 상태가 아니라 신분과 절차였다. 생명보다 제도가 앞서는 구조 속에서 그는 기다려야 했고, 그 기다림은 치명적이었다.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운다’는 속담이 있다. 의료보험 남용을 막기 위한 장치들이 과연 누구를 보호하고 있는지 묻게 된다. 소수를 막기 위한 제도가 다수의 생명을 위협하는 방향으로 작동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 과정에서 가장 약한 개인이 감당해야 할 몫은 지나치게 크지 않은지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여전히 그가 살 수 있었던 시간을 떠올린다. 신분증보다 먼저 맥박을 확인했다면, 보호자보다 먼저 심장을 살폈다면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까. 이 질문은 개인의 슬픔을 넘어, 지금 우리가 어떤 순서로 사람을 대하고 있는지를 묻는다.
신분 확인보다 먼저 확인되어야 할 것은 사람의 숨이다. 이 순서가 바로 서지 않는 한, ‘살릴 수 있었던 시간’을 제도와 절차 사이에서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글 최기영 시인 (충남작가회의 회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