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미기(석항)는 분지형 마을입니다. 뒤쪽으로 큰 봉우리(북밭골)가 버티고 있고, 그 산마루를 이어 내려와 아담한 뒷동산을 낳고 있습니다. 그 허리쯤, 남쪽으로 멀리 시야가 트이는 절묘한 위치(명당)에 안동김씨 제학공파 죽계공 묘소가 있지요.
옛날 뒷동산은 온통 진달래 천지라 그 묘소 제절은 동네 아이들이 진달래 꽃방망이를 만들어 놀다가 뜯어 먹기도 하고, 암술을 뽑아 누구 것이 더 센가 내기를 하며 꽃싸움을 하던 놀이터이기도 했습니다.
“풀 냄새 피어나는 잔디에 누워” 노래 부르던 비석 마당의 잔디, 시집을 들고 하염없이 앉아 있던 산소 옆 큰 소나무 아래 바위가 어제처럼 눈앞에 선합니다.
그 큰 산소에서 조금 더 내려오면 볕이 좋은 곳에 우리 집이 있었고, 그 옆 남쪽으로 산모퉁이를 돌아 사라지는 신작로가 멀리 보이는 언덕에 둥구나무가 있지요.
나는 타향살이하는 긴 세월 동안 그 나무가 그리워 계절이 바뀔 때면 찾아가 사진도 찍고 나무 아래 앉아 쉬기도 했습니다.
우리 집은 그야말로 초가삼간이었습니다. 새마을운동 바람이 불어 온 동네 집이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뀌었어도 초가지붕을 면치 못하다가 흔적도 없이 헐리고 말았습니다.
우리 집 옆 둥구나무 아래는 여름에 마을 사람들의 쉼터였습니다. 신작로가 휘돌아 나가는 남쪽이 멀리 보이고, 서낭댕이 고개를 넘어 오는 바람이 만나는 언덕 위에 우뚝 서 있어 시원했고, 거대한 나무가 그늘을 만들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더위를 피하고 사람들을 만나는 장소였지요. 어른들은 한낮에 달게 낮잠을 자고 다시 일하러 갔으며, 아이들은 흙바닥에 말판을 그려 ‘꼰(고누)’을 두며 노는 놀이터였습니다.
단오에는 동네 청년들이 볏짚을 추렴하여 둥구나무에 커다란 그네를 매고 여름 내내 타기도 했지요. 낮에는 큰아이들 때문에 내 차지가 오지 않았지만, 둥구나무 옆에 우리 집이 있어 이른 아침이나 저녁에는 나 혼자 그네를 독차지할 수 있어 참 좋았습니다.
병천에서 대학생 보기가 쉽지 않던 시절, 우리 동네에 대학생 농촌봉사단이 왔습니다. 얼굴 하얀 대학생 누나, 훤칠한 형들을 따라다니며 공부도 배우고 놀이도 하던 그 며칠은 행복했고 황홀했습니다.
봉사활동이 끝나고 둥구나무 아래에서 송별회를 하던 여름밤의 한 장면, 잘생긴 한 대학생이 일어나 이육사의 〈청포도〉를 낭송하던 모습이 사진처럼 가슴에 남아 지금도 그 둥구나무를 찾아가곤 합니다.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돌미기를 고향으로 둔 사람들이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 오고 싶은 돌미기 둥구나무!
올해도 녹색의 잎을 내고 푸르게 그늘을 만들다가, 아름다운 빛으로 물들어 단풍으로 지는 돌미기 둥구나무!
가슴속에 아름다운 장면 하나씩 간직하고 그리워하는 여러분!
돌미기 느티나무 한번 보러 오세요.
글|김태명 마을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