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신밟기
지신밟기
  • 천안아산신문
  • 승인 2025.03.23 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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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와

봄비 촉촉이 내릴 줄 알았는데

동짓달 그믐밤처럼

흰 눈이 펑펑 쏟아진다

 

고주망태로 취한 망나니 미친 춤에

저 땅 밑 깊은 곳,

지옥 불가마에서 태형 당하던 금수(禽獸)들이

두더지 굴을 뚫고 기어 나와

곳곳에 쥐불을 붙이며 싸돌아다닌다

 

백만 한울님

수만 개의 만장을 흔들며

금수를 다시 땅속 깊이 묻어야 한다고,

언 땅에 야무지게 뿌리 내린 보리 새순 보듬고

보릿고개를 넘어가자고,

노동에 닳아 문드러진 무르팍 절뚝이며

북치고 꽹과리를 친다

신명 나게 보리밭을 밟는다

 

수백만 개의 발자국이 지난 자리에

아기 젖살 같은 보리 새순이

고개를 들고,

초록빛 환한 불꽃이 피어난다

【시작 노트 】

햇살이 맑고 따사롭던 봄날에 기온이 뚝 떨어지더니 눈이 펑펑 내렸습니다.

봄을 맞이하기 위해 핀 산수유에 눈이 쌓였습니다. 얼어버린 꽃망울을 보고 봄꽃 보기는 틀렸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전국 동토(凍土)에서 모인 수백만 한울님이 잔인한 보릿고개를 넘자고 외쳤습니다. 수만 개의 만장을 휘날리며 북치고 꽹과리 치며 신명 나게 수백만이 힘주어 지신밟기를 했습니다.

겨울 강추위 서릿발에 지친 보리밭에 초록 새순을 올라왔습니다. 바쁘게 수선을 떨며 봄꽃들이 함께 피어오르고 있습니다.

글 최기영

시인-문학의 봄 <64회 신인상 수상>, 수필가-수필집<자유, 그리고 똥> 외 동인지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