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일이 시들해지면 눈을 돌려 먼 허공을 향한다. 밀려오는 소음 소리에 귀를 닫고 눈을 감는다. 지친 육신의 눈에 커튼을 내리고 침잠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사노라면 내게 소중했던 그 무엇이 누군가에 의해 한순간에 아무렇지 않게 시궁창 속으로 쓸려가 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 허무함에 아무도 모르게 숨어 허탈한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내 안에 언제나 비명이 살고 있다.’ 실비아 플라스의 소설 《벨자》에 나오는 대사이다.
바라보는 모든 것이 무의미하고 재미없어졌다. 문득 알 수 없는 감정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나를 발견한다. 진정한 삶의 가치를 못 찾고 나르시즘에 빠져든다. 소위 루저(luser)라 칭하는 패배자의 부류에 속한다 한들 어쩌겠는가. 인간관계에서 밀려오는 가치관의 이질성과 상대적 빈곤이 내가 가야 할 이정표에 간격을 더했다. 감정의 미묘한 흔들림에 이유를 댈 수 없는 우울함이 깃든다. 다시 또 그것이 스멀스멀 스며든다.
삶에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때론 남의 이목이, 때론 책임감이, 때론 승부욕이, 때론 자아 성취라는 근사한 제목으로 내 목줄을 당겨 자아의 감옥 속으로 몰아넣는다. 관습과 굴레에 갇혀 익숙한 근육이 움직여 주는 것처럼 시간은 무작정 흘러갔다.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인지 묻고 자책할 겨를도 없이 바쁘게 하루가 이어졌다.
생을 치열하게 살았다고 해서 모두가 진정한 승자의 삶은 아니었다. 입을 틀어막아도 곳곳에서 소리 없는 절규가 툭툭 삐져나왔다.
잘 살고 싶었다. 좋은 평판을 받고 싶은 것은 아니다. 부와 명예를 원했던 것도 아니다. 그저 마음 한 자락 평안의 바다를 헤엄치며 살고 싶었다. 너그러운 마음과 여유로운 시간을 꿈꾸었을 뿐이다. 보채듯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게 주어진 하루를 자근자근 밟으며 시간을 잘 품고 싶었다. 삶이라는 그물에 물고기 비늘처럼 한 땀 한 땀 잘 꿰어 놓고 싶었다. 허세 부리듯 삶의 지루함을 감추고 싶었나 보다.
대부분 사람은 관계에서 오는 소속감으로 정서적 안정감을 느낀다. 혼자서 살 수 없기에 주변과 어우러지며 집단을 만든다. 하여 사랑하는 사람을 만들고, 가족을 만들고, 친구를 만들고 이웃을 만든다. 그리곤 원하는 사람과 원하는 시간에 소통이 안 될 때 불안해진다. 상대에 대한 신뢰만큼 기대감이 채워지지 않을 때 서운함과 실망이 찾아오기도 한다. 외로움이 싫어서 관계를 만들고 소음이 싫어서 혼자이기를 원한다. 사람이 위로되지만 더러는 가까운 사람이 더 상처가 되기도 한다. 그때면 여지없이 또 혼자이기를 자처한다. 삶에 다시 슬그머니 그늘이 드리운다.
자기가 만든 감옥에 갇혀 자기를 학대하고 생사를 넘나들며 아파한다.
시치프스 신화의 형벌처럼 삶은 돌고 돌아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인가.
내 안에 언제나 ‘비명’이 꿈틀거리고 있다.
글 김순례 수필가 - 수필집 《마음속 풍경》 외 동인지 다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