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잊히지 않는 빛바랜 기억 하나가 있다. 꿈이었던가 싶은…. 해가 기울어 가는 스산한 3월 초 늦은 오후, 낮잠을 자다가 수선스러운 분위기에 깨어났다. 뭔가 급박하게 돌아가는 낯선 집안 분위기가 직감되었다. 평소 들리지 않던 갓난아기의 울음소리가 부스스 눈뜬 내 고요를 깼다. 동생이 태어났단다. 웅성거리는 바쁜 어른들 발길 너머로 짠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던 누군가의 눈길이 느껴졌다. 4살, 순한 아이로 귀여움을 받던 난 이제 더 이상 막둥이가 될 수 없었다. 돌이킬 수 없는 깊은 외로움 같은 것이 내 속 어딘가에서 비집고 올라오고 있었다. 늦겨울 쌀쌀함도 잊고 툇마루에 걸터앉아 붉게 저물고 있는 노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순간 집안의 시끄러운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고 해가 저물어가며 우리 집을 붉게 물들이고 있는 것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아련한 서글픔이었다. 원치 않은 감정의 파편이 내 허락도 없이 불쑥 내 인생에 쳐들어왔다. 그것이 내 일생을 통해 마음 한쪽에 웅크리고 있던 것이 고독임을 알아챘을 땐 난 이미 아이가 아니었다. 한편으로는 깊은 겨울잠에서 깬 웅녀(熊女)처럼 비로소 사람이 된 것 같은 안도감마저 들었다.
도서관엘 갔다. 서고를 돌다가 꺼낸 것이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였다. 순식간에 한 권을 다 읽고 나서 느껴지는 감정이 “뭐지?” 였다. 말없음표를 수도 없이 찍으면서 며칠 동안 그 책 생각에 사로잡혔다.
겉으로 보이는 줄거리는 주인공 영혜와 남편, 네 살 터울 위의 언니(인혜)와 비디오 아티스트 형부 이야기이다. 모든 현실을 안으로 꼭꼭 재우며 무덤덤하게 살아가는 영혜, 어느 날 찾아온 괴이한 꿈과 함께 시작된 채식주의. 그 뒤를 잊는 그녀 남편과 가족들의 대응이 빠르게 펼쳐진다.
어려서부터 주목받지 못하고 부모의 사랑도 못 받으며 살아온 영혜, 평범하다 못해 무미건조한 삶 속에서 존재감의 실체를 찾아 떠나버린 것이 채식주의의 시작이다. 나무가 곧 자신이라고 생각했던 그녀. 정신과 병동에 갇히어 목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물구나무서기에 매달리며 뿌리내리기를 원하던 그녀. 손이 땅 밑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거꾸로 치켜든 발에서 가지가 새로 나오고 잎과 꽃들이 피어나고 있다고 믿던 그녀. 자신은 나무이므로 음식이 필요 없고 물만 있으면 된다며 끝까지 음식물을 거부한다. 비쩍 말라서 산송장이 되어가던 그녀는 결국 소화기 내막이 붙어버리고 만다. 평소 어떠한 표현도 잘 못하던 두루뭉술한 성격의 그녀 내면에는 어떤 것들이 있었을까? 표현 못 하던 내면에 사로잡힌 고독의 뿌리가 쌓이고 쌓여서 정신적 히스테리로 꿈이라는 매개체를 붙잡은 것일까?
언니 인혜, 어쩌면 영혜보다 더 정신적 충격을 꾹꾹 누르며 살아왔을 인물이다. 책임감과 강박관념으로 무장한 체 겉보기에는 세상에 다시 없을 완전한 사람이다. 딸, 아내, 언니, 누나, 엄마의 역할을 무리 없이 소화해 낸다. 하지만 내면의 그녀는 동생보다 더 한 감정의 경계에서 정신적 공황 상태를 맞이한다. 어릴 때부터 암묵적으로 길든 책임감으로 정신을 무장하고 삶의 고비마다 아슬아슬 위기를 힘겹게 걸어가고 있다. 자기보다 앞서 동생이 정신과를 찾자, 어쩌면 자기가 먼저 정신과 병동에 들어와야 할 존재였음을 자각하며 의구심을 갖는다.
두 자매의 닮은 듯 다른 인생사 우여곡절 소설을 읽으며,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도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현대인들 대부분 숨겨놓거나 감춰진 정신질환자들이 아닐까? 정신과 의사들이 진단하는 ‘환자’라는 명칭이 모호해진 위기의 시대이다. 곳곳에 눈을 희번덕이는 가상의 정신병자들이 난무한다. 의사의 진단서만 없을 뿐 숱한 정신질환자들이 거리를 활보한다. 나도 혹은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알 수 없는 정신의 올가미에 걸려들어 사선을 넘나들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복잡해지는 문명 속에서 똑바로 정신 차리고 살아가는 일이 버겁게 느껴진다. 그때마다 마음의 뿌리인 정신 줄을 단단히 붙들고 세상이라는 광야로 나서야 하리라.
사람은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고독이 있다. 그것을 잘 보듬고 가꾸며 사랑할 일이다. 나무이기를 간절히 원했던 소설 속 주인공 영혜는 나무가 자신의 고독한 본체였음을 알았다. 그것을 현실성 있게 잘 키우고 갈무리했더라면 아픈 결말이 나지는 않았으리라. 동생의 아픔을 바라보면서 언니는 좀 더 단단한 고독의 실체를 보듬었을까. 영혜와 언니는 나의 또 다른 모습이며 아바타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련하게 끝나버린 소설 속 두 자매 이야기가 가슴 저릿한 통증으로 다가온다.
삶은 늘 그랬다. 내가 초대하지 않은 시간 속으로 찰나가 훅 밀고 들어왔다. 그것이 내 운명의 필연으로 받아들이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이순(耳順)의 나이가 지나서야 답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어린 시절 내 허락도 없이 불쑥 찾아온 그 녀석이 나와 가장 친한 친구이자 내 뿌리였음을 인정했다. 내 삶이 끝나는 날까지 고독이라는 그 녀석과 친구삼아 함께 가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며 편안해지기로 했다.
삶은 누구에게나 전인미답(前人未答) 시간의 미로 속으로 걸어가야 하는 거니까.
글 김순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