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산과 위례성 명칭, 문화관광 콘텐츠로는 파워 브랜드이다
직산과 위례성 명칭, 문화관광 콘텐츠로는 파워 브랜드이다
  • 천안아산신문
  • 승인 2024.02.19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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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직산 위례성에 대한 지역 시민과 지역 사회의 관심이 많이 식어있다.

지금은 천안의 작은 마을에 불과한 직산(稷山)은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마한의 중심국인 목지국의 수도였다는 설과, 초기 백제 수도 위례성(慰禮城)이라는 설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려사 56권, 지(志) 제 10권에는 稷山縣本慰禮城, 百濟始祖溫祚王, 開國建都. 後高句麗取之, 改爲蛇山縣, 新羅因之, 爲白城郡領縣. 高麗初, 更今名이란 표기가 있다. 번역 하자면“ 직산현은 본래 위례성(慰禮城)으로, 백제(百濟) 시조 온조왕(溫祚王)이 개국하면서 이곳에 도읍을 세웠다. 뒤에 고구려(高句麗)가 이곳을 차지하여, 사산현(蛇山縣)으로 고쳤으며, 신라(新羅)가 그대로 이어받아 백성군(白城郡)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고려(高麗) 초에 지금의 이름으로 바꾸었다“이다.

조선왕조 실록 세종 실록 149권 지리지 직산현에는 “稷山縣: 本慰禮城, 百濟始祖溫祚王 作都建國”이란 말이 나온다. 직산현은 본래 위례성으로 백제 시조 온조왕이 수도를 정하고 나라를 세웠다는 말이다. 남한 산성이 있는 광주지역에 대해서는 “도읍을 만들고,건국했다(作都建國)“란 표현은 없고 고지도 상에도 광주 남한산성이 위례성이라는 표기는 없다. 삼국유사 2권 제2 기이(紀異)에 따르면, 弥雛忽仁州, 慰礼今稷山 즉, 미추홀은 인주(仁州)이고, 위례는 지금의 직산(稷山)이다란 문장이 나온다. 인주란 지금의 인천과 충남 삽교호 인근의 인주면이라는 불일치된 주장이 남아있다. 

자료: 서울대 규장각 고지도, 직산현 위례성
자료 : 서울대 규장각 고지도, 직산현 위례성

역사 문화를 관광 자원화하는데 기존 대학 강단에서 아무리 부정하려해도 더 이상의 논란은 필요 없을 듯 하다. 그들의 자기 주장이 삼국 유사나 고려사 또는 고려사 절요, 조선 세종실록의 기록을 뛰어넘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직산은 언제 이런 명칭을 얻었을까? 일반적으로 말하면 직산은 백제시대에는 위례성이라 했고, 고구려와 신라를 거치면서 사산현(蛇山縣)으로 부르다가 940년(고려 태조 23)에 지금의 명칭인 직산으로 바뀌었다고 볼 수 있다.

고려 이전의 역사서가 전혀 없으니 알 수 없으나, 직산(稷山)이란 한자 풀이를 해 보면 오곡중 하나인 피의 뫼라 직역해 볼 수 있다. 곡물에 속하는 稷은 국가가 제사 지내는 곡식의 신에 속하며 보통은 땅의 신을 뜻하는 社와 같이 쓰여 社稷으로 사용하며 사직은 국가를 뜻하기도 하다. 역사 드라나에서 “전하 종묘 사직을 보존하시옵소서”라는 말리 자주 사용되는 이유이다.

직산(稷山)이란 말은 피가 있는 산 또는 국가에 제사 지내는 산으로 유추해 볼 수 있으나 후자가 더 합리적인 해석일 것이다.

직산현 고지도를 살펴보면 직산현 관아 옆에 온조묘기(溫祚廟基)란 표기와 설명이 명확히 있다. 온조의 사당 터 라는 것이다. 그리고직산현 관아 북쪽을 감싸고 있는 산은 사산(蛇山)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지금은 성산(城山)으로 부르고 있다. 1872년 직산현 지방지도를 보면 성산 꼭대기에는 사직단, 성황당, 여직단(厲稷壇) 등 3개 건물이 표시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여직단은 문둥병 등 험한 병으로 죽은 자를 위해 기도하는 사당을 말한다.

자료: 서울대 규장각 고지도, 직산현 사산 사직단
자료: 서울대 규장각 고지도, 직산현 사산 사직단

이렇듯 각종 문헌 자료는 직산의 역사 문화를 풍부하게 할수 있는 충분한 역사적 증거를 갖고 있다.

기존 역사서를 기준으로 살펴보면 백제는 678년 기간중 위례성(직산)백제 13년, 한성(서울)백제 480년, 웅진(공주)백제 63년, 사비(부여)백제 122년으로 볼 수 있다. 서기전 18년 직산에 세워진 초기 위례성이 너무 좁아서 서기전 5년 다시 옮겨간 곳이 큰 물줄기(한강) 남쪽(하남)인 한성이고, 그곳에서 무려 480년간 있다가, 고구려의 장수왕 침입과 백제의 개로왕이 사로 잡혀 참수 당하고, 백제 왕성이 불 타자 뒤이어 왕 위에 오른 문주왕(文周王)이 475년 화급하게 공주(熊津)로 옮기고, 538년 성왕은 국호를 남부여(南夫餘)로 개칭하면서 수도를 사비(부여)로 옮겼다. 이렇게 추론하면 퍼즐이 잘 맞는데, 아직까지도 고대사 전공 사학자 들은 아무런 근거도 없이 주장과 추측만으로 갑론을박하고 있다.

발굴과 지표 조사 등 고고학적 증거를 들이 대는게 고대사 연구의 한 방편이나, 한성이 480년간 백제의 수도였다는 구체적인 왕성 위치나 증거물은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480년간 왕성 위치는 어디였을까? 그것도 하나 확신을 갖지 못하는게 지금 한국 고대사 연구자들의 현실이다.

문화 콘텐츠를 활용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증거없는 주장에 휘둘려서는 않된다. 없는 것도 만들어 내는 시대에 고문서에 고스란히 남아있는 역사적 사실을 문화 콘텐츠로 활용도 못하는가?

직산현 관아는 지금의 철도를 기준으로 지리적으로 직산역보다는 성환역에서 더 가깝다. 성환역에 천안 북부와 관계없는 천안 호두과자 그림을 걸어 놓을게 아니라, 성환 찰방터와 직산 관아가 그려져 있는 고지도를 확대하여 걸어 놓는다면 이곳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에게 많은 상상력을 줄 수 있다. 조선이 일본에 강제로 병탄(倂呑)된 1910년 이전까지 성환 도찰방(成歡道察訪)이 있던 성환은 천안, 목천, 예산, 공주, 연기, 김제까지 12개의 역참을 총괄하던 곳으로 현감과 같은 종6품이 관장하였다. 역참은 교통, 통신, 숙박 등 기관이었으며 1894년 갑오경장(개혁)때까지 존속하였다. 성환 역참은 지금의 성환 월봉산 아래 성월리 일대에 있었으며 지금은 오래된 느티나무 3구루만이 남아 있으나 1872년 지방 지도를 보면 성환 찰방터가 아주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천안 지역 사회에서는 2010년대 초반부터 초도 위례성에 대한 많은 연구와 발표가 있었고, 고지도 직산현 지도상에도 직산현 관아 오른편에 온조묘기(溫祚廟基)가 선명하게 표기되어 있다. 경기도 광주의 남한산성내 있는 온조왕묘는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1636년(인조 14년)에 직산에서 옮겨진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따라서 남한산성의 온조왕묘는 더 이상 논할 것이 못된다.

자료: 서울대 규장각 고지도,직산현 온조사당

직산의 초도 위례성은 역사적 진정성(Authenticity)을 확보하고 있다. 고지도나 고려사, 삼국유사 등 많은 역사서를 통해서 말이다.

직산은 한자 뜻 그대로, 곡식의 신이 있는 산으로, 한 국가의 사직을 모신 산이란 뜻으로 풀이될수 있다. 백제 초대 왕인 온조왕이 이곳서 잠시 다스리다 한성으로 이전한 고터이며, 백제의 원류지를 기리는 고장이기도 하다. 사산(지금의 성산) 정상에 위치해 있던 사직단에 대한 의미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성환과 직산은 이웃 고을로 백제 역사 자원이나 문화 유적 자원을 통하여 축제, 공연 또는 개별관광 상품이나, 유트브 등 SNS 등을 공동으로 개발할 필요가 있다.

천안시도 예전 직산현과 목천현을 천안 이름하에 가두어 둘게 아니라 장소성(Placeness)확보를 위하여 예전 명칭을 잘 활용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해야 한다.

직산현은 목지국의 수도 혹은 초기 수도인 직산 위례성이란 역사적 입지를 갖고 있는 장소로서 충남도청이나 천안 시청은 이를 승화시키고, 발전시킬 수 있는 다양한 문화 예술 역사 콘텐츠를 개발하여 국내외 관광객 유치에 박차를 가하기를 바란다.

고지도에 표기된 옛 지명과 고을 상황을 성환, 직산역에 그리고 천안역에 확대하여 비치하면 어떨까? 온조 사당의 주도권도 광주 남한산성에게 빼앗기고, 위례성이란 지명도 송파구에 빼앗긴다면 천안 시민들은 스스로 문화역사 주도권을 포기하는 것이다.

원천적 증거를 갖고 있는 역사문화적 주도권을 빼앗기는 것은 지역문화와 관광 경쟁력을 빼앗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인 장태순은 천안이 고향으로, 한국 관광공사 컨벤션 뷰로 실장, 인천관광공사 마케팅 본부장, 부산관광공사 마케팅 본부장, 계명대학 호텔관광학과 교수 등을 역임하였음
필자인 장태순은 천안이 고향으로, 한국 관광공사 컨벤션 뷰로 실장, 인천관광공사 마케팅 본부장, 부산관광공사 마케팅 본부장, 계명대학 호텔관광학과 교수 등을 역임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