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철학사산책12] 큰 배움은 차별 없는 미소로 시작된다
[천안철학사산책12] 큰 배움은 차별 없는 미소로 시작된다
  • 천안아산신문
  • 승인 2024.02.08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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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담 서경덕(1489~1546)은 15세기 말에 태어나 주로 16세기 전반기를 살아간 조선시대 대표적인 유학자 중 한 명이다. 천원짜리 지폐와 오천원짜리 지폐에 초상화로 등장하는 퇴계 이황(1502~1571)과 율곡 이이(1536~1584)에 바로 한 세대 앞서 활동한 학자로서 독창적인 학문을 펼친 뛰어난 성리학 대가로 평가돼왔다. 해방 직후 나온 현상윤의 『조선유학사』(1949)에서는 조선성리학 6대가의 첫번째로 꼽히는 인물이다. 이 6대가가 누구냐 하면, 서경덕, 이황, 이이, 임성주, 기정진, 이진상인데, 아마도 서경덕, 이황, 이이는 널리 알려져있기 때문에 낯설지 않을테지만 18~19세기 유학자들인 임성주, 기정진, 이진상은 전공연구자 외에는 거의 이름조차 모를 정도로 매우 낯설 것이다. 하여간 서경덕은 조선시대 선비들을 이야기할 때 절대로 빠뜨릴 수 없는 대단히 중요한 인물이라는 점이 핵심이다.

서경덕은 평생 공부를 한 사람이니 글도 많이 썼을텐데 남아있는 것은 달랑 『화담집(花潭集)』이라는 책 한 권뿐이다. 기왕 말이 나왔으니 맛보기로 거기서 글조각 하나 따와본다.

땅의 신(神)께서 생물 중의 진귀(珍貴)한 것을 드러내실 적에는 반드시 특수한 땅에 기이(奇異)하게 나도록 하신다.

惟后媼毓靈而效珍(유후온육령이효진) 必奇崛之異地(필기굴지이지)

- 「도죽장부(桃竹杖賦)」 중에서. -『화담집·사변록』(김학주 역, 1973, 대양서적) 41쪽.

여기서 땅의 신이라고 옮겨진 ‘후온(后媼)’은 이를테면 지모신(地母神)과 같이 땅을 관장하는 여신(女神)을 일컫는다. 땅의 여신은 진귀한 것을 기이한 환경에 내놓는다고 간단히 해석해볼 수 있다. 그리고 세상에 진귀한 것이 나오는 것은 아무데서나 나오는 것이 아니요, 아주 기이한 환경에서나 나오는 것인데, 이것은 우연히 나온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신비로워서 땅의 여신이 내놓는 것과 같이 신성한 측면이 있다고 다소 길게나마 다시 풀이해볼 수 있다. 나는 이러한 풀이에 더해서 인물의 탄생도 마찬가지 이치에서 마련된다고 생각한다. 특별한 환경에서 특별한 인물이 나온다는 것이다. 한국이라는 곳도 특별한 곳이니 특별한 인물이 많이 나온다는 것이요, 천안이라는 곳도 특별한 곳이니 특별한 인물이 많이 나온다는 것이다.

각설하고, 내가 천안지역사를 공부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늘 던지는 질문이 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의 질문이다. “서경덕은 천안과 무슨 인연이 있었을까?” 내가 틈나는 대로 이리저리 자료들을 찾아보고 있지만 아직까지 서경덕과 천안을 이어주는 직접적인 흔적들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서경덕은 황해도 개성에서 살았으니 팔도유람이라도 떠났다면 천안삼거리 정도는 지나쳤을 법하지만, 행여 눈꼽만큼의 인연이라도 있겠거니 하며 가당찮은 집념으로 눈을 부릅뜨고 찾아봤으나 아주 단편적인 기록으로나마 먼지같이 남아있는 것도 아예 하나도 없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렇게 빨리 포기하는 연구자가 아니다. 직접적인 것이 없다면 간접적인 것이라도 꼭 들쑤셔서 기어코 찾아내는 것이 또한 연구자의 미덕 아니겠는가.

병천면 용두리 안쪽 맨 끄트머리에 있는 만화동마을. 마을입구에는 수령 400년의 노거수가 있고 멀리 야트막한 언덕 위에는 청절사라는 사당이 있다.
병천면 용두리 안쪽 맨 끄트머리에 있는 만화동마을. 마을입구에는 수령 400년의 노거수가 있고 멀리 야트막한 언덕 위에는 청절사라는 사당이 있다.

아무튼 찾아내기는 하나 찾아냈다. 어우 유몽인(柳夢寅,1559~1623)이 저술한 『어우야담(於于野談)』에는 ‘명기 황진이’라는 제목의 단편 속에 한 토막의 일화로 서경덕이 얼핏 엿보인다는 것을 찾아낸 것이다. 왜 『어우야담』인가? 유몽인 썼으니까 『어우야담』을 문제삼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유몽인인가? 도대체 유몽인이 천안하고 무슨 관계가 있길래 거론하는 것인가? 천안에 유몽인의 사당이 있기 때문이다. 거 몰랐나?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 만화동마을 언덕 위에 유몽인을 모시는 청절사(淸節祠)라는 사당이 있다. 오호라~ 꿩 대신 닭이라 했으니~ 옹색하고 궁상떠는 방식이기는 하나 유몽인 선생의 사당을 찾아가며 서경덕 선생을 되돌아보는 산책이나 떠나자꾸나~

400번을 타고 종점인 병천3리 정류장에 내려서 유관순열사사적을 향해 나는 익숙한 발걸음으로 씩씩하게 걸어갔다. 401번 버스를 타면 종점이 유관순열사사적이라서 금새 가까이 다가가는 기분이 들겠건만 띄엄띄엄 다니는 401번을 타기란 행운이 곁들여야 하기 때문에 그저 마냥 기다릴 수는 없고 해서 우선 닥치는 대로 오는 버스 잡아타고 간 것이었다. 어쨌든 천천히 병천시내에서 빠져나와 유관순열사사적 진입로로 직진, 그리고 유관순기념관 앞에서 좌회전, 그리고 매봉산을 휘휘 돌아서 유관순열사 생가가 있는 용두리로 접어들었다. 여기서 남쪽으로 남쪽으로 2킬로미터 가까이 걸어가야 하는데 거의 용두리 남쪽 끄트머리 매봉로 도로 너머로 가야 하는 길이었다. 40분 정도 소요되는 거리였다.

어우 유몽인을 모시는 청절사(淸節社)
어우 유몽인을 모시는 청절사(淸節社)

진이는 화담 서경덕이 처사(處士)로서 행실이 고상하며,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으나 학문이 정수(精粹)하다는 소문을 들었다. 이에 그를 시험하고자 하여 허리에 실띠를 묶고 『대학(大學)』을 옆에 끼고 가서 절을 올리고 말했다.

“제가 듣기로는 『예기(禮記)』에 ‘남자는 가죽 띠를 매고 여자는 실띠를 맨다’고 했습니다. 저 또한 학문에 뜻을 두어 실띠를 두르고 왔습니다.”

화담은 웃으며 받아들여 가르쳤다.

- 『어우야담』(신익철 외 역, 2006, 돌베개) 132쪽.

『대학』은 성리학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사서(四書) 경전 중의 하나다. 초입자가 우선적으로 공부할 것은 『소학(小學)』이겠건만 어쨌든 황진이는 ‘그를 시험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으니 엉뚱한 모양새를 하고서 격에 맞지 않는 『대학』을 옆구리에 끼고 나타났다. 게다가 책에서 일러준 대로 실천한다고 『예기(禮記)』에 나오는 구절을 따라 실띠까지 매고서 배움을 청하는 절을 올렸다. 자신에게 추파를 던지던 여러 선비들을 놀려먹던 황진이의 입장에서 소문난 선비 서경덕이라고 별 수 있겠나 하는 호기심어린 눈매를 애써 감추며 서경덕의 반응을 살폈을 것이다. “여보게, 공부는 그만 두고 술이나 한 잔 나눔세~” 이런 목소리가 나와야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서경덕은 그저 그녀를 ‘웃으며 받아들여’ 가르침을 주었다는 이야기다. 나는 서경덕의 이 웃음이야말로 커다란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대학(大學)’이 글자 그대로 나타내는 바 ‘큰 배움’이라는 것은 귀천도 없고 성별도 없고 연령도 없고 빈부도 없이 그 어떤 분별에 있어서도 아무런 차별이 없는 태도에서 나와야 하는 것이 아니던가. 차별 없는 미소야말로 큰 배움의 시작이 아니던가 이 말이다.

이참에 황진이에 대해 유명한 기생으로보다는 서경덕의 제자로 더욱 관심깊게 살펴봐야 한다는 지론을 펼쳤던 역사학자 이이화의 이야기도 곁들여보면 좋을 것 같다.

황진이는 서화담의 삶과 행동을 보고 그야말로 구원의 남성이라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녀는 서화담에게서 진정한 학문과 사상을 배우게 되었다.(...) 서화담이 죽고 난 뒤, 황진이는 서화담의 발걸음이 닿았던 곳을 두루 찾아나섰다고 한다. 금강산, 속리산, 지리산, 묘향산은 물론, 서화담의 숨결이 느껴지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보았다고 한다.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이렇게 찾아다닌 뜻은 새삼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황진이는 죽을 때까지 이런 여행을 멈추지 않았다고 하니, 아마 구원의 남성, 아니면 영원한 스승의 잔영(殘影)을 이런 데서 찾아보려 한 것이 아니겠는가?

- 『이이화 역사인물 이야기』(이이화, 1989, 역사비평사) 55-56쪽.

 

1968년도에 세워진 유몽인 시비(詩碑)
1968년도에 세워진 유몽인 시비(詩碑)

 

매봉로에 당도하니 길 건너 만화동마을 언덕이 훤히 보였다. 한쪽 언덕에 청절사가 있는 것도 보였다. 최근에 눈비가 내리고 구름이 끼는 흐린 날씨가 연속되어서 사진이 좀 흐릿흐릿 나올 것이 예상됐지만 더 좋은 시간을 찾기가 어려웠다. 마을 입구에 있는 노거수는 보호수로 등록되어 있는데 안내판을 보니 1980년대에 수령이 370년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그러면 2024년 지금으로 다시 계산하면 약 400년 남짓이 나온다. 바로 이때 퍼뜩 드는 생각이, 유몽인이 17세기 초반까지 살았던 인물이니 21세기에서 4세기를 빼면 17세기, 오호라~ 비록 유몽인이 직접 이곳에 와서 자리잡고 살았던 것은 아니지만 여기를 고향으로 삼고 그를 기리며 살았던 그의 가족과 문중 사람들이 그 기억을 환기하려고 수령을 그렇게 정했겠구나 싶었다.

유몽인은 어쨌거나 천안의 역사인물로 생각하고 좀 더 깊이 자세히 살펴봐야 한다. 나야 물론 기회가 되는 대로 지면을 이용해서 그에 관련된 이야기들을 많이 챙겨볼 생각을 해본다. 특히 『어우야담』은 천안시민들이 천안의 필독고전으로 삼고서 널리 읽었으면 좋겠다. 청절사 옆뜰에는 기념비들이 서있는데 그 한쪽에 1968년도에 세운 유몽인 시비(詩碑)가 있다. 시비 전면에 새겨진 시를 옮겨보며 오늘의 산책을 마무리해 보기로 한다. 물론 한시를 번역한 것이다. 자유롭게 음미해보면 좋을 것 같다.

칠십 된 늙은 과부

홀로 빈방 지키며 살아

교양 있는 옛 女史(여사)의 시 익히 읽었고

자못 太妊(태임) 太姒(태사)의 교훈도 알고 있다

다른 사람들이 재혼을 권하며

槿花(근화) 같은 미남자 있다 하지만

흰머리에 젊은 양 모양 내다니

어찌 연지분이 부끄럽지 않으랴.

- 만화동 청절사 유몽인 시비에서

글 송길룡(천안역사문화연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