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철학사산책11] 자기본원(自己本原)의 사유방식
[천안철학사산책11] 자기본원(自己本原)의 사유방식
  • 천안아산신문
  • 승인 2024.02.01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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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청창은 목천현(천안) 출신이면서도 남편의 묘를 전의현(세종)에 마련하는 등 그녀의 생활권이 목천현과 전의현에 걸쳐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녀는 천안시 역사인물이면서 동시에 세종시 역사인물이 된다. 세종특별자치시는 2012년 공식적으로 출범을 했는데 광역시로 출범했기 때문에 충청남도에서 떨어져나가게 됐지만 그 이전에 세종시의 전신인 연기군은 어엿한 충청남도의 한 구성원이었다. 그래서 천안과 연기가 모두 충남에 속하던 그 당시에 나온 어느 충남 역사인물 소개서에서는 아무 부담없이 곽청창을 충남 역사인물로 지정하고 설명했었다. 그런데 이런 차원에서도 문제는 있었다. 내가 예전에 살펴봤던 그 소개서에서는 굳이 곽청창을 천안시보다는 연기군의 역사인물로 표시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소개서의 입장에서 연기군 역사인물인 곽청창을 지금의 세종시 지역사 연구에서는 과연 중요하게 대접하고 있을까 궁금해질 수 있는데 이와 관련하여 이미 두루 살펴본 나의 경험에 비추어보면 세종시에서는 현재 곽청창에 대해 거의 관심을 두지 않는 실정인 것 같다.

과거에 곽청창을 연기군으로 가져갔으니 천안시에서는 손을 놓아버린 상태에서 지금에 세종시가 연기군에 이어 곽청창을 챙겨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니 곽청창은 주인 없는 허공에 붕 떠버린 신세가 돼버렸다. 나는 이것이 행정단위를 중심으로 지역의 역사인물을 대하는 방식의 불합리한 한계라고 생각한다. 이 한계는 반드시 극복되어야 한다고 본다. 한 역사인물에 대해 여러 지역이 관련이 있다면 관련된 모든 지역이 함께 그 역사인물에 대해 공동으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말이다.

1905년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주요 역사들이 건립되고 영업을 시작했다. 이때 천안역도 생기고 전의역도 생겼다. 전의역은 경부선 역사 중 아직 일본 양식을 유지하고 있는 거의 유일한 역사다.
1905년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주요 역사들이 건립되고 영업을 시작했다. 이때 천안역도 생기고 전의역도 생겼다. 전의역은 경부선 역사 중 아직 일본 양식을 유지하고 있는 거의 유일한 역사다.

이런 차원에서 나는 지난 일요일 오후 잠시 세종시 전의면에 다녀오기로 했다. 어차피 옛날부터 전의지역은 천안을 생활권의 중심으로 삼고 있었다. 천안 시내버스가 전의지역까지 자주 운행되고 있어온 것이다. 천안시 주민이라면 천안 시내 어딘가를 다녀오는 가벼운 마음으로 얼마든지 사뿐히 다녀올 수 있는 가까운 곳이란 말씀이다. 종합터미널 버스정류장에서 나는 701번 버스를 탔다. 타면서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다. 꼭 버스기사에게 전의에 간다는 말을 하고 할증된 요즘을 내야 한다. 안 그러면 전의 가까이 가서 할증요금 안 내고 부정승차한 사람 취급 받기 십상이다. 요금은 교통카드로 2,700원이다. 종합터미널에서 출발해서 전의면에 들어서 중심지인 전의역까지 당도하는 데에는 거의 1시간 정도 소요된다. 시 외곽을 드라이브한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다녀오면 딱 알맞다고 본다.

전의지역에 찾아가서 이리저리 둘러본다고 뭔가 나오는 건 아니라는 것은 잘 안다. 곽청창과 관련된 직접적인 자료를 얻기란 현재로서는 불가능하다. 남편 묘가 ‘고도박’이란 곳에 있다는 단서만 가지고는 그 정확한 장소를 확인할 수도 없는 상태다. 그렇다면 무엇이냐? 그저 궁한 대로 말하자면, 그녀가 가졌던 생각의 방식이 무엇이었을까 궁리해보는 데에 의미가 있다. 일요일 오후 전의역 앞 거리는 한산했다. 머릿속으로 몇 가지 생각의 주제를 떠올리며 역 가까이 몇 군데만 스치듯이 산책하기로 했다.

곽청창의 그 유명한 남편묘지명을 거의 최초로 제대로 널리 알려준 인물은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까지 살았던 정동유(鄭東愈, 1744~1808)라는 선비다. 그녀의 남편묘지명 전문이 정동유가 1806년에 완성한 『주영편(晝永編)』에 오롯이 수록되어 있다. 『주영편』은 일종의 백과사전 형식으로 꾸며진, 두 권으로 이뤄진 책인데 202개의 항목을 표제로 하여 사실관계를 따지거나 의미평가를 부여하는 등 엄정하고도 빼어난 변증적인 서술을 포함하고 있다. 그 202개 항목들이란 어떤 성격의 것들인지 대충 나열하면 이렇다. “먼저 상권은 지리·건축·역법·세시풍속·민속·외국·표류·청나라·고려·사물의 기원·제도·역사·문헌·금석문 등을, 하권은 훈민정음·어휘·저술·문물·일본 유학·붕당·학술·지역·선조·명현·문학·사물·노비 등을 다루고 있다.”(『주영편』, 안대희 외 역, 2016, 휴머니스트, 17쪽) 당대의 선비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소재들이 거의 망라되면서도 훈민정음을 최고의 작품이라 격찬하는 데에서부터 노비제도는 비인간적이니 철폐해야 한다는 데에 이르기까지 섬세한 심미안과 준엄한 비판정신이 녹아있다. 이런 가운데 그 저명한 선비들의 명문들도 많았을 터인데 그런 것들을 거의 다 제쳐놓고 정동유는 곽청창의 글과 같은 작품들을 각별하게 평가하여 수록하고 있으니 그녀의 글에 내려진 평가가 매우 높고 깊을 것이라고 짐작하게 된다.

이러한 부녀자의 문필은 참으로 쉽게 얻을 수 없으며, 이렇게 묘지명을 지은 경우도 매우 드물기에 수록한다.

- 『주영편』(안대희 외 역, 2016, 휴머니스트, 17쪽)

위의 인용문은 정동유가 곽청창의 남편묘지명을 『주영편』에 전재하고 그 끝에 간략하게 붙여둔 평가의 문장이다. 짧은 문장이기는 하지만 여기에서는 두 가지 핵심 평가어가 두드러진다. 그녀의 글이 “쉽게 얻을 수 없으며,” “매우 드물기에 수록한다” 하는 부분인데, 다시 줄이자면 하나는 ‘얻기 어려움’이라는 평가어가 있고, 다른 하나는 ‘매우 드묾’이라는 평가어가 있다. ‘얻기 어려움’이란 누구나 쉽게 쓸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쉬운 글이 아니라는 뜻이고, ‘매우 드묾’이란 어디서나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가벼운 글이 아니라는 뜻이다. 물론 당연히 곽청창의 글을 극찬하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좀 더 구체적으로 어떤 측면에서 바라본 평가인지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듯하다.

전의역 앞에 설치된 전의3.1만세운동 기념조형물. 1919년 3월13일 전의장날에 17명의 애국지사가 만세운동을 벌인 것을 기념한 것이다.
전의역 앞에 설치된 전의3.1만세운동 기념조형물. 1919년 3월13일 전의장날에 17명의 애국지사가 만세운동을 벌인 것을 기념한 것이다.

정동유는 『주영편』에서 중국의 탁월한 문집총서라 할 만한 『사고전서(四庫全書)』에 조선인의 문집으로는 유일하게 화담 서경덕의 『화담집(花潭集)』이 채택되어 수록된 것에 경탄하면서 이러한 평가를 붙인다.

화담 서경덕 선생은 독자적인 도학을 바탕으로 독창적인 의론을 세웠다. 남의 것을 모방한 학설로 변죽만 울리는 학설을 주장한 분이 아니다.

- 『주영편』(안대희 외 역, 2016, 휴머니스트, 60쪽)

따지고 보면 서경덕의 글도 그의 “독자적인 도학”에서나 “독창적인 의론”에서나 결코 그 독자성과 독창성이 쉽게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요 더구나 어디서나 흔히 접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수많은 조선인 문집 중에 유일하게 중국 걸작선집에 수록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여기서 서경덕의 독자성/독창성은 결국 곽청창의 “얻기 어려움”/“매우 드묾”과 상통하는 평가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자기만의 철학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얼마나 얻기 어려운 독자성이겠는가. 누구의 것도 흉내내지 않고 탁월한 글을 써낸다는 것도 얼마나 찾기 어려운 희귀한 독창성이겠는가. 이렇게 보면 정동유가 곽청창에 대해 내린 평가도 서경덕과 마찬가지로 독자성/독창성의 관점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주영편』의 번역서에서는 번역자가 해제를 통해 위당 정인보의 정동유에 대한 평가를 요약해서 해설하고 있는데 이 해설 부분도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함께 살펴보면 좋을 것 같다.

『주영편』은 20세기에 들어와 새롭게 조명되었다. 위당 정인보 선생은 1931년 1월 <동아일보>의 ‘조선고서해제’의 하나로 이 책의 의의를 밝힌 글을 쓰기도 하였다. (...) 가학의 연원과 양명학에 기반을 둔 시각, 국고(國故)에 대한 전문적 연구, 훈민정음과 민생(民生)에 집중한 사유, 방만하지 않고 간결한 서술 태도, 모방을 꺼리고 자기본원(自己本原)에서 우러나온 학문 등으로 요약해 조선학의 핵심 저술로 평가하였다.

- 『주영편』(안대희 외 역, 2016, 휴머니스트, 27쪽)

위의 인용문에서 내가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바로 “모방을 꺼리고 자기본원(自己本原)에서 우러나오는 학문”이라는 표현인데 정동유의 독창적인 학문태도에 대한 정인보의 극찬을 번역자가 잘 포착하여 옮겨 해설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서경덕의 독창성에 대해 정동유가 찬탄의 글을 남겼다면, 이에 다시 되풀이하여 정동유의 독창성에 대해 정인보가 찬탄의 글을 남긴 사실이 더욱 강조되는 듯하다. 여기서 ‘자기본원(自己本原)’이라는 용어는 학문적 근거를 자기자신에 두고 어떤 모방도 불허하고 독자적으로 학문을 진척시킨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볼 수 있다. 자기가 뿌리가 되는 방식의 학문이라고나 할까.

결론적으로 곽청창의 글에 대한 ‘얻기 어려움’/‘매우 드묾’의 평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독자성/독창성의 테두리에서 이해해볼 수 있으며 서경덕과 정동유를 이어주는 자기본원의 학문적 시각에서 섬세하고 엄정하게 비평적 표현을 적시한 결과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설명이 좀 어려운 듯하지만, 다시 한 마디로 하자면 곽청창의 글이 어디서도 유례가 없는 매우 뛰어난 창의력을 보여준다고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전의현 관아가 있던 전의초등학교 교정. 1894년 동학농민혁명 때 전의동학군이 세성산전투에 참여하면서 이곳 전의관아를 습격, 무기를 탈취하여 세성산에 쌓아두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전의현 관아가 있던 전의초등학교 교정. 1894년 동학농민혁명 때 전의동학군이 세성산전투에 참여하면서 이곳 전의관아를 습격, 무기를 탈취하여 세성산에 쌓아두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저런 상념에 젖어들며 전의역 주변을 잠시 둘러보고서 황량한 겨울바람을 뒤로 한 채 짧은 산책을 마친 나는 또 되돌아나가는 701번 버스에 올라타고 다시 천안으로 향했다. 버스 안에서 나는 차창 밖에 흘러가는 풍경을 보며 괜스레 마음 속 궁상을 떨었다. 곽청창의 탁월함을 잘 알아보고 그 글을 애정깊게 수록한 『주영편』이라는 책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그 문학적 가치를 매우 높게 올려다볼 수 있었겠는가. 그렇지만 지금의 현실은 곽청창에 대한 무관심이 대세일 뿐인 것이 안타깝다. 하지만 이런 생각도 다시 들었다. 무관심이 있다면 또 어떠냐. 드물게 알아보고 드물게 챙겨가는 일도 또한 드물었기 때문에 의미가 있었던 게 아니냐. 드물기 때문에 놓칠 수 있었을 뻔했던 것을 이렇게 용케 마주치고 되새기고 의미깊게 생각하게 됐으니 그것만으로도 고귀한 경험이 되는 것 아니냐. 그래서 남들이 어떻게 하든 우선 먼저 내가 행복해 하면 그만 아니겠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전의에 다시 좀 찾아와서 이모저모를 살펴봐야지 하는 나의 다짐을 좌석에 꽁꽁 묶어둔 채로 버스는 덜컹거리며 쏜살같이 천안을 향해 달려갔다.

글 송길룡(천안역사문화연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