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진영의 그림책 이야기 - 그림책은 듣는 책
전진영의 그림책 이야기 - 그림책은 듣는 책
  • 천안아산신문
  • 승인 2024.01.31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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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세상에 태어나기 전, 엄마 뱃속에서부터 듣습니다. 언어의 하위 영역은 듣기, 말하기, 읽기, 쓰기입니다. 들으면서 언어를 시작합니다. 장애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 듣기는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듣고 싶어 합니다. 재밌는 이야기가 듣고 싶어 할머니나 엄마를 졸라본 적 있으시죠? 반대로 아이가 하염없이 읽어달라고 꺼내오는 책에 지쳐 버린 적도 있으실 겁니다. 우리 인간은 재밌는 이야기를 좋아하고 듣고 싶어 합니다. 이 듣기가 기본이 되어 말하기, 읽기, 쓰기로 이어집니다. 누구나 들을 수 있기에 듣기를 당연히 여깁니다. 독서의 시작은 듣기이며 듣기는 중요합니다.

이재복은 <아이들은 이야기밥을 먹는다>에서 아동문학은 ‘듣는 문학’이라고 강조합니다. 글을 깨우쳐서 읽는 문학의 시기에 들어왔어도 아이들 몸의 기운은 듣는 문학을 더욱 편하게 즐긴다고 합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면서 듣는 문학에 집중하는 모습을 자주 만났습니다. 글자를 익혔더라도 듣는 아이들은 온몸으로 이야기에 집중합니다. 듣는 문학을 경험하려면 누군가 읽어주어야 합니다. 읽어주기에 적당한 매체가 그림책입니다. 그림책보다 더 좋은 듣는 문학은 입말로 들려주는 옛날이야기이지요. 인간의 목소리를 들으며 듣는 이는 자기만의 이미지를 머릿속에 펼칩니다. 어쩌면 그림책의 그림이 우리의 상상력을 제한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한 편의 이야기를 외워서 들려주는 일이 만만치 않습니다. 분명히 콩쥐 팥쥐로 시작했는데 어느새 신데렐라가 되어있습니다. 다음 이야기가 뭐였는지도 가물가물합니다. 여러 이야기가 섞여 헷갈리기도 합니다. 이야기 한 편 외우기도 바쁜 세상 속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읽어주고 듣기에 알맞은 매체가 그림책입니다. 듣는 문학의 시기를 충분히 거칠수록 오랜 독서 생활의 밑거름이 됩니다.

『아이들은 이야기밥을 먹는다』 이재복 (지은이) / 문학동네
『아이들은 이야기밥을 먹는다』 이재복 (지은이) / 문학동네

글자를 아는 것이 권력이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이 권위가 아직 남아있습니다. 어른은 글자를 알고 아이는 글자를 모릅니다. 어른이 권위적인 이유입니다. 그림책에는 그림이 있습니다. 글자를 알든 모르든 그림으로 스토리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림을 읽으며 그림책의 스토리를 이해하는 행위는 어른과 아이를 평등하게 합니다. 오히려 글자를 아는 권위가 뇌를 굳어버리게 합니다. 어른은 그림 읽기가 편치 않습니다. 뇌가 말랑말랑한 아이들이 그림 읽기를 잘합니다. 저는 아이들이 숨은 이미지를 찾아내고 주어진 그림의 단서를 통해 다음 내용을 유추하는 모습에 감탄합니다. 듣기 능력을 한껏 발휘하면서 적극적이며 능동적인 독서가 가능한 매체가 그림책입니다.

아이가 부모가 읽어주는 그림책을 듣고 있습니다. 장소는 자동차 안이 될 수도 있고, 잔디밭 돗자리가 될 수도 있고, 잠자기 전 침대가 될 수도 있습니다. 장소는 가리지 않습니다. 그림책이 있고 듣는 사람이 있고 읽어주는 사람이 있으면 언제든지 그림책 읽어주기는 가능합니다. 장소를 살짝 이동해 보겠습니다. 학교 교실입니다. 수업 시간입니다. 교과서가 있고, 선생님이 있고, 학생이 있습니다. 선생님은 읽어주는 이, 학생은 듣는 이입니다. 책 읽어주는 환경과 수업 환경은 너무나 닮았습니다. 가정에서 부모님이 읽어주는 책을 자주 들은 아이는 수업 시간에 선생님의 말씀을 듣는 힘이 있습니다. 40분을 앉아있는 힘이 있습니다. 공부 잘하는 아이로 키우고 싶으시죠? 한글 떼기가 우선이 아닙니다. 덧셈, 뺄셈, 영어 단어 하나 더 맞추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초등 6년, 중고등 6년, 12년을 공부하려면 들어야 합니다. 교실에서 선생님의 목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인터넷 강의를 들어야 합니다. 공부하기의 첫 출발도 듣기입니다. 듣기의 힘을 아이 몸에 배양시켜 주어야 합니다. 앞으로 비대면 시대가 다시 오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듣기의 힘은 점점 더 중요합니다. 우리 아이의 듣기 힘을 키울 방법은 읽어주기입니다.

그책 읽어주는 아버지와 듣는 아들
그림책 읽어주는 아버지와 듣는 아들

듣는 문학은 평생 독서 능력을 좌우합니다. 듣는 환경에 알맞은 매체가 그림책입니다. 그림책 읽기는 능동적인 독자가 되도록 도와줍니다. 새 학년, 3월이 다가옵니다. 교실에서 중요한 능력은 선생님 눈을 바라보고 듣는 힘입니다. 그림책을 읽어주며 함께 보세요.

아이뿐만이 아닙니다. 요즘은 어른도 “그림책 읽는 걸 들었는데 너무 좋아요.”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그림책 테라피라는 말이 유행하는 이유입니다. 다른 치료는 필요 없습니다. 읽어주는 이와 듣는 이만 있으면 됩니다. 읽어주기 행위는 듣는 이를 살피며 듣는 이를 위해서 읽어주기에 상대방을 위하는 배려가 스며 있습니다. 듣는 이는 그림책의 스토리만 듣는 것이 아니라 읽어주는 이의 사랑도 느낍니다. 그림책은 읽어주는 이와 듣는 이의 관계 속에서 매력을 더욱 발휘합니다. 우리는 쫓기듯 바쁜 세상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림책을 읽는 인간의 목소리는 엄마 뱃속의 편안함을 느끼게 합니다. 든든한 울타리가 됩니다. 읽어주기 행위는 고귀합니다. 소리내어 읽어 주세요.

글 전진영 달님그림책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