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철학사산책10] 조선역사상 유일한 여제왕 창업자
[천안철학사산책10] 조선역사상 유일한 여제왕 창업자
  • 천안아산신문
  • 승인 2024.01.25 0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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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신채호가 1897년에 고향인 청주에서 목천으로 공부하러 다녀갔으니 지금처럼 버스 타고 다녔을 리는 무방하고 튼튼한 두 다리로 숱하게 걸어다녔을 것이다. 북면 오곡리 신기선 가옥에 와서 일만권의 장서가 있었다고 하는 고색창연한 서재에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면 어찌 금새 고향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겠는가. 며칠씩 묵어가면서 낮이고 밤이고 독서에 열중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당시에 신기선은 중앙의 높은 관리여서 자주 오곡리로 올 수 없었을테니 스승님을 가까이 모시고 회초리 맞아가며 암기연습하는 식의 서당식 공부는 절대로 아니었을 것이다. 신채호처럼 여기저기서 공부하러 온 비슷한 또래의 학동들이 있지 않았을까? 신기선 가족 중 누군가 훈장 역할을 하거나 규율을 잡아주는 정도의 학습 분위기는 있었음직하다.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사극드라마처럼 상상해볼 뿐 실상은 어떠했을지 전혀 알 수 없다.

폭설의 눈발 속에 서있는 독립기념관 광개토왕비 모형물. 신채호가 만주에서 저 비석을 보고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북면 오곡리에서 공부하던 신채호의 또다른 흔적을 생각하게 해주는 기념물이다.
폭설의 눈발 속에 서있는 독립기념관 광개토왕비 모형물. 신채호가 만주에서 저 비석을 보고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북면 오곡리에서 공부하던 신채호의 또다른 흔적을 생각하게 해주는 기념물이다.

오곡리에서 북쪽으로 북면천(병천천 상류)를 따라 거슬러올라가면 위례산이 나온다. 따지고 보면 북면천 또는 병천천은 위례산에서 발원한 하천이라 할 수 있다. 하여간 위례산은 정상에 위례산성을 얹어두고 있다. 이 위례산성은 보통 직산 위례성으로 불리웠고 백제의 첫 도읍지 위례성으로 오래도록 알려져왔다. 19세기 실학의 완성자 정약용이 그 사실을 부정할 때까지 움직일 수 없는 역사적 사실로 전해져왔다. 그렇다고 정약용의 직산 위례성 부정론이 엄밀한 과학적 고증에 의한 것이냐 하면 이것 역시 여전히 논쟁의 여지가 남아있기는 하다. 아무튼 정약용의 주장은 일제식민지 시기 이른바 식민주의 사학자들에 의해 전격적으로 채택되어 직산 위례성 부정론의 강조를 넘어서 1세기에서 3세기에 이르는 삼국시대 초기의 역사를 통째로 부정하는 데에 활용됐다. 삼국의 건국설화는 신화요 전설일 뿐 역사적 사실로 인정할 수 없고 게다가 삼국은 4세기에 가서나 국가 단계에 들어섰기 때문에 그 전의 이야기는 그저 이야기일 뿐이라는 게 요지였다.

그동안 잘 간직되어 전수되어 왔던 삼국시대 초기의 기억들을 식민사관에 의해 한순간에 부정당하고 강탈당해야 했던 기분은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후 1~3세기 삼국시대 부정론에 대한 극복의 문제가 해방 이후 역사학적·고고학적 노력이 집중되는 과제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부정론의 극복과정에서도 직산 위례성 부정론은 격파되지 못했다. 대체적으로 지금 학계에서는 백제 첫 도읍지는 서울 풍납토성 일대로 비정되고 있다. 그간 천안향토사 측면에서도 적지 않은 노력을 펴왔다. 위례산성 발굴조사를 여러 차례 이끌어냈지만 백제초도 직산설을 입증할 만한 결정적인 근거를 확보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저간의 사정은 이러하지만 나는 여전히 백제초도 직산설의 가능성을 지속적으로 살려보자는 입장이다. 고고학적인 자료가 미비하다고 해서 오랫동안 이어져온 전승기록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897년에 목천지역을 어슬렁거리던 청소년 신채호의 시선 속에도 1894년 동학농민혁명 세성산 전투가 있은 후 일제에 의한 동학군 탄압에 불태워진 복구정마을의 폐허는 분명 뚜렷이 각인되었을 것이다. 청주에서 목천으로 들어와 북면천을 옆에 끼고 오곡리로 향하려면 그 길목에 있는 복구정마을을 통과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3년도 채 못 지난 때이기도 했으니까. 동시에 청소년 신채호는 북쪽으로 좀 더 거슬러올라가면 그때까지 모두가 그렇게 알고 있었던 백제 첫 도읍지 위례성이 있다는 사실도 동네사람들에게서 전해들었을 것이다. 그때 자신이 나중에 민족의 고대사를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역사학자가 되리라고 짐작이나 했을까? 아무튼 신채호는 나중에 역사학자가 되어서 북면 오곡리에서의 학업생활을 기억하며 그 인연이 우연만은 아니었으리라는 생각을 했음직도 하다.

폭설에 잠긴 목천초등학교 교정. 이곳이 옛 목천현 관아터다. 18세기 『동사강목』의 안정복이 3년간 목천현감으로 부임해 직무를 수행하던 곳이다.
폭설에 잠긴 목천초등학교 교정. 이곳이 옛 목천현 관아터다. 18세기 『동사강목』의 안정복이 3년간 목천현감으로 부임해 직무를 수행하던 곳이다.

아무튼 신채호는 백제 건국의 역사를 소개하는 자리에서도 아주 특별한 이해를 보여줬다. 바로 소서노에 대한 이야기가 특히 그러하다.

소서노(召西努)가 재위 13년 만에 죽으니, 소서노는 말하자면 조선 역사상 유일한 여제왕(女帝王) 창업자(創業者)일 뿐만 아니라 또한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를 건설한 자이다.

- 『조선상고사』(신채호, 박기봉 역, 2006, 비봉출판사) 178쪽

고구려의 시조는 주몽, 백제의 시조는 온조. 이렇게 자동으로 암기하고 있는 고대사에 대해 신채호는 주몽의 부인이자 온조의 모친이었던 소서노를 당당하게 고구려와 백제의 건국주역으로 설정할 뿐 아니라 “조선 역사상 유일한 여제왕 창업자”라는 최고의 호칭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 부분을 내가 특히 각별하게 생각하는 것은 위례산성 아랫녁에 있는 돌무지들에 대해 지역사람들은 소서노의 무덤이라고 믿어온다는 사실 때문이다. 물론 고고학적인 측면에서 진짜 소서노의 무덤인지 아닌지 증명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오랜동안 전승설화를 간직해온 지역주민들의 이야기에 조금 진지하게 다가갈 수만 있다면 위례산성 아래 소서노의 무덤은 무한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귀중한 향토사 자원이 된다.

1910년 망국에 접어든 조선 역사의 끝자락에서 신채호는 망명을 결심하고 압록강을 넘어간다. 망국에 이르러서야 압록강 넘어 옛 고구려 땅을 답사하게 된 것도 퍽 아이러니한 일이기도 했을 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그때 신채호가 싸짊어간 보따리 속에 유일하게 책 한 권이 있었는데 그게 18세기 실학자이자 역사학자 안정복의 『동사강목』이었다고 한다. 『동사강목』은 단군조선에서부터 고려시대까지 정통론에 입각하여 실증적인 역사기술의 태도로 저술된 조선시대 최고의 역사서라 할 수 있다. 안정복이 목천현의 현감으로 부임해있는 3년이라는 시간 속에 최종적으로 『동사강목』의 원고가 정리, 완성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별로 없다. 이것도 참으로 천안이라는 지역이 특별히 가지는 기묘한 지리적 우연인지도 모르겠다. 안정복과 신채호를 이어주는 것은 고대사만이 아니라 목천현이라는 지역도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나는 신채호를 있게 한 옛 역사학자 안정복을 기념할 수 있는 나름의 행동을 하기로 마음먹고 몇 군데 사진을 담기로 하고 집을 나섰다. 그런데 1월23일 화요일 오후의 날씨는 완전 폭설이었다. 이거 정말 산책이 가능하기나 할까 싶었다. 원래는 연춘리에서 출발, 슬슬 걸어서 다녀오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결국 버스를 타고 다녀오기로 했다. 우선 목천읍 행정복지센터 버스정류장에서 내려서 휘날리는 눈발을 온몸으로 다 맞아가며 목천초등학교로 향했다. 목천초등학교는 옛 목천현 관아터다. 알고 보면 목천관아는 참으로 많은 굵직굵직한 역사적 사건의 현장이 된 파란만장한 장소다. 이인좌의 난 때는 반란군에 의해 점령된 곳이었고, 병인박해 때 이 일대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붙잡혀 끌려온 장소였고, 동학농민혁명 때는 동학군들이 급습하고 무기고를 털어 완전 무장해제된 관아였고, 관아에서 학교로 바뀐 식민지 시기의 3.1대혁명 때는 천안에서는 처음으로 만세운동이 벌어진 독립의지의 공간이었다. 정말로 깃들어 있는 이야기가 많은 곳인데 하도 세차게 내려치는 눈발 때문에 먼발치에서 사진 한 장 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안정복은 1776년 목천현감에 부임해 와서 1779년까지 직무를 수행했다. 특히 1779년에는 『대록지』라는 목천읍지를 저술한 일로도 지역사 측면에서 매우 뜻깊은 업적을 남겼다.

옛 목천현 백성들이 선정을 베푼 안정복을 위해 세운 안정복선정비. 독립기념관 제7전시관 아래쪽에 위치해있다.
옛 목천현 백성들이 선정을 베푼 안정복을 위해 세운 안정복선정비. 독립기념관 제7전시관 아래쪽에 위치해있다.

기왕 나왔으니 마저 독립기념관까지 다녀와야겠다는 굳은 의지를 가지고 나는 펑펑 내리는 눈보라를 뚫고 목천읍 행정복지센터 정류장에서 다시 시내버스를 탔다. 버스는 정말 설설 기어서 갔다. 이 큰 자동차도 녹지 않고 쌓이는 눈길 위에서 행여나 주루룩 미끄러질 것만 같아서 그 짧은 거리에도 좌불안석이었다. 독립기념관 정류장에 내려서 나는 두건을 푹 눌러쓰고 길바닥만 보고 앞으로 전진했다. 기온이 낮은 데다가 매서운 바람이 푹푹 치고 들어오니 피부로 느껴지는 추위는 훨씬 더 강렬했다. 아 만주벌판에서 독립운동하던 선조들의 겨울나기를 생각하며 내심 버텨야 한다, 꼭 이겨내야 한다, 반드시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 이런 군소리들을 되뇌이면서 마음을 다독였다. 그런데도 이거 참! 이렇게 고생고생하며 독립기념관 답사를 할 필요가 있었나 하며 후회가 막심했다. 하지만 어쩌랴. 하필이면 넓고넓은 본관 앞 광장의 북풍한설을 죄다 받아들이면서 온몸은 고드름처럼 얼어붙은 채로 겨우 이 폭설 속 답사의 최종 목표점에 도달하고야 말았다. 본관과 제7전시관 사이에 다소곳이 서있는 비석, 바로 안정복선정비 앞에서 나는 기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평소에 아무렇게나 찾아올 수 있었던 안정복선정비를 이렇게도 어렵게 악천후를 뚫고 찾아오기는 처음이었다. 감개무량했다.

천안은 역사의 도시이며 동시에 역사학의 도시인 것이 맞다. 역사학자로 이름난 안정복과 신채호의 유적이 남아있다는 것만으로도 극강의 역사학 성지라 할 만하다. 하지만 이를 가슴벅차게 받아들이는 가슴이 없다면 그 누가 그 위대한 의미를 되새길 수 있겠는가. 다른 지역에서는 소설 속 가상인물도 지역의 상징으로 삼아 문화콘텐츠를 풍성히 만드는 마당에 천안에서는 이미 있는 역사학자의 흔적들도 별로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 같다. 역사유적이 너무 많아서 눈길이 안 가는 것일까? 그래도 나는 역사에 애정 깊은 천안시민의 본심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유난히 폭설 속의 답사 때문이었는지 나는 안정복의 유적에 대한 감회가 더욱 크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고대사를 빙빙 돌아 이제 다시 18세기로 돌아왔다. 곽청창이 열어젖힌 18세기 천안의 지역사로 다시 접어든 것이다. 이번에는 또다른 방향을 가늠해보며 열심히 18세기 천안을 다시 둘러봐야겠다.

글 송길룡(천안역사문화연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