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철학사산책09] 개방성 원리의 저항과 독립철학
[천안철학사산책09] 개방성 원리의 저항과 독립철학
  • 천안아산신문
  • 승인 2024.01.17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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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면 연춘리 버스정류장에서 북면의 종점인 곡대 방향으로 가는 버스가 언제 오나 전자안내판을 쳐다보니 25분을 기다리면 된다고 나왔다. 다른 때 같으면 25분의 시간은 엄청 지루하고 의미없는 시간처럼 느꼈겠지만 1시간도 아니고 40분도 아니고 딱 25분만 기다리면 383번 버스를 타고 북면의 북쪽으로 갈 수 있다고 생각하니 거의 횡재한 것처럼 느껴졌다. 예전에 한 번 북면행정복지센터까지 북면천(병천천 상류)을 거슬러 올라가며 걸어가 본 적이 있다. 장장 2시간 30분이 걸렸다. 그것도 여유있게 걸은 것도 아니고 종종걸음으로. 그러니까 그런 먼 거리는 버스가 자주 안 다녀서 불평이 생기더라도 일단 늘펀히 기다렸다가 버스를 타고 가는 것이 낫다. 1시간 기다렸다 타도 걷는 것보다는 훨씬 빠르게 도착하니까.

북면행정복지센터 직전 정류장인 북면농협에서 내리니 연춘리에서 딱 10분 걸려 도착했다. 좌석에 엉덩이를 대자마자 일어나야 하는 순간에 이렇게 금방 당도하면 좀 허무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하여간 여러 차례 와봤던 길이기 때문에 익숙하게 위례초등학교 교정을 옆으로 돌아 마을 안길로 접어들었다. 위례초등학교는 북면의 북쪽 끝에 있는 산의 이름이 위례산이기 때문에 붙여진 학교명이다. 기왕이면 북면도 ‘위례면’이라고 바꾸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 지금은 방학기간이니까 당연히 학교는 조용했다. 요즘엔 초등학생들도 역사공부를 많이 하는지 역사퀴즈에 척척 대답하는 학생들도 많다. 예전에 어느 초등학생 역사답사 시간에 내가 인솔하고 안내하던 중에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라는 말을 누가 했는지 질문하자 참가자 20명 중에 10명이 큰소리로 “신채호!!” 이렇게 대답해서 깜짝 놀랬었다.

북면 오곡리로 들어가는 초입에 있는 위례초등학교
북면 오곡리로 들어가는 초입에 있는 위례초등학교

만약에 운동장에 아이들이 왁자지껄 놀고 있었다면 나는 뭔가 중요한 걸 알려주는 사람처럼 다가가 그 아이들을 모아놓고 그렇게 물어보았을 것이다. “신채호!!” 이 이름이 우렁차게 외쳐지는 것을 듣고서 나는 이어서 이렇게 물어보았을 것이다. “그러면 너희들이 살고 있고 공부하고 있는 이곳 오곡리 마을에서 옛날에 신채호 선생님이 공부했다는 것을 알고 있니?” 과연 알고 있는 아이들은 얼마나 될까? 분명히 몇몇 아이들은 알고 있었다고 대답할 것이다.

1897년 신채호는 18세가 되어 천안에 있는 신기선을 찾아간다. 신기선 가옥 터의 현재 주소는 ‘충남 천안시 동남구 북면 오곡4길 35’이고, 이전 주소는 ‘충남 천안시 동남구 북면 오곡리 203번지’다. (...) 신채호는 이 집에서 신기선에게 학문을 배우면서 방대한 동서양 서적을 탐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단재기행』(김하돈, 2015, 단재문화예술제전추진위원회) 54~55쪽.

오곡리 마을에 장서가 1만권이나 되는 학자 신기선의 본가가 있었다. 신채호의 할아버지가 자신의 학연을 따라 소개를 해서 신채호는 청주 고향마을에서 이곳 천안 오곡리까지 배움을 얻으러 다녀갔다. 그리고 그후 얼마 안 있어 신기선의 주선으로 신채호는 서울로 올라가 당시 최고교육기관인 성균관에 입학하게 된다. 그리고 나중에 우수한 성적으로 박사가 되어 졸업하고서는 곧바로 매섭고 무게있는 필봉을 휘두르며 종횡무진 언론계에서 최고의 논객으로 활약하게 된다.

역사적으로 너무나 유명한 사람의 이름을 들으면 우선적으로는 내가 살고 있는 지역과 무관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다가 그 유명한 사람이 나의 지역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너무나 낯설면서도 신기하게 여겨진다. 다소 얼떨떨한 느낌도 들게 마련이다. 그리고 조금 있으면 점점 흥분하기 시작한다. 그러고 보니 이런 걸 어떻게 아느냐고 누군가 나에게 물어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나는 지역사를 공부하고 지역의 역사인물들을 찾아보면서 그런 경우들을 직접 느껴보기도 했고 주변사람들이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을 많이 겪어보기도 했다. 왜 이제야 이것을 알게 되었지 하며 감탄하는 게 대부분의 반응이다. 그런 만큼 지역의 역사와 인물은 너무나 감춰지고 관심받지 못한 채 묻혀져 왔다.

그런데 오곡리 마을 안길로 접어들어 걸어가면서 예전에는 보지 못했던 거대한 기둥들을 보게 됐다. 아~ 이것이 말로만 듣던 세종포천고속도로구나! 공사를 한다는 소식은 들었었지만 실제로 현장을 이렇게 들어와서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동안 내가 오히려 가까운 북면을 소홀히 하고 있었나 보다 하고 자책했다. 이 고속도로가 생기게 되면서 북면에는 벌써 두 군데나 골프장이 들어서게 됐고 그걸 반대하는 주민들의 목소리도 높아졌다고 한다. 좀 착잡한 마음이다. 어쨌든 기둥들이 열지어 서있는 공사현장을 지나 한참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내가 찾아가고자 하는 신기선 가옥 터가 있는 오곡2리 오동마을이 나온다. 오동마을 안에서 산쪽으로 걸어올라가면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뵈는 햇살 좋은 언덕으로 이어지는데 바로 이곳이 신채호 선생이 어린 시절 멀리서부터 찾아와 공부하던 곳이다. 물론 터만 남은 곳이다.

오곡리를 관통하며 건설되고 있는 세종포천고속도로
오곡리를 관통하며 건설되고 있는 세종포천고속도로

이쯤에서 걷던 걸음 멈추고 역사공부를 약간 해보자. 김부식의『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24년의 기사를 보면 아래와 같다.

24년 가을 7월에 왕이 웅천책(熊川柵)을 세우자 마한 왕이 사신을 보내 질책하기를 “왕이 처음 강을 건너왔을 때 발디딜 곳조차 없어 내가 동북쪽 1백리의 땅을 베어 안주하게 했으니, 왕을 대우함이 후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 보답할 것을 생각해야 할 것인데 이제 나라가 완정(完整)되고 백성이 모여들자 ‘나와 대적할 자가 없다’고 생각해 대거 성과 못을 설치해서 우리 강역을 침범하니, 이 어찌 의리라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왕이 부끄럽게 여기고 그 목책을 헐었다.

-『삼국사기』(이강래 역, 1998, 한길사) II권 490~491쪽.

먼젓번 글에서 마한의 포용과 인도주의를 이야기했는데, 여기서도 역시 온조왕의 초창기 이주민들에게 마한은 기탄없는 도움을 주었다는 기사를 읽게 된다. 그런데 어느 정도 안정을 찾고 성장을 하게 되자 온조왕이 마한 왕의 영역에까지 침범해 들어와 목책을 쌓았고 이에 따라 마한 왕이 질책을 했다는 내용이다. 물론 이러한 질책을 받은 온조왕은 마한과의 의리를 저버린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곧바로 목책을 철거했다. 이 기사를 읽으면 그동안 마한이 피난민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하는 포용정책을 일관되게 시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온조왕의 경우와 같이 세상이 뭔가 많이 변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마한의 개방성은 오히려 가치관이 달라진 새로운 세력에게는 영역침범의 빌미가 될 뿐이라는 것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온조왕은 마한 왕과의 관계를 위해 목책을 허물었지만 불과 2년 뒤에는 세력이 약화된 마한을 도리어 습격해서 아예 병합해버리고 만다. (아 이렇게 배은망덕할 수가!!) 그러니까 위의 기사는 그나마 마한의 개방성이 도의적 반성을 가져오던 마지막 시기에 도달했음을 알려주는 기사이기도 한 것이다. 점점 더 개방성이 효력을 상실해가던 시기에 거의 마지막에 도달한 개방성의 저항을 나타내던 기사로 해석해볼 수 있다. 이윽고 마한의 멸망은 동시에 포용과 인도주의를 가능케 했던 개방성의 소멸을 가져오고 말았다. 마한 목지국이라는 이상향은 백제라는 새로운 가치관의 성장에 밀려 아주 약한 저항의 흔적만 남기고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 것이다.

오곡리 마을을 관통하여 건설되는 세종포천고속도로는 국토균형발전라는 대의를 위해 양보된 땅 위에 그 자리를 척척 차지해가지만, 갈수록 도리어 점점 마을의 형태를 바꾸고 환경을 더욱 열악하게 만들어가고 있는 것만 같다. 마한이 백제에 밀려 사라졌듯이 마을의 선한 의지도 고속도로의 강제력에 밀려 사라지게 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개방성의 저항은 결국 소용없는 것일까?

청소년 신채호가 찾아와 공부했던 신기선 가옥 터. 왼편 배경으로는 세종포천고속도로 공사를 하며 산자락을 다 잘라낸 풍경이 보인다
청소년 신채호가 찾아와 공부했던 신기선 가옥 터. 왼편 배경으로는 세종포천고속도로 공사를 하며 산자락을 다 잘라낸 풍경이 보인다

기왕에 신채호라는 이름을 거들먹댔으니 한 가지만 더 공부해보자. 신채호는 <조선상고사>(1931)의 첫머리에서 “역사(歷史)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의 기록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이 명제를 풀어 설명하는 과정에서 아래와 같은 역사의 냉엄한 현실을 표현했다.

「비아(非我)」를 정복하여 「아(我)」를 드러내면 투쟁의 승리자가 되어 미래 역사에서 그 생명을 이어가고, 「아(我)」를 소멸시켜 「비아(非我)」에 공헌하는 자는 투쟁의 패망자(敗亡者)가 되어 역사에 그 흔적만 남기는데, 이는 고금(古今)의 역사에서 바뀔 수 없는 원칙이다.

- 『조선상고사』(박기봉 역, 2006, 비봉출판사) 26쪽

내가 다른 이에게 굴복당하지 않고 온전히 살아갈 때 그것을 ‘독립’이라고 한다면, 나를 나로서 유지하고자 하는 굳센 생각들이 바로 ‘독립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소멸된다면 나의 역사도 무의미한 것이 된다. 꿋꿋하게 살아남는 것만이 나의 ‘독립’을 잃지 않는 것이요, 나의 역사를 이어가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마한의 개방성은 마한의 멸망과 함께 사라져버린 것이 되는 걸까? 마한 목지국이 보여주었던 포용과 인도주의는 무의미하게 소멸된 것일까? 어찌하여 훌륭한 도덕과 가치관은 지속되지 못하고 무참하게 중단되는 것일까? 다시 되살릴 수는 없는 걸까? 마한의 부활은 정말로 불가능한 것일까? 목지국은 그저 역사의 흔적으로밖에 더이상 존재감을 보여줄 수 없는 것일까? 신채호의 승자·패자에 얽힌 냉엄한 역사 원칙을 수정할 수 있는 방법은 과연 완전 봉쇄된 것일까? 확실한 대답을 찾을 수 없는 이런저런 질문들이 나의 머릿속을 어지럽게 가득 채우고 있다. 그러고 보니 곽청창의 저 눈물겨운 질문이 생각난다. 왜 선행을 실천해도 행복은 돌아오지 않는가 하는 그 질문 말이다. 이 질문으로 철학은 시작하게 된 것이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정말로 어려운 질문의 장벽에 도달한 듯하다. 어쨌든 다음의 산책에서 더 질문을 이어가 보도록 해보자.

글 송길룡(천안역사문화연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