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철학사산책08] 난민들에게 안식처를 내주던 이상향
[천안철학사산책08] 난민들에게 안식처를 내주던 이상향
  • 천안아산신문
  • 승인 2024.01.10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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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왕에 마한 소도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으니 마저 소도의 역사적 의미까지 설명해둬야 할 듯하다. 아닌 게 아니라 벌써 나는 이리저리 소도에 관한 학술자료를 찾아서 두루두루 헤매다녔다. 그런데 내가 원하는 만큼 그런 역사적 의미를 딱 알맞게 적시해주는 관련 학술자료를 찾는 것은 의외로 수월하지 않았다. 내가 처음부터 한국고대사 전공자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고고학에 애초부터 관심이 많았던 것도 아니고 더욱이 고대종교에 대해서는 문외한인 일반시민이자 명함을 내밀어봐야 지역향토사 연구자 정도인데 갑자기 소도가 중요해졌다고 짜잔 하고 귀중한 자료가 곧바로 나타나줄 리는 만무한 일이 아니던가. 그래도 어지간히 헛걸음을 한 끝에 지금까지 중에서 가장 그럴 듯한 설명을 발견할 수는 있었다.

자료를 찾아낸다고 찾아낸 것이 일단 1995년도에 출간된 『삼한의 사회와 문화』(한국고대사연구회 편, 신서원)라는 논문집인데 이 안에 송화섭 필자가 쓴 「삼한사회의 종교의례」라는 논문이 아주 유용한 정보를 제공해주었다. 이 논문의 결론 부분쯤 되는 곳에서 인용문을 하나 끌어와본다.

소도는 불교수용 이전까지 東夷三韓(동이삼한)의 종교를 대표하였으나 삼국의 건국주체들이 수용한 중국의 종묘제도가 제사체계로 정착·대체되면서 민간신앙으로 전락해간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삼한시대의 소도는 農耕儀禮型(농경의례형) 祭天儀式(제천의식)이었으며, 동이제족들에 널리 확산된 공통된 고대종교였다고 판단된다. 제천의식과 천신숭배가 민족종교의 뿌리였음은 건국신화가 입증해주고 있으며 신채호가 주장하는 ‘수두’論(론)의 근원이기도 하다.

-『삼한의 사회와 문화』(90쪽)

위의 논문을 보면, 일단 소도는 삼국시대로 접어들기 전에는 동이족에 보편적인 고대종교였다는 점을 강조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중국의 종묘제도가 도입되기 전에는 동이족의 주류종교였으므로 사실상 동이족의 고유종교였다고 평가하는 것도 알 수 있다. 아울러 소도가 제천의식을 나타낸 것인 만큼 동이족의 시원에서부터 미래에 이르기까지 통틀어 민족종교의 뿌리가 되었음을 선언하고 있다는 것도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한국고대사에 애정이 있는 사람이라면 소도에 대해 기대를 품어볼 수 있는 온갖 역사적 의미를 다 가져다 붙여준 것만 같다. 물론 여기에 대해서도 학술적 반론이 있을 수 있고 합리적 의심도 나올 수 있다고 본다. 하여간 학술적 차원에서 소도에 대한 역사적 평가의 일면이 어느 정도까지 가있는지 간략하나마 확인해본 것으로 치자.

하지만 나의 관점에서는 소도에 대한 역사적 의미를 어지간히 파악하는 기본적인 관심 위에서 어떻게 소도에 대해 철학적인 성찰을 해볼 수 있을지 하는 데에 주안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지난번 글에서 소도가 가진 특별한 포용력을 주목한 바 있다. 그렇다면 학술적 측면과는 정반대의 방향에서 이러한 소도의 포용력을 아이들에게 어떻게 알려줄 수 있을까 하는 뜬금없는 생각도 든다.

이이화의 『만화 한국사 이야기』에 표현된 소도 부분. 만화의 장점은 아무래도 글자로만은 알 수 없는 시각적인 형태를 상상해서 즐길 수 있게 하는 데에 있는 듯하다. 천안철학사도 만화로 만들 수 있다면 좋겠다.
이이화의 『만화 한국사 이야기』에 표현된 소도 부분. 만화의 장점은 아무래도 글자로만은 알 수 없는 시각적인 형태를 상상해서 즐길 수 있게 하는 데에 있는 듯하다. 천안철학사도 만화로 만들 수 있다면 좋겠다.

한국 역사를 통틀어 특히 현대에 들어와서 한 사람의 역사가가 거대한 규모의 한국통사를 일관된 사관으로 집대성한 거의 유일한 사례로 드는 것이 이이화의 『한국사 이야기』(전22권, 1998-2004, 한길사)다. 그런데 저자인 이이화는 그 위업에 결코 자족하며 머물지 않았다. 그 내용을 토대로 하여 아이들을 위한 만화책 『만화 한국사 이야기』(원작 이이화, 구성 김형호, 그림 원병조, 전7권, 2001-2004, 삼성출판사)를 펴냈다. 그래서 이 책들이 아이들에게서 폭발적으로 인기를 얻어내면서 저자 이이화는 일약 ‘역사할아버지’라는 애칭도 얻게 되었던 것이다.

『만화 한국사 이야기』에서는 소도에 대한 개략적인 소개와 함께 그 특유의 포용력을 이렇게 표현했다. 죄지은 사람이 소도를 찾아오면 쫓아내지 않고 받아들이되 잘못을 뉘우치고 고칠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이다. 어떤 도망자라도 품어주고 되돌려보내지 않았다는 중국 역사서의 내용에서 조금 더 상상력을 가한 풀이라고 할 수 있겠다. 타임머신을 타고 그때로 돌아가서 눈으로 확인하지 않는 한 정말로 도망자에게 반성까지 하게 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니까. 그래도 그 만화를 보는 아이들에게는 도덕적인 의미를 가미하면서 흥미를 돋우는, 친절한 설명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만화라는 것이 너무 학술적인 내용 전달에만 치중한다면 너무나 재미가 없어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아예 아이들이 그 만화를 쳐다보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한편으로 천안의 역사도 재미있는 만화책으로 만든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소망도 생긴다.

마한 소도 이야기를 해가는 마당에 역시 ‘목지국(目支國)’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결론을 미리 앞당겨 말하자면, 마한의 맹주 역할을 하며 삼한 전체를 통괄한 수장 역할의 소국이 목지국인데, 그 목지국이 바로 천안이다 이 말씀이다. 아주아주 흥미롭게도 목지국을 천안지역으로 비정한 첫 역사학자는 역사학계에서는 매우매우 유명한 이병도라는 학자다. 왜 유명하냐면 특히 민족주의 입장에서는 이병도에 대해 식민지시기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에서 활동하는 등 일제식민사관의 역사편찬사업에 협력한 이력을 가진, 대표적인 식민사학자로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할 말이 제법 많지만은 여기서는 다음을 위해 아껴두도록 하자. 아무튼 그는 그의 책 『한국고대사연구』(1976, 박영사)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속히 말하면, 稷山舊邑(직산구읍)의 北(북)쪽인 安城川流域(안성천유역)은 「辰國(진국)」時代(시대) 내지 그 正統(정통)인 馬韓時代(마한시대)를 통하여 目支國(목지국)의 心臟部(심장부)(政治的 中心地(정치적 중심지))를 이루고 있던 곳이 아닌가. - 『한국고대사연구』(247-248쪽)

천안의 서북구 지역에 있는 직산구역을 이병도는 마한시대의 목지국으로 비정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마한시대의 직전 시대라 할 수 있는 진국(辰國)시대에도 역시 직산구역이 정치적 중심지로 있었다는 주장인 것이다. 그 당시 아직 고고학적인 근거가 희박하기는 했지만 주변 지리적 환경과 지명 등에 대한 고찰로 이르게 된 결론이었다.

물론 목지국에 대해 여러 학자들이 천안 이외의 다른 지역을 비정하는 견해를 나타내기는 했으나 최근 들어 고고학적인 자료들이 축적되면서 특히 청당동 유적을 중심으로 천안지역이 목지국으로 재차 유력하게 제시되고 있는 상황이기도 하다. 아마도 다른 지역에서 마한 유적이 대대적으로 발굴되지 않는 한은 천안지역 목지국 비정은 거의 부정될 수 없는 정설로 인정될 것 같다.

천안지역을 마한의 정치적 중심지인 목지국으로 비정하는 주장이 거의 확정적이라고 한다면 여기서 내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천안의 고대사 측면의 정체성이다. 이 측면에서 다시 중국 고대 역사서인 『삼국지』를 찾아보지 아니할 수가 없는 것이다.

진한은 마한 동쪽에 있다. 그 나라의 기로들이 대대로 전하는 말에 의하면 그들은 옛날에 진(秦, 서기전 221~서기전 206)나라의 노역을 피해 한국으로 망명한 사람들인데, 마한이 동쪽 변방 영토를 나누어 주며 살도록 해주었다고 한다.

- 『고조선과 동이』(김호숙·마석한, 2022, 한국학술정보, 64쪽)

위 인용문은 진시황에 의해 통일된 중국에서 그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통치방식에 고통을 느낀 난민들이 그 영토 바깥으로 탈출해 피난처를 찾아 한반도로 왔고, 이윽고 마한에서는 이들을 어여삐 여겨 마한 동쪽인 진한 지역에다가 안식처를 마련해주었다는 기사의 일부다. 나는 이 대목에서 바로 이것이다 하는 마음으로 무릎을 치고 말았다. 마한에서 난민에게 땅을 내주었다면 삼한을 모두 통괄하는 목지국에서 승낙을 해주었다는 뜻이다. 목지국이 어려움을 호소하는 난민들을 위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곳을 지정해주었다는 것은 대단히 인도주의적인 처사라 아니할 수 없다. 바로 이와 같은 점이 천안의 고대사 측면의 정체성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이다.

서울 용산구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찾아본 마한 섹션 전시물. 이 전시공간에는 오직 천안 청당동 유적에서 나온 마한시대 유물만을 보여주고 있다. 청당동 유적이 마한의 대표유적이라는 뜻일 것이다.
서울 용산구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찾아본 마한 섹션 전시물. 이 전시공간에는 오직 천안 청당동 유적에서 나온 마한시대 유물만을 보여주고 있다. 청당동 유적이 마한의 대표유적이라는 뜻일 것이다.

마한의 소도가 포용력의 현장이었다고 한다면, 마한의 심장부이자 삼한의 정치적 중심지인 목지국은 난민들에 대한 인도주의적인 정책을 실현한 평화 공동체였다고 할 수 있다. 짧게 정리한다면, 목지국은 난민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해주던 그야말로 이상향이었다는 것이다. 천안철학사를 탐구하면서 저멀리 원삼국시대로 거슬러올라가 목지국의 인도주의적 모습을 살펴본다는 것도 매우 의미깊은 일이지만 더욱이 그 사실을 통해 목지국의 존재를 천안철학의 고대사 원천으로 간주하는 동시에 천안지역에 대한 자부심을 느낄 수 있으니 내가 얼마나 감격했는지는 쉽게 짐작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한편 내가 이러다 너무 고대사에 빠지게 되는 건 아닌지 조금 걱정스럽기는 하다.

아무튼 마한 목지국을 상상할 수 있게 해주는 청당동 유적을 더욱 귀중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문헌고증으로 파악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설득력을 잘 갖추고 있는 고고학적인 증거로서 청당동 유적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시간적 여유가 생긴 잠깐의 순간에 휘리릭 서울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아갔다. 거기서 마한 전시공간에 마련된 청당동 유물들을 보면서 마음 깊이 어떤 감동을 느끼고 있었다. 마한의 대표유적으로 제시된 청당동 유적! 목지국의 인도주의를 고대사 정체성으로 가지고 있는 천안! 이렇게 자랑스러운 역사를 가지고 있는 천안의 철학을 어떻게 잘 알려드릴 수 있을까? 점점 더 흥미를 더해가고는 있지만 동시에 나의 고민도 점점 더 깊어져만 가고 있다.

글 송길룡 (천안역사문화연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