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철학사산책06] 역사의 소용돌이를 바라보는 두 가지 관점
[천안철학사산책06] 역사의 소용돌이를 바라보는 두 가지 관점
  • 천안아산신문
  • 승인 2024.01.01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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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8년에 일어난 이른바 ‘이인좌의 난’ 혹은 ‘무신혁명(戊申革命)’에 대해서는 사건 지칭어를 하나로 정할 필요가 있겠다. 항상 그 두 지칭어를 동시에 표시하는 것은 번거로운 일이기 때문이다. 진압군의 입장에서는 ‘이인좌의 난’이 지칭어가 될 것이고, 반란군의 입장에서는 ‘무신혁명’이 지칭어가 될 것이다. 중립적인 지칭어는 불가능할까? 아직은 적절한 제3의 지칭어가 떠오르지는 않는다. 당장은 편의적인 선택으로 정할 수밖에.

일단 내가 애독하는 역사서 중 하나인 이이화의 『한국사 이야기』(전22권, 1998-2004, 한길사)에서 제시된 것을 선택하기로 한다. 『한국사 이야기』는 글머리에 역사기술에 있어 민족사, 민중사, 생활사를 중심방향으로 삼는다고 되어 있다. 역사적 사건을 지칭하는 데에 있어서도 그와 같은 중심방향에 따라 재검토된 지칭어가 제시되곤 한다. 그러니까 종전의 역사적 사건 지칭어가 아무 반성 없이 그대로 쓰여진 것이 아니라 저자에 의해 일정한 기준에 따라 그대로 재사용되거나 다른 지칭어로 변경되어 사용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 난은 조직을 이룬 봉기군이 병기를 들고 일정한 지역을 차지해 병사와 수령을 임명하는 등 통치행위를 하였다는 점에서 볼 때 내전이라 할 수 있다. 1624년 이괄의 봉기 이후 100여 년 만에 일어난 내전이다. 이 난이 무신년에 일어났기 때문에 ‘무신란’이라고 하며, ‘이인좌의 난’이라고도 한다. - 『한국사 이야기』(14권 45쪽)

저자인 이이화는 ‘내란’이라는 특징을 들어 ‘무신란’과 ‘이인좌의 난’을 지칭어로 제시하고 있는데 위의 인용문이 들어있는 본문의 소제목이 ‘이인좌의 난’이기 때문에 이 글에서도 ‘이인좌의 난’이라는 지칭어를 사용하기로 한다. 이제부터는 따옴표를 떼어버리고 그대로 이인좌의 난이라고 표시한다.

세성산 앞에서 본 흑성산 일대. 흑성산 아래 독립기념관도 있고 옛 목천현 관아 터도 있다. 이인좌의 난 때 목천현은 반란군 호응세력에 의해 일시 해방구가 됐다. 아래 하천은 산방천이다.
세성산 앞에서 본 흑성산 일대. 흑성산 아래 독립기념관도 있고 옛 목천현 관아 터도 있다. 이인좌의 난 때 목천현은 반란군 호응세력에 의해 일시 해방구가 됐다. 아래 하천은 산방천이다.

이인좌의 난은 1728년 이인좌가 지휘하는 반란군이 청주성을 점령하면서 곧바로 인근지역에 파란을 불러일으켰다. 이 점령소식에 가장 먼저 반응한 곳은 청주의 서북쪽에 붙어있는 목천이었다. 목천현감이 지레 겁을 먹고 훌쩍 도망가버리고 별다른 저항 없이 목천현은 반란군 호응세력에 의해 해방구가 됐다.

자신을 혁명군으로 주장하는 반란군 입장에서 쓰여진 소설 『이인좌의 봄』(안휘, 2019, 인문서원)에서는 당시 목천현의 상황을 한 대목으로 다뤄주고 있다. 이 소설에서 목천현을 어떻게 그려주고 있는지 살펴보자.

은석산(銀石山)으로 오르는 계곡 중턱에 자리 잡은 도동서원(道東書院)은 예상보다 크고 넓었다.(...) 남명(曺植 조식)과 퇴계(李滉 이황) 선생의 제자인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을 제향한 사액서원인 도동서원은 남인 세력의 거점이다. 이인좌는 사림의 중심지인 목천현(木川縣)에 기대를 걸고 공을 들여왔다. 거사를 위해서는 매우 소중한 지역이었다. 호서군이 청주성을 장악하고 나면 곧바로 힘을 합쳐야 할 곳이기도 했다. - 『이인좌의 봄』(102-103쪽)

목천현을 ‘거사를 위해서는 매우 소중한 지역’이라고 소개하고 있지만 아쉽게도 이 소설에서는 그런 정도의 표현 외에는 목천현을 주무대로 한 이렇다 할 극적 내용을 전개하지는 않는다. 인용문 속에 제시되고 있는 은석산이라든지 도동서원이라든지 이런 지명들에 대해서는 관련된 별도의 이야깃거리가 많으니 나중에 기회가 되는 대로 풀어놓기로 한다.

역사는 승리한 자의 것이라 했던가? 반란에 성공하지 못하고 무참히 진압되고 만 봉기군의 입장에서는 아무리 세상을 위한 정의로운 의지가 있었다 하더라도 진압군에 의해 완전히 묵살되어 버리고 만다. 현재 남아있는 이인좌의 난 관련 사료들은 대부분 진압군 참여자가 자신들의 공적을 자랑하기 위해 진압군 관점으로 서술해놓은 자료들 뿐이다. 반란군의 관점을 잘 드러내주는 사료를 얻기란 모래밭에서 바늘 찾기와 같다. 그러니 그 입장을 옹호해주자면 소설의 형태를 꾸밀 수밖에 없다. 비교적 최근에 나온 소설『이인좌의 봄』이 바로 그런 취지를 담아내고 있다.

그렇다면 당시 목천현에서 진압군과 같은 편에서 참여했던 입장에서는 어떤 기억들을 남겨놓았을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를 명확하게 알아볼 수 있는 책이 있다. 1994년 천안문화원이 발행한 『천안향토사』가 그것이다. 이 책의 편집후기를 보면 2천년 천안의 역사를 담느라 10여년의 노력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거의 1200쪽에 달하는 두툼한 향토지의 위용을 보여준다. 아래 인용문을 보면 사건기록의 관점이 어떤지 분명하게 읽어낼 수 있다.

영조 4년(1728)에 이인좌(李麟佐)가 청주(淸州)에서 거병하여 서울을 침공하는 길목에서 우리고장 선비들이 충성심으로 궐기하여 찬연한 충절의 기록을 남기었다.(...)

목천현에는 안후기(安厚基)가 군사를 이끌고 서울로 가는 도중에 침입하여 왔다. 안후기는 이인좌 등에 의하여 방어사(防禦使)에 임명된 위방어사(僞防禦使)이다. 이때 목천현의 선비 윤이관(尹以寬) 이기현(李箕賢) 윤이오(尹以五) 윤병(尹柄) 윤거(尹距) 김태래(金太來) 이진하(李振夏) 윤두(尹枓) 이명제(李命濟) 최창조(崔昌祚) 김태두(金泰斗) 이기봉(李耆鳳) 이명유(李命裕) 윤이천(尹以天) 이광하(李光夏) 등이 궐기하여 후기를 사로잡아 목을 베어 나라에 바치니 조정에서 가상히 여겨 원종훈을 내리었다. - 『천안향토사』(142-143쪽)

위의 인용문에서 보듯이 진압군의 관점에서는 반란군의 인명은 안후기라는 인물 하나로 소략해서 나타나고 대신에 진압군의 인명은 무려 16명에 달하는 참여자가 일일이 열거되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고 본다. 이후 목천현의 분위기는 아주 쉽게 상상해볼 수 있다. 반란군을 지지했던 마을사람들은 다른 곳으로 떠났거나 떠나지 않더라도 조용히 침묵하며 지냈을 것이다. 반면에 진압군에 참여한 마을사람들은 당당하게 목천현을 지켜낸 주인이라는 존재감을 뽐내며 주류세력으로 자리잡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1728년 이래 목천현은 진압군의 기득권이 강하게 뿌리내린 지역으로 이어져 왔을 것임은 분명하다. 그렇게 짧은 순간에 목천현은 서로 별개의 세상으로 뒤집혔다가 이윽고 다시 또다른 세상으로 뒤집혔던 것이다.

세상산 앞에서 본 은석산 일대. 은석산 정상부 아래에 암행어사 박문수 묘가 있다. 이인좌의 난 때 박문수는 진압군인 순무영의 종사관으로 활약했다. 아래 하천은 북면천(병천천 상류)이다.
세상산 앞에서 본 은석산 일대. 은석산 정상부 아래에 암행어사 박문수 묘가 있다. 이인좌의 난 때 박문수는 진압군인 순무영의 종사관으로 활약했다. 아래 하천은 북면천(병천천 상류)이다.

기왕에 진압군 관점의 이야기를 한 김에 당시 진압의 중추였던 정부군에 관해서도 잠시 알아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당연히 진압 작전의 최고사령탑은 당시 임금인 영조다. 영조야말로 자신을 왕위에서 끌어내리려고 거병한 반란군에 가장 크게 충격을 먹은 장본인이다. 즉위한 지 4년 정도밖에 안 되는 시점에서 자칫 사태진압에 미흡한 점이 노출된다면 진압 여부와는 상관없이 왕의 권위는 한없이 추락하고 말 터였다. 그래서 영조는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며 신중하게 접근했고 자신의 왕위에 대한 정당성을 더욱 확고히 하는 방향에서 대응방안을 수립하게 된다.

나라에 변란에 생겼을 때 임시적으로 임무를 수행하게끔 설치하던 순무사(巡撫使) 제도는 고려시대 때부터 있었던 오래된 제도의 관직이었다. ‘순무(巡撫)’는 문제가 되는 곳을 강제적으로 제압해서 해결한다기보다는 문제의 진상을 파악해서 관련 인원들의 불평불만을 잠재우는 방식으로 가급적 평화적인 해결을 유도하는 정부의 행위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실제로는 강제로 해결하면서도 겉으로 보기 좋은 위장을 나타내기 위한 용어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인좌의 난에 직면한 영조는 그러한 순무사 제도를 도입하되 신중하고 확실한 제압을 위해 아예 순무영(巡撫營)이라는 군사조직까지 설치하기에 이른다. 물론 이 순무영은 순무사가 지휘하도록 되어 있다. 문제해결을 위해 특수임무를 띤 중앙관리를 파견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강제해결을 취할 수 있도록 아예 특수임무를 띤 중앙군 부대를 급파하는 제도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렇게 처음 생겨난 순무영 제도는 이후 몇 차례 더 활용된다.

<순무영 제도가 시행된 4가지 사례>

(1) 이인좌의 난(1728) (2) 홍경래의 난(1811) (3) 병인양요(1866) (4) 동학농민혁명(1894)

순무영 제도가 시행되었다는 것은 당시 당면한 상황이 사실상 전쟁 발발과 다름없었다는 것을 말한다. 흥미롭게도 순무영 제도는 이인좌의 난에서 시작해서 동학농민혁명에서 마지막으로 활용되었다는 사실이 눈에 띤다. 우리가 주목하고 있는 목천현 한 곳만 놓고서 보자. 이인좌의 난 때 순무영 군사들이 들이닥친 이후 다시 166년 후에 동학농민혁명 때 또다시 순무영 군사들이 들이닥쳤다는 것을 생각해보시라. 이것이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필연이었을까?

은석산 정상아래에 위치한 어사 박문수 묘
은석산 정상아래에 위치한 어사 박문수 묘

은석산에는 암행어사로 유명한 박문수 묘가 있다. 거의 정상부 가까이에 높이 자리를 잡고 있다. 박문수는 이인좌의 난 진압을 위해 시행된 순무영에서 종사관을 역임했다. 박문수 묘의 위치는 독립기념관과 연동되어 명당의 전설처럼 이야기되곤 한다. 하지만 그 묘를 이인좌의 난과 연관시켜 생각해보는 사람들은 거의 없는 듯하다. 이렇게 한 번 생각해보시라. 박문수 묘의 위치는 목천현에 감돌고 있는 반역의 기운을 지긋이 눌러주는 위치에 있는 것처럼 해석될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러니 더욱 더 흥미가 생기지 않는가?

이렇게 이인좌의 난을 반란과 진압 양쪽 관점을 아우르며 살펴보니 관련된 또다른 상상들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것을 느끼게 된다. 아직도 빙산의 일각을 다루고 있다는 것이 맞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다음에.

글 송길룡(천안역사문화연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