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철학사산책05] 바다가 하늘을 품은 듯한 마음
[천안철학사산책05] 바다가 하늘을 품은 듯한 마음
  • 천안아산신문
  • 승인 2023.12.21 0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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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시기 언론인으로서 ‘시일야방성대곡’으로 유명한 장지연(1864~1921)은 직업이 직업이니만큼 숱한 글을 남겼는데 그중에서도 『일사유사(逸士遺事)』라는 좀 특이한 책을 펴냈다. 이 책은 애초에는 같은 이름의 신문 연재로 1916년 『매일신보』에 179회에 걸쳐 게재된 글들을 그의 사후에 묶어내어 1922년 간행한 것이다. 가만히 연도를 보면 1919년 3.1대혁명을 기준으로 그 직전에 신문연재가 이뤄졌고 그 직후에 단행본간행이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이 이야기를 왜 하느냐면, 원래 장지연은 신문연재를 끝내고 바로 단행본간행을 하려고 했으나 무슨 이유인지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던 것이 3.1대혁명 이후 일제의 이른바 ‘문화정치’로의 전환 국면에서 식민지 조선 민중의 독립 열망의 흐름을 타고 간행되었음을 짚어보자는 취지다. 『일사유사』는 조선시대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재능이 출중했거나 특별한 삶을 살았던 한미한 선비들, 중인들, 평민에서 하층민까지 392명의 인물 전기를 담고 있다. 양반 유학자 중심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인 중심의 수많은 자기 삶의 주체들을 알뜰하게 소개하고 있으니 당시의 시대 상황과 맞아떨어지는 면이 있음을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은 한문 중심의 국한문혼용으로 쓰여져 있지만 현재 현대한국어로 번역이 돼 『조선의 숨은 고수들』(2019, 청동거울)이란 책이름으로 나와있다. 이 책에 담겨져 있는 조선 백성 392명의 인물 중에는 지난번에 소개한 ‘여성 철학자’ 곽청창(郭晴窓)도 당당히 함께 하고 있다. 기왕에 다시 소개한 김에 이 책에 수록되어 있는 곽청창의 시 한 수를 음미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해가 저물어가는 저녁 바다 海涵天日晩(해함천일만)

꽃은 일년 내내 붉구나. 花續一年紅(화속일년홍)

강에 가득한 어부들 滿江漁舟子(만강어주자)

돛을 내리고 저녁 바람 향해 있네. 停帆向晩風(정범향만풍)

- 『조선의 숨은 고수들』(488쪽)

이 시의 풍경을 상상으로 그려보자. 시적 화자가 서있는 곳은 아마도 큰 강이 바다로 이어지는 어떤 하구일 것이다. (내 상상으로는 아산만이 유력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알 수 없다.) 서쪽으로 바다에 노을이 지는 모습이 보이고 동시에 화자가 시선을 동쪽으로 옮겼을 때는 강이 나오고 강 위의 어선들이 나오고 어선 위의 어부들이 보이는 정경이 펼쳐진다. ‘꽃은 일년 내내 붉구나’로 번역되는 ‘花續一年紅(화속일년홍)’은 거의 자동적으로 ‘꽃은 열흘을 못 넘긴다’로 번역해볼 수 있는 ‘花無十日紅(화무십일홍)’을 연상시킨다. 이 두 표현은 완전히 반대의 의미를 나타낸다. 시인은 노을진 하구의 풍경에서 짧은 순간의 운치보다는 영원히 지속되는 자연의 일상을 더욱 크게 강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내가 이 시에서 특히 감탄스럽게 눈길이 가는 것은 시작 부분의 두 글자 ‘海涵(해함)’이다. ‘해함(海涵)’은 ‘바다가 모든 걸 담근다’는 글자 그대로의 뜻과 함께 ‘넓은 포용력’이라는 은유적 의미도 가지고 있다. 요즘에는 거의 안 쓰는 옛날 한자어이기는 하지만, 그래서 『표준국어대사전』에도 등재되어 있지 않지만, 이참에 잘 알아두면 교양에 품위를 더해줄 만한 좋은 표현인 것 같다. 그런데 내가 이 표현에 주목하는 것은 위의 시를 그저 아름다운 저녁 바다 풍경으로만 감상하고 말기에는 아쉬운 점이 있고, 그래서 좀 더 깊은 시인의 메시지를 끌어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늘상 접하게 되는 노을진 바다 풍경은 그것을 보는 이로 하여금 늘상 넓은 포용력을 내면에 담아내도록 한다고 풀이를 하면 좀 그럴싸해지지 않을까. 저 아름다운 풍경을 통해서 사람들은 바다가 하늘을 품은 듯한 마음을 느껴보게 되는 건 아니겠는가 하는 이런 시인의 감성을 짚어볼 수 있다면 좋겠다.

시는 그렇다 치고. 그렇다면 이제 본격적인 질문을 던져보자. 곽청창은 도대체 누구인가? 일단 생몰연도를 알 수 없다. 언제 태어났는지 언제 죽었는지 정확히 연도를 알 수가 없다. 남편인 김철근은 곽청창이 지은 남편묘지명을 통해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녀의 남편은 1678년에 태어났고 1728년에 죽었다. 그러나 정작 그녀 자신의 생몰연도를 어디에도 표시하지 않았다. 아 너무 아쉬운 부분이다. 살아서 남편묘지명을 썼으니 아무리 못해도 1728년 이후로도 더 삶을 이어갔음은 확실하다.

부친 곽시징(1644~1713)이 천안 목천지역에 자리잡고 살았으니 곽청창의 출생지는 천안, 그 중에서도 역시 목천지역이 맞을 것이다. 목천지역을 옛날식으로 ‘목천현’이라고 한다면 ‘목천현’은 지금으로 치면 천안시의 동부지역을 가리킨다. 남편묘지명을 들여다보면 남편의 묘소는 ‘전의현의 북쪽 고도박 임좌의 언덕’에 마련됐다. ‘전의현’은 지금의 세종시 전의면 일원을 나타낸다. 내가 아무리 이런저런 지명자료를 훑어보아도 도대체가 ‘전의현’의 어디에 ‘고도박’이 있었는지 알 길이 없다.

곽청창이 어린 시절에 지냈을 것으로 추정해보는 병천면 도원리. 도원리 도원골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자연미륵이 있고 마을사람들은 이곳을 미륵댕이라 부른다. 20세기에 들어와 세워진 것으로 곽청창이 살던 시기와는 관련이 없다.
곽청창이 어린 시절에 지냈을 것으로 추정해보는 병천면 도원리. 도원리 도원골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자연미륵이 있고 마을사람들은 이곳을 미륵댕이라 부른다. 20세기에 들어와 세워진 것으로 곽청창이 살던 시기와는 관련이 없다.

사실 곽청창의 ‘청창(晴窓)’은 본명이 아니고 호(號)다. 부친인 곽시징이 우암 송시열의 문인인 연고로 곽씨 소녀는 어린 시절 우암 선생에게 자신이 쓴 시를 보여준 적이 있다. 우암 선생이 시를 읽어보고 감탄하며 칭찬하면서 지어준 호가 ‘청창’이다. 개일청(晴)에 창창(窓)이다. 구름 걷혀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창문이란 뜻이다. 당대의 최고 권위를 가진 유학자일 뿐 아니라 조선성리학의 완성자라고 평가되는 으뜸 선비로부터 전해받은 호이니 이 얼마나 영광된 이름인가. 하지만 본명을 알 수 없는 것이 못내 아쉽다. 조선시대를 살아간 여성들의 본명을 알아내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은 상식이지만 그럼에도 여성들은 각자 자신의 본명을 다 간직하고 살았다. 어떤 우연한 계기로 다른 이들에게 알려지기도 하는데 우리의 여성 철학자 곽청창은 본명을 숨겨둔 채 호로써 칭함을 받게 됐다.

어릴 적부터 시문을 잘 지어서 온동네에 소문도 나고 큰 학자로부터 칭찬도 들었으면 이후에 그녀는 성장하면서 얼마나 많은 시문들을 지었을까. 아닌 게 아니라 그녀를 소개하는 어떤 책에서는 진실인 듯 허구인 듯 그녀 자신이 쓴 시문들을 모아놓은 문집 6권이 한때 보람차게 엮어졌었다고 귀뜸을 전한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지금까지 전해지지 않고 유실된 것 같다고 한다. 아무렴 그렇지 평생 시도 짓고 글도 쓰고 때로는 남편과 함께 시문을 주고받기도 하며 필력을 가꿔냈을 것이다. 허다한 선비들을 제껴두고 자신의 남편을 위해 묘지명을 직접 쓸 만큼 자신감을 가지려면 그때는 이미 주변 선비들로부터 글짓는 실력을 인정받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아무튼 그 많던 시문들이 사라지고 현재 우리가 접할 수 있는 곽청창의 시문들은 몇 편 남지 않은 상태다. 아이고 아까워라. 남아있는 시문들도 엄청나게 훌륭한데 잃어버린 시문들은 또 얼마나 수준 높고 의미 깊은 시문들이었을까.

이렇게 그녀를 대하는 선비들마다 감탄을 자아내는 우리의 여성 철학자 곽청창에 대해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련된 개인정보가 너무나 불충분하다. 사정이 이러하니 곽청창이 천안에서 살았는지 세종에서 살았는지 아니면 제3의 장소에서 살았는지 최종적으로 확정하기가 어렵다. 그래도 근거는 있으니 곽청창은 천안의 인물이기도 하고 동시에 세종의 인물이기도 하다. 그리고 곽청창과 관련해서 정확히 확정할 수 있는 연도는 남편묘지명을 쓴 1728년이라는 연도뿐이다. 1728년도는 남편 김철근이 사망한 연도이니 당연히 그녀가 묘지명을 쓴 연도도 동일한 1728년이 된다. 그렇다면 1728년이라는 연도가 무척이나 소중한 연도가 된다.

병천면 도원리 도원골 입구 안쪽에 서있는 마을표지석. ‘桃源洞裏(도원동리) 大明天下(대명천하)’라 쓰여져 있다. 우암 송시열 선생의 스승인 신독재 김집 선생의 글씨라고 한다. 한편 마을이름인 ‘도원(桃源)’은 동양적 이상향을 뜻하는 무릉도원과도 관련된다.
병천면 도원리 도원골 입구 안쪽에 서있는 마을표지석. ‘桃源洞裏(도원동리) 大明天下(대명천하)’라 쓰여져 있다. 우암 송시열 선생의 스승인 신독재 김집 선생의 글씨라고 한다. 한편 마을이름인 ‘도원(桃源)’은 동양적 이상향을 뜻하는 무릉도원과도 관련된다.

1728년이 소중해진다면 대뜸 이런 질문을 해볼 수 있다. 1728년에 옛날 목천현에는 무슨 사건이 있었을까? 목천일 수도 있고 전의일 수도 있지만 하여튼 곽청창의 남편이 그 해 8월에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그보다 약간 앞서 그 해 3월에 목천현은 충북에서 청주성을 점령하고 경기도 안성 쪽으로 북상하던 이인좌 반란군의 영향권에 휩싸이게 된다. 혹시 곽청창의 남편 김철근은 이인좌 반란군과 동조의 입장이든 진압의 입장이든 모종의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 물론 알 수 없다. 하지만 반란의 소용돌이가 치는 지역에서 살았으니만큼 그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한국역사서에는 보통 ‘이인좌의 난’이라고 지칭되는 이 역사적 사건은 영조 시기 권력에서 소외된 이른바 소론계·남인계 과격파 선비들이 거의 전국적인 연결망을 가지고 영조를 왕위로부터 끌어내리려고 시도했던 일종의 반역 사건이다. 재미있게도 최근에 나온 『조선 반역 실록』(박영규, 2017, 김영사)이라는 책이 이 사건의 내용을 비교적 상세히 풀어주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진압자의 입장, 특히 당시 왕이었던 영조의 시각에서 보는 사건의 내용을 전해주는 것이다. 반대의 시각, 즉 거병을 하며 봉기한 ‘반정(反正)’ 세력의 시각에서는 그 사건은 거의 ‘혁명’에 비견될 만하다. 실제로 이런 시각을 가진 이들 중에는 ‘이인좌의 난’을 무신(戊申)년에 일어났다고 해서 ‘무신혁명’이라고 바꿔부르는 이들도 있다.

아무튼 1728년이라는 연도의 공통성과 사건발생장소의 인접성으로 해서 ‘이인좌의 난’(또는 ‘무신혁명’)과 곽청창의 남편묘지명은 아직은 뚜렷이 알 수 없는 어떤 기묘한 관련성을 가지는 것처럼 생각된다. 이 문제를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는 역시 앞으로 차근차근 풀어가기로 하자.

글 송길룡(천안역사문화연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