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안단테
가을 안단테
  • 천안아산신문
  • 승인 2023.10.07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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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랗고 붉은 가을 속으로 네 여자가 걸어 들어간다.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노란 은행잎이 우수수 날리며 고즈넉한 공원에 그녀들의 웃음소리가 퍼진다. 그 웃음소리 하늘에 펴져 수제비 구름 동동 떠다닌다. 최백호 노래 가사처럼 짙은 색소폰 소리는 없지만 모자 쓰고 선글라스 끼고 나름대로 멋을 부린 여인네들이다. 10월 말, 낙엽 뒹구는 한적한 공원길은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며 걷기에 딱 좋은 계절이다. 십년지기 문우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내가 살고 있는 도시 천안, 다른 문우들은 서울과 근교에서 이른 아침부터 서둘러 이곳에 도착했다. 독립기념관이 오늘의 목적지이다. 장소가 좋아서 지난달에 이어 두 번째 방문이다. 익숙한 그 자리에 다시 자리를 편다. 팔뚝만 한 잉어 떼가 노니는 연못 뒤쪽으로 자그마한 정자가 있다. 정자에 앉으면 정면으로 둥그렇게 휜 석조 다리가 고즈넉하게 보인다. 다리에 매달려 아이들이 잉어 떼에게 먹이를 던져주며 조잘조잘 즐거워하고 있다. 우리는 연못을 바라보며 정자 네 기둥에 기대어 두 다리 뻗고 준비해 온 커피와 다과를 즐긴다. 오색빛깔로 물든 단풍이 주변과 잔디 위에 우수수 떨어진다. 바닥에 펼쳐진 낙엽이 페르시아 양탄자 자수보다 곱다. 숲 사이 듬성듬성 바위 의자와 나무 벤치도 하나씩 놓여 있다. 노천카페에 천연 바람과 가을이 우리를 품었다. 어느새 우리는 만추 풍경화 속 하나의 소품이 되었다.

안단테, 이름 지을 때부터 알아봤다. 40~50대 중년의 나이에 늦은 문학에 심취한 우리가 모 대학 문예창작과를 지원해 함께 동고동락한 시간이 이렇게 빠를 줄이야. 4학년 졸업을 앞두고 동인지를 발간하고 몇몇은 동인을 맺고 문학의 문고리라도 붙잡고 있자고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하여 모였던 6인이 안단테이다. 지금은 어영부영 흩어지고 4인방이 남게 되었다. 우리는 다들 성격도 느긋하고 서로 잘랐다고 새침 떨지도 않는 바닷가에 둥근 자갈 같다. 딱 안단테 이름처럼 천천히 느린 속도로 굴러갔다. 처음엔 열의가 있어서 서로 글 쓰고 합평하고 그러다 내가 제주로 이사를 하면서 다시 소원해졌다.

가끔은 인터넷상으로 모여서 글 쓰고 나누기도 했다. 더러는 손을 놓고 더러는 글을 쓰고 또 수다의 방으로 카톡방이 시끌시끌하기도 했었다. 내가 천안으로 다시 이사하게 되어 만난 자리에서 누군가 “안 되겠다 독서토론이라도 하자.”고 제안했다. 모두들 흔쾌히 오케이 했다. 좋은 책이라도 읽고 나누고, 글도 손 놓고 있으면 안 되겠다고 뭐라도 붙들어야겠다는 각오들이었다. 하여 장르를 불문하고 다시 문을 두드리기로 했다. 하여 시작된 독서 모임 겸 글 합평 모임이 공교롭게도 두 번 다 독립기념관이 되었다.

일단 각자 써온 글 합평이 시작되었다. 두 편의 시와 다섯 편의 수필이 도마 위에 올랐다. 느슨했던 분위기가 일순 찬물을 끼얹은 듯 타이트하게 경직된다. 글 앞에서는 누구도 대충은 없다. 침 튀겨가며 설전이 오가고 각자의 시각에서 잘된 것과 고쳐야 할 부분들을 꺼내어 놓는다. 제3자의 시각을 제시하지만 글 쓴 작가가 자기 시각이 옳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이 최우선이다. 다만 합평 이후에 작가 본인이 수정하든 안 하던 참고한다.

속없이 착하기만 한 그녀들과 함께 한 세월이 어느덧 강산이 바뀌었다. 이름처럼 천천히 여유롭게 시간의 강을 건너가고 있다. 산야가 온통 울긋불긋한 수채화 색으로 물들고 있다. 띄엄띄엄 산책객들이 오가고 유모차 끌고 다니는 젊은 부부도 보인다. 가끔 불어오는 바람에 옷깃을 여미며 우수수 눈처럼 휘날리는 가랑잎들에 눈길을 빼앗기기도 했다.

이제 독서토론 시간이다. 오늘 나눔 책은 누구나 읽어봤을 만한 <어린 왕자>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특별해지는 것이 ‘길들이는 것’이야.”

조곤조곤 우리들에게 하는 말 같았다.

“사막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어딘가에 우물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야.”

“네가 만약 4시에 온다면, 나는 3시부터 행복하기 시작할 거야.”

안단테 만나기로 약속한 날이면 들뜨는 우리의 심정이 이럴까? <어린 왕자>가 어른들의 동화로 자리매김하게 된 각자의 느낌과 마음에 와 닿는 구절들을 읽어보았다. 가까이 두고 자주 들쳐보며 정독해야 할 것 같다고 입을 모았다. 읽을 때마다 새로운 느낌이 드는 이 책이 오랜 시간 왜 독자들에게 사랑받는지 다시 짚어보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가을이 익어가고 있다. 우리들이 빚은 술(문학) 익는 소리도 간간히 톡톡 반응을 보인다. 소리 없이 깊어지는 계절처럼 안단테도 오색으로 물들이며 조금은 느리지만 문학의 정수로 향하고 있으리라. 세상사 인생 고락을 겪은 늦은 나이에 만나 문학을 향해 천천히 가고 있는 안단테가 따뜻하고 고맙다. 빠르지 않으면 어떤가. 조금 천천히 걸으면 어떤가. 중요한 것은 문학을 놓지 않고 함께 바라보며 걷는 것이다. 시월의 어느 멋진 날 오후의 햇살이 안단테의 넉넉한 품과 닮았다.

독서토론을 마치고 막내가 손수 만들어 차에 싣고 온 김밥과 페퍼민트 차로 출출해진 배를 채웠다. 따뜻하고 톡 쏘는 민트 향이 목젖을 적신다. “아……. 좋다.” 약간 쌀쌀한 날씨에 모두 찻잔을 어루만지며 반겼다. 맏이는 아침에 찐 고구마와 옥수수를 따뜻하게 가져왔다. 또 각자 보온병에 가져온 커피와 귤, 대추, 초콜릿, 호두…….먹을게 풍년이다. 이른 아침부터 몸단장하기도 바빴을 텐데 문우들을 위해 음식물까지 준비한 어여쁜 그녀들 마음이 사랑스럽다.

배도 두둑해졌으니 이젠 단풍길 산책코스다. 올해는 단풍이 좀 늦은 편이다. 아직 반쯤 물든 나지막한 언덕길 3~4km, 40여 분을 걷는 코스이다. 양쪽 빼곡히 들어선 단풍나무 숲길이 끝없이 이어진다. 우리들 수다와 웃음이 깊어가는 가을 숲속에 차곡차곡 쌓여간다. 숲길 끝자락에 녹슨 기찻길과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 건물을 해체하여 석조 조형물 공원으로 조성한 곳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하루해가 저물어 가고 있다.

독립기념관 본관 앞에 백여 개의 대형 태극기 앞에서 마음이 숙연해진다. 일제 강점기 35년의 긴 세월을 건너 독립을 한 위대한 대한민국과 독립을 위해 목숨 바쳐 헌신한 호국영령을 기념하기 위해 이곳이 설립되었다. 그분들이 아니었으면 언감생심 우리에게 이런 날들이 왔을까? 안단테가 잠행하던 지난 시간을 독립기념관에서 재정비함을 감사하는 마음에 눈을 감았다. 잘 먹고, 잘 놀고, 잘 쉬고, 문학 활동까지 알찬 하루가 다 지나갔다. 남은 생에 길동무, 글동무, 인생동무로 끝까지 함께 하자고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돌아오는 길, 자동차 안에서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다. ‘살면서 진짜 중요한 것들을 놓치고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으로 멍 때리고 있을 때 불쑥 어린 왕자가 말을 건넨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 마음으로 보아야 보이는 거야.”

글 김순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