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진영의 그림책 이야기 - “읽어주는 이의 바람”
전진영의 그림책 이야기 - “읽어주는 이의 바람”
  • 천안아산신문
  • 승인 2023.10.01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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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음이 서툰 아이가 도서관에 옵니다. 엄마나 이모, 할머니 손을 잡거나 유모차를 타고 옵니다. 36개월 미만 영아와 양육자들이 그림책 수업을 들으려고 일주일에 한 번씩 도서관 나들이를 합니다. 저는 공공도서관에서 영아와 양육자를 위한 독서 수업을 오래 했습니다.

저의 독서 수업에는 그림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감상하는 시간이 있습니다. 영아들에게 듣는 기쁨을 선사하고 싶었습니다. 주어진 한 시간의 시간 중에 책 읽어주는 시간이 가장 중요했습니다.

10년 넘게 진행한 수업에서 진땀 흘린 적이 있습니다. 그날 그림책에는 주인공 여자아이가 작은 인형을 보자기로 업고 있었습니다. 마침 그림책 속 인형과 똑 닮은 인형이 제게 있었습니다. 저는 그 인형을 책 읽어주는 시간에 활용했습니다.

그림책을 한 장 한 장 읽어가다가 인형을 업은 페이지를 읽고는 그림책을 내려놓았습니다. 가방에서 인형과 보자기를 꺼내 저도 업었습니다. 저는 그림책 속 이야기를 실제처럼 재현하고 싶었습니다. 그림책 장면을 재현할 수 있다면 영아들에게 훌륭한 독서 경험이 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아이들 반응은 어땠을까요? 당연히 집중했지요. 아이들은 그림책이 아닌 인형에 집중했습니다. 아이들은 인형을 만져보고 싶어 했고, 인형을 업어보고 싶은 애절한 눈빛을 전달했습니다. 제가 이리 가면 이리 오고, 저리 가면 저리 오고 졸졸 따라다니며 온몸으로 말했습니다. 그림책은 아직 다 읽지도 않았는데 영아들 눈은 일제히 등에 있는 인형으로 향해 있었습니다. “애들아, 이제 그만 책 보자.” 엄마들 도움으로 가까스로 인형을 가방에 넣고 그림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아이들은 그림책을 보지 않았습니다. 다급하게 넣은 인형 한쪽이 삐져나와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일제히 인형이 들은 가방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날 수업은 큰 충격이었습니다. 교구 활용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진땀으로 확인한 날이었습니다. 그날 이후 저는 그림책을 읽어주는 시간과 놀이 활동 시간을 철저히 분리했습니다. 대신 그림책을 읽기 전과 읽기 후 어디에서 교구를 활용 하는 것이 알맞은지 고민했고, 교구의 제시 방법과 활용 후 처리까지 자연스럽고 효과적인 방법을 고민했습니다.

그림책을 들려주는 시간에는 오로지 그림책 하나로 읽어주었습니다. 다른 교구는 활용하지 않습니다. 활용해야 한다면 진정한 교구는 ‘읽어주는 이’입니다. 더 필요하다면 읽어주는 이의 그림책 이해가 가장 중요한 교구였습니다.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선생님 수업은 달라요. 집에 가도 생각이 나요.” “다른 수업은 안 그런가요?” “다른 수업은 화려해서 그런지 듣는 그때뿐이에요.” 한 어머니가 저에게 해 준 말입니다. 영아뿐만 아니라 양육자들도 이야기 듣는 시간, 감상하는 시간이면 충분했습니다. 놀이 활동이 서툴러도 영아와 양육자의 가슴에는 그림책의 재미와 감동이 남습니다. 그 감동을 품은 엄마가 집에서 아이에게 책을 읽어줄 때, 단순히 스토리 전달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감동까지 전달하게 되겠지요. 듣는 영아들은 자연스레 그림책 보는 시간을 즐기게 됩니다. 엄마가 읽어주는 그림책이 영상이나 게임보다 재밌다는 걸 느끼게 됩니다.

읽어준 이는 기억나지 않아도 됩니다. 그림책 내용이 아이들의 가슴에, 머리에, 몸속 어딘가에 자리해서 험한 세상에 힘이 되고 위로가 되어주기를 바랍니다. 저의 소임, 읽어주는 이의 바람입니다.

글 전진영 달님그림책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