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탄 400장
연탄 400장
  • 천안아산신문
  • 승인 2023.08.15 0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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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에서 연일 비 피해를 알린다. 농경지가 물에 잠겼다. 산사태로 한 마을이 매몰되어 소중한 생명을 앗아갔다. 실종자도 생겼다. 지하차도가 물에 잠겨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는 소식에 입안이 써서 좀처럼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 비는 멈출 줄 모르고 세상을 온통 집어삼킬 듯 쏟아진다.

내가 1981년부터 24년 정도 살았던, 화성시에 있는 작은 동네를 '새마을 주택'이라 불렀다. 단독주택 20여 가구가 약 4미터 도로 좌우로 나란히 지어진 집이었다. 똑같은 평수와 같은 모양의 기와를 올려 새롭게 조성된, 집집마다 지하실이 있어서 연탄이나 농기구, 자주 쓰지 않는 각종 생활용품을 보관했다. 우리 집은 등나무 집 혹은 감나무 집이라고 불렀다. 철로 된 대문 위로 등나무 넝쿨을 올려 포도송이 같은 보라색 꽃이 주렁주렁 필 때면 지나는 발걸음이 멈췄다 가곤 했다. 마당에 매화꽃 장미꽃 백합꽃, 채송화 꽃이 피고 배나무 사과나무 대추나무 대봉 감나무가 있었다. 동네 중심부에 안정적으로 터를 잡고 있는 우리 집이 나는 좋았다.

1986년 여름이었다. 어느 일요일, 남편은 직원이 부모상을 당해 전날 밤 서울에 가 있었고, 집에는 나와 5살, 3살 어린 아들 둘이 있었다. 그날은 새벽부터 비가 내렸는데, 세차게 내렸다 약하게 내리는 빗소리가 일정한 음률로 들리며 포근함을 느끼게 했다. 하지만 오후가 되자 비는 거세게 쏟아졌다. 남편에게서 서울도 많은 비가 내려 출발을 못 하고 있다는 연락이 왔다. 마음이 더 불안해진 나는 거리에 빗물이 철제 대문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모래주머니와 헌 이불로 대문 앞을 막고 벽돌로 눌러 놨다. 그러고 얼마간 시간이 지났을까? 밖에서 동네 주민이 문을 두들기며 다급하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애기 엄마 동네 입구가 물에 잠겨 와요. 이러다 마을이 다 잠기겠어요. 대문 밖에 저렇게 쌓아놔봤자 아무 소용 없어요. 남편은 언제 와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밖으로 달려가 보니 흙탕물이 마을로 밀려오고 있다. 우리 집 바로 앞에 있는 맨홀 뚜껑도 들썩들썩! 하수물이 솟구친다. 삽시간에 물바다가 된 우리 집. 대문 앞에 막아놓은 모래주머니와 헌 이불은 무용지물. 빗물은 순식간에 연탄 400백 장이 쌓여 있는 지하실을 삼켰고 재래식 화장실은 오물을 토해 냈다. 옹기종기 예쁘게 놓여있던 된장 항아리 고추장 항아리 빈 항아리가 서로 부딪쳐 깨지고 오물과 뒤섞여 춤을 추었다.

마당 한 귀퉁이에 식수를 해결해 주는, 지하수를 끌어올려 주는 모터가 설치되어 있고, 그 옆에 작은 창고 안에 한 달 남짓 땔, 연탄과 20kg의 소금 두 포대가 있었다. 당황한 나는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서 있었다. 주민들이 오히려 더 안타까운 마음에 한숨을 쉬며 바삐 오갔지만 도움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마당에는 물이 무릎 높이까지 찰랑찰랑, 화장실에서 몰려나온 똥 덩이는 너울너울 몰려다닌다. 이러다 집안 거실과 안방까지 들이치게 생겼다. 어찌해야 좋을지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빨리 오지 않는 남편이 원망스러웠다. 빗물인지 눈물인지 볼을 타고 내린다. 앞이 안 보인다. 더 큰 위급상황이 닥칠 것 같은 순간, 모든 걸 포기하고 있을 때, 비가 서서히 걷히며 집안에 물이 빠지기 시작했다. 살았다는 안도감에 맥이 쭉 풀렸다. 다행인 것은 마당으로부터 1.5m 높여 지어진 집이었기에 거실과 방은 무사했다. 수마는 마을 입구 식당과 지대가 낮은 우리 집을 포함 여섯 가구를 할퀴고 물러갔다.

1980년도 중반, 연탄 값이 장당 약 15원이었다. 연탄을 미리 사놓는 건 잘 말려서 사용해야 화력이 좋기 때문이다. 살림이 쪼들려 여유가 없을 때는 50장 100장씩 사서 마르지 않은 연탄을 사용하기도 했는데, 그해는 큰맘 먹고 400장을 들여놓았다. 한겨울을 나려면 아껴서 연탄을 땐다 해도 하루에 두 장씩, 400장이 있어야 했다. 월급쟁이 빠듯한 살림에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아이 둘을 돌보면서 대바늘뜨기 부업을 해서 모은 돈으로 사놓은 연탄 400장.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그 당시에는 등을 따듯하게 해줄 연탄과 겨울에 먹을 쌀 반 가마(50kg)를 준비해 놓으면 세상 부러울 게 없었다. 그 소중한 연탄이 지하실에 물이 잠기면서 전부 못쓰게 돼버렸다. 그뿐이 아니었다. 우리 가족 식수를 해결해 주는 고장 난 모터, 마당 창고에 있던 연탄과 허울만 남은 소금 포대 등. 여기저기 깨어져 나자빠진 고추장 된장 항아리와 구석구석 널브러져 있는 인분 덩어리, 쓸모없게 된 각종 가재도구들을 보며 나와 남편은 헛웃음이 났다.

동네 사람들은 입을 모아 이번 수해가 인재라고 했다. 마을 중간 우측에서 약 150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자그마한 언덕 위에 직물회사가 있었다. 비가 많이 오면 2천여 평이 넘는 회사 마당 물이 울타리를 타고 회사 바로 밑에 있는 100여 평 남짓 밭, 밭고랑의 황토 흙을 몰고 마을 중간으로 쏟아졌다. 그럴 때마다 하수구로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빗물과 만나 우리 집을 비롯해 서너 가구가 조금씩 침수되곤 했다. 마을 주민들은 회사로 몰려가 여러 번 항의했다. 제발 회사 안에 물길을 만들어서 회사 울타리를 타고 빗물이 동네로 내려오지 않게 해달라고 했다. 회사 측은 물이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 자연의 이치인데 어떻게 막을 수 있느냐고 했다. 화가 난 주민들이 관련 기관에 민원을 넣어가며 강력한 항의 끝에 다른 곳으로 빗물을 빠지게 할 테니 안심하라는 답을 얻어냈다. 그런데 회사는 어이없게도 마을 밖으로 길게 빼내야 할 우수관을 마을 하수관과 연결 해놓았던 것이다. 결국 그 물이 마을로 유입되어서 이런 비극이 생겼다. 수해 입은 식당과 그 외 다섯 가구의 재물 손실과 정신적 피해를 남기고서야, 회사는 사과를 하고 관리 감독에 소홀한 관련 기관에서도 고개를 숙였다.

올해 여름 장마는 기후 변화와 맞물려 많은 비가 내렸다. 그로 인해 막을 수 없는 자연재해도 있었지만, 안일한 대처로 막지 못했던 인재가 더 컸던 것 같다. 해마다 같은 피해가 반복해서 일어나고 사후 조치가 이루어진다. 80년도에 내가 겪었던 일이나 40년이 지난 지금이나 여전히 사후약방문이다.

글 박순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