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어 버린 커피
식어 버린 커피
  • 천안아산신문
  • 승인 2023.08.07 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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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일을 마치고 정갈한 마음으로 따뜻한 커피를 마신다. 하루를 계획하고 잠시 숨을 고르는, 방해받고 싶지 않은 나만의 시간이다. 여느 때처럼 조용히 오붓함을 즐기려던 찰나였다. 궤엥~ 궤엥~. 시끄러운 기계음과 함께 베란다 밖으로 긴 철제 사다리가 놓였다. ‘하필, 이 시간 일 게 뭐람.’ 평온한 내 아침 한때가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짜증이 밀려왔다.

누군가 여길 떠나나 본데, 누굴까? 어림잡아 서너 층 윗집인 것 같은데 누군지 알 길이 없었다. 칸칸이 나누어진 틈틈이 옹기종기 모여서는 살았지만, 가끔 멀뚱멀뚱 엘리베이터에서나 마주쳤을까? 주차장에서나 스쳤을까? 이렇게 저렇게 몽타주를 그려보는 건 이사 가는 사람에 관한 관심이라기보다는, 소음 제공자가 어떤 인물인지 궁금해서였다. 내 불편한 호기심이 겸연쩍기도 했지만, 혹시 아는 얼굴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어서였다.

튼튼한 철문으로 입구를 봉쇄해놓고, 갖은 비밀스러운 번호로 접근을 차단해 놓은 이곳에서는 무관심이 일상화되어 있다. 자신의 존재가 드러나는 순간은 타인이 불쾌감을 느끼는 순간과 맞아떨어질 확률이 커 서로 모르고 사는 게 편한 경우가 더 많은 곳이다. 때로는 음악 소리, 발소리, 개 짖는 소리, 스멀스멀 기어들어오는 담배 냄새 등으로 옆집에 누가 살고 있는지 위아래 층에 누가 살고 있는지, 적을 대하듯 염탐하기도 한다. 나도 세탁기와 청소기는 밤에 돌리지 않고 집안에서는 조용히 걷고 시끄러운 소리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주의한다. 우리가 서로를 허용해 줄 수 있는 경우는 지극히 제한적이라 아파트에서는 서로 발각되지 않도록 없는 듯 살아야 한다.

폐쇄된 공간에서 마음 문도 닫은 채 숨어 사는 꼴로 살아가는 이곳 사람들이다. 그러다 보니 어떤 사람이 어떻게 살다가 어디로 가는지 아는 사람도, 알려고 하는 사람도 없다. 기억되지 않는, 기억할 이유도 없는, 기억 밖의 존재로 살다가 떠나가기도 하고 남몰래 생을 마감하는 사람들도 생긴다. 작별을 알리는 이삿짐 사다리 소리가 요란하다.

방안 스피커에서는 공동생활에 대한 지침이 내려진다. 함께 살아가는 방편이니 잘 듣고 따라야 한다. 잡다한 일들과 늘 반복되는 이야기가 전부이다. 듣자니 귀찮고 안 듣자니 혹여, 불이익이나 입지 않을까, 한쪽 귀를 열어둔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심심치 않게 들려왔던 적이 있었다. 얼마간은 어린아이니까 울겠지 싶어 신경이 쓰였지만 그럴 수 있다고 넘겼다. 그럴 수도가 그렇지만 으로 방향을 틀면서 두꺼운 벽을 뚫고 날아드는 울음 파편은 내 마음에 뾰쪽한 화로 심어졌다. 나도 아이를 키워봤으니 이해하자, 이해하자, 화를 꾹꾹 누르고 있었다. 울음소리가 잦아들길 기대했건만 끊이지 않는 울음에 차츰 아이도 미워졌다. 아이는 그렇다 쳐도 울음을 달래지 않는 부모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학대가 아닌가도 의심스러웠다.

화가 뿔로 쏟던 날, 아래층으로 향했다. 울음소리를 확인하고 초인종을 눌렀다. 문은 열리지 않았다. 다시 초인종을 눌렀다. 허리가 굽고 마른 할아버지 한 분이 나오셨다. 다짜고짜 아이가 너무 심하게 우는 것 아니냐며 따지듯이 물었다. 아이를 봐야겠다고 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서였다. 김이 오른 여자의 말에 할아버지 몸은 동그랗게 말려 순식간에 쪼그라들었고 눈썹까지 여덟 팔자로 내려앉았다. 사정은 이랬다. 손녀가 아토피가 심해서 몸을 씻기거나 약을 바를 때면 악을 쓰며 운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초주검에다 울상이었다. 안타까운 얘길 듣고 나니 어떻게 수습을 해야 할지, 화부터 낸 내가 무안해졌다. 알았다는 말을 전하고 돌아서는데 차분히 말해도 될 일을 다짜고짜 몰아세워 마음 상했을 할아버지께 미안했다.

그런 일이 있고 난 뒤에도 울음은 그치지 않았지만 더는 소음으로 들리지 않았다. 아장아장 걷는 세 살쯤 돼 보이는 아이가 눈에 띄기 시작한 것도 그날 이후였다. 팔다리는 물론 얼굴까지 피부염으로 벌게져 있었다. 저렇게 아픈 아이였구나. 꼬물꼬물한 것이 사랑스러웠다. ‘그 고생을 하는데 나는 그것도 모르고….’ 미안한 마음에 지나칠 때마다 마음으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 빨리 나아라. 오늘 옷 예쁘네. 놀이방 가는구나 잘 다녀와.’ 등등. 그렇게 한동안 아이에게 혼자 눈인사를 했다.

아파트 현관이 분주하던 어느 날 아랫집 이삿짐이 트럭에 실리고 있었다. 여기보다 좋은 환경으로 이사 갈 테니 잘 됐다고 생각했다. 다행이긴 한데, 마음 한쪽이 아릿했다. 할아버지께 인사도 건네고 아이 머리라도 쓰다듬어 줄걸, 그랬으면 좋았을걸. 용기가 나지 않아 알은체를 미뤄두고만 있었다. “아토피 꼭 나아! 잘 가.” 끝내 마지막 인사를 혼자 했다.

육중한 짐들이 날개를 단 듯 사뿐히 내려지고 있었다. 마침내 채비를 마친 트럭은 크게 시동을 울렸다. 한 건물에서 뜨거운 숨을 같이 쉬고 살았는데 떠나는 이에게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사다리와 소음이 사라진 하늘이 말끔히 눈에 들어왔다. 흐린 마음은 소란스럽기만 했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커피가 다 식어 버렸다.

글 김형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