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밀하게
은밀하게
  • 천안아산신문
  • 승인 2023.06.12 10:5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며칠 전 운동 끝나고 얼렁뚱땅 휩쓸려 나간 자리가 점심을 얻어먹는 자리가 되었다. 누군가 갑자기 밥을 사 주겠다며 일행을 이끌었다. 오가며 눈인사 정도 나눈 사이였다. 처음엔 잘 모르는 사람에게 식사대접 받는 것이 부담스러웠지만 콕 집어 지정해서 부른 몇 사람이어서 뿌리치지 못하고 따라나섰다. 점심을 먹는 내내 자기 자녀, 손주 출세한 이야기, 본인이 은퇴자로서 재직시절에 한 업적들을 열거했다. 그뿐만 아니라 지금도 후배들을 불러내 밥 사주고 이웃들에게 자선 나눔을 한다고 침이 마르도록 자화자찬이다. 일일이 열거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 식사가 끝나고 나서도 계속 이어졌다. 밥을 먹었는지 무얼 먹었는지 모르게 시간이 흘렀다. 말(言)을 한 말쯤 먹은 듯 배가 불러서 저녁까지 그것들을 되새김질하느라 속이 불편했다. 덕분에 별로 알고 싶지 않은 그 집 가정사를 훤히 꿰게 되었다.

휴먼다큐<어른 김장하>는 진주에 허름한 한약방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이다. 주인공 김장하 선생은 60여 년 동안 한약방을 운영하면서 소리 없는 배려로 주변과 이웃을 한결같이 섬겼다.

“돈은 똥과 같아서 쌓아두면 악취가 진동하지만, 흩뿌리면 거름이 된다”고 그는 말한다. 특히 아프고 힘없고 약한 자들 입장에서 힘을 실어 주고 나눔을 행했다. 20년간의 한약방 운영 수익으로 1983년 경남 진주에 명신고등학교를 세워 잘 키운 뒤에 1991년 100억대 재산을 국가에 헌납했다. 1990년 창간한 <진주 신문>에는 월 1,000만 원에 달하는 적자를 10년간 보전해 줬다. ‘토호 세력이 겁 없이 설치지 않도록 언론이 제 역할을 해야 한다’는 믿음에서였다. 요즘처럼 언론이 정권에 장악되어 눈치 보면서 편파 보도되는 일이 없어야 했기에 선생의 도움이 국민들의 알권리를 지켜주었다.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여성을 위한 쉼터를 만들어 주었고, 길거리에 나앉게 된 극단이 안정적인 공연장을 갖도록 도와주었다.

그에게는 사람 존중의 정신이 늘 배어있다. 평생 1,000여 명이 넘는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었다. 장학금으로 공부를 마친 문형배 헌법재판관이 감사 인사를 하러 갔을 때 “사회에서 받은 걸 주었을 뿐이니 혹 갚아야 할 게 있다면 사회에 갚아라.” 했고, 장학금을 받고도 공부는 안 하고 데모만 했다고 미안해하는 이에게 “그것도 사회를 위해 기여하는 길이다”라고 존중했다. 이 외에도 수많은 업적을 일절 함구했다. “아픈 사람을 대상으로 해서 번 돈을 함부로 쓸 수 없다.”며 80이 다 된 나이에도 단벌 신사에 차도 없이 걸어서 다닌다.

그동안 많은 이들이 선생을 취재하려 했으나 끝까지 거부했다. 말년에 한약방을 그만두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기자가 선생의 주변 인물 100명을 인터뷰하면서 취재가 시작되었다. 입에서 입을 모아 나온 작업이 이 프로그램의 시작이다. 한약방을 닫기 전 마지막 인터뷰하는 남성당 한약방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낡은 실내 환경과 오래된 금성 마크의 에어컨, 더 오래된 듯한 나무 책상이었다. ‘이 시대에 진정한 어른이 없다’고 말을 한다. 프로그램 마지막 영상에 어디론가 타박타박 걸어가는 선생의 뒷모습에서 꼭 해야 할 일을 다 치른 듯 어깨가 가벼워 보였다. 참으로 ‘아름다운 사람’을 보았다. 아직은 세상이 살만하다고 느껴졌다.

영국의 작가 알랭 드 보통은 인간의 욕망 가운데 가장 큰 것은 ‘남이 나를 알아주기 바라는 것’이라고 했다. 대부분 선행을 할 때 남이 나를 알아주기를 바란다. 그런데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은 ‘자기의 의’(self-righteousness)이다. 선행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나를 드러내는 것이 목적이다. 이때 선행은 자신의 이기적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고 만다.

인간은 천차만별 여러 부류가 있다. 수천억대의 재벌들도 자기 앞의 생에 눈이 벌겋게 돌아가고, 누군가는 수백억대 재산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더 많은 재산을 축적하기 위해 주가조작으로 불법 재산을 취득하며, 권력과 손잡고 더 많은 것들을 움켜쥐려다 국제적 망신을 당하기도 한다. 김장하 선생 그도 인간인데 욕망이 왜 없었겠는가. 다만 위대한 가치를 알아보고 겸손한 수도승처럼 그것을 묵묵히 행하는 현자(賢者)였다. 가치관에 따라 같은 시대 같은 하늘 아래 이렇듯 아이러니가 존재한다.

성경에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씀이 있다. 어려운 이를 위해 구제 활동을 할 때 보이지 않게 은밀하게 하라는 가르침이다.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일이 새삼 귀하게 느껴졌다.

글 김순례 (수필가) <마음속 풍경>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