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로당, 일터가 되다
경로당, 일터가 되다
  • 천안아산신문
  • 승인 2023.06.11 08:3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경로당’ 하면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삼삼오오 둘러앉아 화투 치는 장면 같은 게 우선 쉽게 떠오른다. 화투놀이가 치매 예방을 도운다는 조언이 있긴 하지만, 다소 비생산적인 시간 낭비로서 나태한 노년의 대표 이미지이기도 하여 일상적인 경로당 운영에 가끔은 회의가 들게 하기도 한다. 노년의 시간을 무의미하게 보낸다는 것은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 모두 노인들의 정신건강에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다.

성거 시내에서 얼마 들어가지 않으면 산 아래 아담한 동네가 보인다. 천안시 성거읍 석교리.

마을 유래에 따르면 이곳은 조선 중기 형성된 류씨 집성촌으로 학문을 즐겨 서당과 양반 동네로 불렸으며, 마을이 전체적으로 경사지에 놓여있어 농사가 어려워 보이나 실제로 마을 뒷 능선 넘어 복덕골 지역에 넓고 비옥한 땅이 펼쳐져 있다. 또 다른 지명으로 ‘구억(舊憶)말’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이는 예전 어려운 시기를 생각하여 서로 이웃을 생각하라는 의미라고 한다. 마을 인구는 70여명 중 경로당에는 30여명 모인다. 또 예전에 꿩이 많아 ‘궝말’이라는 별칭도 있는데, 금번 마을 프로젝트 사업명이 바로 ‘궝말 엄마손 집반찬’이다.

주위를 에워싼, 멀리 산등성 위로 전원주택 몇 채가 이어져 있고, 조금 아래쪽 완만하게 경사진 중턱에 경로당과 마을이 자리잡고 있다. 그리 넓은 동네가 아니지만, 경로당 입구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어르신들의 큰 목소리로 보아 오늘 무슨 특별한 일이 있나보다. 경로당 앞 빈 마당에 큰 솥이 걸려 있고, 수돗가 한쪽에서는 마늘쫑 다듬고 씻는 일손이 분주한가 하면, 경로당 안에는 식탁 위에 포장상자가 가득하다. 음식을 만드는 파트, 포장하는 파트로 인원들이 나뉘어져 있는데, 포장 담당은 모두 80대 어르신들이다.

오늘 이 마을에서는 사회적경제 동아리지원사업의 일환으로 400만원의 자금을 지원받아 총 5회에 걸쳐 5개월 간 실행되는 ‘궝말 엄마손 집반찬(사실라우~~)’ 사업 그 1회차가 진행되는 날이다. 이 사업은 농촌마을들의 전반적 고령화로 인한 인구감소 및 공동화 현상에 대응해 귀촌의지를 동기화하고 마을의 공동체활성화, 특히 코로나19 이후 침체된 마을 분위기에 활력을 주고자 추진된 사회적경제 동아리 사업의 하나이다. 선정된 메뉴는 △1회차 연근조림, 마늘쫑, 건새우 볶음 △ 2회차 장조림, 콩자반 △3회차 열무김치, 삼계탕 △4회차 메추리알 장조림, 오이소박이 △5회차 진미채볶음, 멸치볶음 등 우리가 집에서 흔히 늘 먹는 친근한 반찬들이다.

70대의 어르신들이 그간 늘 해오던 밑반찬에는 유명 셰프들에게 찾아볼 수 없는 나름의 노하우가 있다. 그 손맛을 살려 최소한의 표준입맛도 구현해야 하지만, 당신들의 자신 있는 분야를 살려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내는 것은 노인들에게 전혀 새로운 자기창조의 시간이다. 큰 꿈은 아니어도 작은 한 발 한 발 내딛는 진정한 첫걸음이다. 호남형 인상의 3대째 이은 젊은 이은석 이장님과 씩씩한 이명숙 부녀회장님의 추진력이 그들을 뒷받침한다. 마침 이장님은 ‘천안명품, 로컬푸드 전문매장’을 운영하시는 분이라 이번 프로젝트사업의 판로까지 연결되어 있어 안성맞춤형 마을사업이다. 천안시마을공동체지원센터와 연계되어 지난 2년동안 새싹마을 교육, 지도자 교육 등 이 사업을 위해 철저히 준비하셨다 한다. 이번 사업을 마을수익사업으로 이어갈 법인을 만들어 마을기금을 조성하는 등, 앞으로의 계획도 살짝 내비치셨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개념의 ‘한과’ 사업인데 지금 계속 연구, 구상 중이라고 하신다. 그 외에 노인 그룹홈도 계획하고 계셨다.

마당에서는 마늘쫑건새우 볶음의 간을 보면서 깨를 더 넣으라는 한마디에 누군가가 “그래, 내 것도 아니니 실컷 넣자”는 배짱투 응수에 “맛 없어 안 팔리면 누구 탓이냐”고 되받아친다. 드라마 한 장면처럼 훈훈하다. 거기에 그림자처럼 소리없이 뒤에서 차근차근 돕는 마을활동가 정순남 선생님, 그야말로 서로 딱 맞는 조합이다.

길을 걸어 본 사람은 안다. 길이 길을 부른다는 것을.

전에 ‘루신’이라는 어떤 이가 말했다. ‘원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게 곧 길이 되는 것이다.’

지금 석교리, 궝말은 모두가 그 길을 내고 있는 중이다.

글 민경혜 마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