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좋은 지금
딱, 좋은 지금
  • 천안아산신문
  • 승인 2023.05.14 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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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둥이가 서른여섯 살이란다. 그 나이 라고 믿어지지 않는 덩치큰 아들을 바라보며 생각의 나락으로 빠진다. 창밖이 수런거린다. 근처 초등학교에서 수업 끝나고 하교하는 어린아이들이 조잘거리며 삼삼오오 지나가고 있다. 서른여섯 살, 그때 나는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떻게 살아가고 있었던가.

스물여섯 살! 철없는 나이에 결혼해서 주어진 일상에 적응하며 사는 것이 미덕이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그래야만 한다고 교육받으며 살아온 세대였다. 모든 생활의 초점이 자녀들과 남편이었다. 그래서 그랬을까? 그때는 다람쥐 쳇바퀴 돌 듯한 일상에서 벗어나 빨리 나이가 들고 싶었다. 책임감과 의무감의 무거운 갑옷을 훌훌 벗어 던지고 싶었다. 세상을 관조하는 노인, 어른이고 싶었나 보다.

서른여섯 살! 돌아보니 손이 많이 가는 초등학교 1학년, 4학년 두 아들과, 사업하는 남편 뒷바라지하랴, 살림하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이었다. 두서없는 하루를 보내고 난 저녁이면 녹초가 되어 누가 업어 가도 모를 밤을 지새우고 새벽부터 다시 전쟁 같은 하루가 시작되었다. 이 녀석들만 대학 들어가면 모든 것이 내 생각대로 되려니 생각했다. 그때는 절대로 나 자신만을 위해 살아보겠다고 다짐했다. 내 안에 깊은 우물을 들여다보고 쓰다듬고 미뤄두었던 것들을 챙기며 실컷 놀아야지 생각했다.

마흔여섯 살! 착오도 이런 착오가 없었다. 두 아이 다 재수를 하고,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며 졸업을 유보하는 어이없는 결과가 찾아왔다. 대학만 입학하면 내 임무는 끝날 줄 알았는데 헐~~~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갈수록 걱정 근심거리가 자꾸만 느는 것이었다. 게다가 잘나가던 남편의 사업이 부도가 나고 이런저런 일을 도모해도 자꾸만 나락으로 떨어졌다. 이중 삼중의 고민과 걱정들이 나를 삶의 현장에 더욱 붙들어 놓았다.

쉰여섯 살! 아무리 삶이 고달파도 가족이라는 끈 앞에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초 긍정의 힘을 발휘해야만 했다. 나는 세 남자의 돛이 되어 바람의 방향을 이끄는 돛배의 수장이 되어야 했다. 내일의 더 나은 삶을 위해 오늘의 사소한 기쁨들을 밀어냈다. 점점 더 내 안의 나와는 멀어지고 꿈도 유보되고 있었다. 조금씩이라도 나를 들여다보며 아끼며 사랑했어야 했다.

어느 순간 돌아보니 나중은 없었다. 그때그때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아주 사소한 것들이라도 누리며 살아야 후회가 없다. 내일을 담보로 오늘을 저당 잡히고 비굴하고 우울하게 살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힘은 들지만, 함께 가면 되지 않을까?

늦었다 싶은 50대에 ‘이렇게 무의미하게 살아갈 수는 없다’ 싶어서 자아를 찾아 나섰다. 외면하고 밀쳐두었던 그것(문학)을 찾아 조금씩 사귀며 친해졌다. 10년이 훌쩍 넘게 문학의 언저리에서 노닥거리며 놀았다. 재미있고 유익했고 살아있는 존재감을 느꼈다. 아직 갈 길이 멀다. 그래서 ‘더 좋은 지금’이라고 생각한다. 자녀 장래에 대한 무거운 책임감과 좀 더 윤택하게 살고자 아등바등하던 삶의 굴레에서 무거운 갑옷을 벗은 자유로움까지 생겼다. 나는 지금 일생을 통틀어 누가 봐도 ‘딱 좋은 지금’과 밀당을 하고 있다.

서른여섯 살, 작은아들은 아직 나와 한집에 산다. 어린 시절부터 개구쟁이였다. 사람 좋아하고 집보다 친구가 더 좋아 나가 있는 시간이 더 많았던 아들이다. 보스 기질이 있어서 늘 친구들을 몰고 다녔다. 맞벌이 부모여서 허구한 날 집에 친구를 몰고 와 냉장고를 거덜 내고 가는 골목대장이었다. 사춘기를 앓고 적어도 이 아이는 20대에 우리 품을 떠날 것이라고 예견했었다. 오산이었다. 우리가 슈퍼맨이라 부르던 그 아들은 아직 자기 둥지를 만들지 못했다.

우여곡절 끝에 아들은 요리사가 되었다. 어려서부터 집 안에 있는 식자재를 털어 만든 요리를 주변에 먹이던 일이 재미 들었나 보다. 만드는 요리마다 제법 맛을 내는 재주가 있었다. 제주에 살 때 피자, 돈가스, 햄버거를 파는 브런치 카페를 운영했었다. 누구에게 요리를 배운 일도 없고 식당에서 일해본 적도 없는 녀석이었다. 혼자 연구하고 인터넷 검색하고 유명 맛집 찾아다니며 노력한 결과였다. 가게는 제법 인기도 있었고 연예인들도 찾아오고 맛집으로 인정받았다. 여러 가지 이유로 제주에서 육지로 다시 이사 하게 되었다. 변변한 연애도 없이 20대가 훌쩍 지나가 버리고 어느새 30대 중반이 되었다.

제주의 <쭈니창고>를 천안 신부동에 다시 오픈했다. 햄버거, 돈가스 가게이다. 처음에는 엉거주춤 어설픈 매출에 사업도 연애도 이러다가 다 망치는 거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일 년이 지나자, 단골이 생기고 맛집으로 알려지면서 손님이 북적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빛을 보나 보다, 우리는 손뼉 쳤다.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주방과 친하더니 직업이 될 줄이야. 대학도 호텔관광학과와 조리학과에 동시 합격했을 때 나는 망설이지 않고 호텔관광학과로 지망하라고 했었다. 대학 졸업 후 이것저것 해보며 불투명한 앞날을 애태우던 아들이었는데 비로소 자기 자리를 찾은 것 같아 마음이 놓인다. 결국 돌고 돌아 자기 자리로 찾아간 꼴인가. 자기가 좋아하는 요리를 직업으로 택해 우직하게 버틴 아들이 제법 대견해 보인다. 요즘은 단골손님으로 오던 아가씨와 핑크빛 소식도 오가고 있다. 사업도 연애도 딱, 좋은 지금이다.

내가 살아온 세월과 아들이 살아온 시간은 너무 달랐다. 내가 어렵게 살아와서인지 아이들은 세상 눈치 보지 않고 자기 하고 싶은 일을 하며 행복한 지금을 살기 바랐다. 가장 좋은 것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이 직업이 되는 거’라는데 딱 그런 모양새가 되었다. 그래서일까? 두 아들 모두 걱정도 근심도 없고 늘 기분 좋은 남자로 보인다. 세상의 눈높이로 본다면 쥐뿔도 없는데 느긋하고 여유롭다. 지금이 좋으면 하루가 행복하고, 하루가 기쁘면 한 달, 일 년, 아니 남아 있는 삶 매순간이 다 감사하고 행복하여지리라 믿는다.

요리를 내놓고 손님들이 맛있다고 극찬할 때 아들은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살아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직업병으로 손목이 늘 아파서 압박붕대를 감고 있어도 “이런 맛에 요리사 하는 거지.” 하며 행복한 너털웃음을 웃는다.

아들과 나는 나이에 상관없이 ‘딱, 좋은 지금’과 열애 중이다. 카르페 디엠!!!

“그나저나 우리 너무 오래 붙어산 거 아니니? 나도 좀 너로부터 해방되고 싶은데 얼른 장가 좀 가주면 안 되겠니?”

글 김순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