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응 열사를 기리는 4.1 문화제 열려
김구응 열사를 기리는 4.1 문화제 열려
  • 천안아산신문
  • 승인 2023.05.01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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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일 성공회 병천교회를 중심으로 4.1 문화제가 열렸다. 4.1 문화제는 3.1만세혁명 (당시 4월 1일) 104주년을 기념하고, 만세혁명을 주도한 김구응, 최정철 열사를 기리는 행사이다. 이날 문화제는 1시부터 최정철, 김구응 열사 별세 성찬례, ‘김구응열사평전’ 출판기념 북콘서트, 최정철 김구응 열사 묘소 참배, 영화 【영웅】을 상영했다.

성공회 병천교회에서 열린 별세성찬례
성공회 병천교회에서 열린 별세성찬례

왜 김구응열사인가

김구응 열사는 진명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면서 학생들에서 근대 학문을 가르치고 독립정신을 고취시켰다. 1919년 서울 이화학당에 다니다 병천으로 내려온 유관순과 함께 치밀하게 만세운동을 준비했다. 김구응 열사는 아우내 만세운동 전체를 계획하고 실행하는 리더 역할을 했다. 또한, 그의 어머니이자 병천교회 신자였던 최정철 열사는 장년층과 부녀자들이 만세운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역할을 맡았다. 1919년 4월 1일 최대 6천 명 이상이 결집한 아우내 만세운동의 현장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김구응 열사가 먼저 일제의 총에 맞아 쓰러졌다. 이를 알고 달려와 오열하던 최정철 열사도 아들과 함께 그 자리에서 일제의 칼날에 희생되었다.

김구응열사평전 출간 북 콘서트
김구응열사평전 출판기념 북콘서트

이날 진행된 북콘서트는 이윤옥 시인이 사회를 맡았고, ‘김구응열사평전’의 저자인 전해주 신부와 정종배 시인이 참여했다.

전해주 신부는 책을 펴낸 이유에 대해 “처음 병천교회에 부임했을 때, 비만 오면 종탑에 있는 종루에 물이 차서 성공회에 올리던 보고서들을 꺼내 말리곤 했었다. 그것을 보고 교회 백년사를 쓰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종루에는 보고서 외에도 1920년대 사진, 앨범, 신방일지 등이 나왔다. 자료 중에 강애단 신부의 회고록에서 김구응이라는 이름을 발견했다. 그래서 지역의 인사들께 여쭤봤더니 이미 알고 계시고 후손도 살고 계셨다. 어렸을 때부터 당연히 만세운동은 유관순 열사가 주도했다고 알고 있었는데 김구응 선생도 있었다는 사실에 호기심으로 조사를 하게 되었다.”라고 했다.

맨 오른쪽 김구응 열사를 끌어안고 있는 최정철 열사 

왜 김구응 열사가 주도했다고 보느냐는 질문에 전해주 신부는

“성공회 교회가 병천에 들어올 때는 교회보다 진명학교가 먼저 지어졌다. 그때 김구응 선생은청신의숙이라는 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다. 강대영이라는 부자도 흥호학교를 지었는데 운영하 기를 힘들어 해서 청신의숙과 홍호학교를 진명학교에 합쳤다. 인근의 학생 150명이 여기에 다녔다고 하니 병천 일대의 학생은 거의 다 진명학교를 다녔다고 보면 된다.”

또한 “김 선생이 기독교인이었는지 확실하지 않으나, 진명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기독청년회 회원들과 깊은 유대감을 갖고 조직을 이끌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렇듯 김구응 선생은 어린 학생들부터 부모인 어른들, 지역의 유지들까지 실질적으로 지역을 움직이는 지도자로서의 위상을 가졌다고 보면 된다”고 했다.

김구응열사평전
김구응열사평전

'4·1아우내만세운동'에 대한 명백한 역사학자들의 기록이 있음에도 김구응 열사와 그의 어머니 최정철 열사는 왜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있었던 것일까?

"4·1아우내만세운동에서 가장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김구응 열사는 현장에서 바로 사살되었기 때문에 재판 등 그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 심지어는 그의 가족들마저도 일본의 후환이 두려워 쉬쉬하며 그 고장을 떠나 흩어져 살아온 까닭에 제대로 된 기록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그의 사진 한 장 없다는 것이 못내 아쉽다. 성공하지 못한 거사는 결국 묻히기 마련이고 기록이 없으면 역사는 없는 것이다.

반면,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왜경에 잡혀 조사만 받고 나오더라도 그 기록이 있으면 애국지사라는 칭호를 받고 독립유공자가 되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애국지사는 결국 검거 기록이든, 재판 기록이든 이름이 적혀 있기만 하면 저절로 증명되는 것이다. 하지만 큰 만세운동을 목숨 걸고 준비하고 앞장서다 결국 왜경의 총탄에 쓰러진 사람들은 기록을 남길 수도 없었고, 가족들도 소거되었으니 당연히 잊히기 마련이다."라고 말한다.

열사평전을 헌정하는 전해주 신부
열사평전을 헌정하는 전해주 신부

아우내 만세운동을 올바르게 계승해야

김구응 최정철 열사의 묘소를 참배하는 자리에서 김구응열사기념사업회 김종수 회장은 “아우내만세공원 오른쪽 끝에 있는 열사의 동상을 아우내 만세운동 거리 가운데로 모실 것”을 제안하며 “아우내 만세 운동을 힘있게 이끈 지도력을 올바르게 기억하고 계승하는 일은 역사의 민주화를 위한 한 걸음의 전진이며, 아우내 만세 운동의 혁명적 불길을 후대에 계승하는 일이 될 것”이라고 했다.

이날 문화제는 김구응열사기념사업회와 천안역사문화연구회가 주최했으며, 천안민주단체연대회의와 사회적협동조합 기억과 평화, 동학실천시민행동이 후원했다.

김구응열사 묘소 참배
김구응열사 묘소 참배

전해주 신부의 평전에서 김구응 열사의 행적으로 3.1만세혁명의 참모습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또한 김구응 열사의 업적은 유관순 열사의 명성에 가려져 있는 면도 있다. 현재 우리들이 사는 세상은 선열들의 희생 위에 마련되었다. 열사들의 삶과 행적을 밝혀 세상에 드러내고 올바르게 기억하는 것이 후대의 의무일 것이다.

글 김경숙 마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