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구정 바위에 얽힌 기묘한 인물의 계보
복구정 바위에 얽힌 기묘한 인물의 계보
  • 천안아산신문
  • 승인 2023.04.12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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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지역사 산책노트 06] 

기왕에 복구정에 들렀으니 아예 정자에 자리깔고 앉아 한바탕 이야기를 더 나눠보기로 하자.

천안지역의 동학농민혁명을 소개하는 여러 편의 문헌자료들 중에 그래도 가장 최근에 나온 <충남동학농민혁명사>(충청남도·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2022)가 두툼하고 근사하게 읽어볼 만하다. 비매품이기 때문에 사서 볼 수는 없고 충남 소재 도서관에서 읽으면 되겠다. 아무래도 충남 전체를 범위로 하기 때문에 천안지역 부분은 좀 약소하게 보이지만 그래도 필요한 만큼의 내용을 채우고 있다. 최소한 관에서 제작한 지역혁명사의 면모를 감상할 수 있다. 그래도 관에서 만든 것은 역시 관에서 만든 것스럽기는 하다. 여하간에 반듯반듯하다는 말씀이다. 동학농민혁명에서 관의 역할은 반혁명 진압에 있었다. 혁명주체가 관이 아니라 민이었기 때문에 관에서 그 역사를 기록하는 것은 참으로 역설적인 면이 아니 드러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하여튼 관에서 기록했다는 것은 혁명의 공식적 성격이 인정됐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먼저도 이야기했듯이 ‘동학 3노’의 한 명인 김화성의 진술은 <충남동학농민혁명사>에서 따온 것인데 다시 한 번 더 그의 진술 중 또다른 부분을 따서 보자.

"대장장이를 불러 모아 긴 창과 큰 화포를 주조하여 무리를 거느리고 기포하여 일으키고 금년 9월 그믐부터 천안·목천·전의 3읍의 군대물품을 탈취하여 세성산에 들어가 웅거했습니다."

이 진술은 천안지역 동학농민혁명이 철저히 준비되고 대범하게 계획된 것이라는 것을 잘 알 수 있게 해준다. 많게는 4천명까지 집결했다고 하는 세성산 일대를 생각하면 그들을 무장시키기 위한 무기제조와 무기탈취는 대단히 전문화된 인력의 참여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까지도 예상하게 한다. 일본군의 당시의 첨단무기에 필적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지 동학농민군의 전력은 전통적인 의미에서는 막강했던 것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이 진술을 흥미롭게 생각하게 된 것은 ‘천안·목천·전의’라는 지명의 나열이다. 여기서 미리 알고 들어가야 할 행정구역명칭의 변천과정이 있다. 1894년 당시에는 엄연히 지방제도가 군현제이었기 때문에 천안군, 목천현, 전의현이 제각각 별도의 행정구역이었다는 것이다. 이러던 것이 일제식민지 시기에 접어들어 1914년 대대적인 행정구역 개편이 이뤄지는데 천안군, 목천현, 직산현이 통폐합되어 천안군이 되었고, 전의현, 연기현이 통폐합되어 연기군이 되었다. 뭉치자 하면 ‘천안·목천·전의’가 하나가 될 수 있는 지역들인데, 식민행정은 ‘천안·목천’과 ‘전의’를 짝짝 찢어서 다른 데 붙이고는 영 딴 동네로 만든 것이다.

이제 ‘전의’에 집중해보자. 그 옛날의 전의현은 연기현과 합해져 연기군이 되었다가 2012년 세종시 출범과 함께 세종시에 편입되었다. 이제는 ‘천안·목천’과 ‘전의’의 사이에는 충청남도와 세종특별자치시라는 광역자치단체 사이의 경계가 놓인 지경이다. 그래서 ‘전의’ 하면 천안시의 생활권에 속하는 지역이라고 말하면서도 천안시와는 아주 거리가 먼 낯선 지역이라는 인상을 가지게 된다. 이렇게 행정구역의 나누고 붙임은 무서운 지역구별의 심리적 거리를 낳는다.

아이고 한숨 돌리고.. 바위 이야기를 하려던 것이 이렇게 먼길을 돌아왔다. 복구정 정자 뒤편에 너부데데한 바위 하나가 있는데 그 바위 표면에 시가 새겨져있다. 참고 삼아 안내판에 풀이가 된 대로 시를 읽어보자.

老木有高意(노목유고의) 노목은 옛스러운 정취를 지녔고

淸川流不停(청천류부정) 맑은 시냇물은 쉼 없이 흐르네

秋陽無限思(추양무한사) 가을볕 아래 끝없는 생각에

獨上伏龜亭(독상복구정) 홀로 복구정에 오르노라

복구정 뒤편 바위에 새겨진 이재의 시
복구정 뒤편 바위에 새겨진 이재의 시

안내판은 도암 이재의 시라고 친절히 안내해준다. 도암이 호이고 이재는 이름이다. 조선 후기 아주 명망있고 학식이 깊었던 대학자 이재(李縡, 1680-1746)를 일컬음이다. 그는 우암 송시열의 학맥을 있는 이른바 낙론 계열의 정통 성리학자다. 이 인물은 앞에서 길게 이야기하며 던져놓은 ‘전의’와 관련이 있다. 이재는 복구정이라는 정자를 위해 <복구정기>라는 글을 써주었던 이상(李翔)의 방계후손인데, 이상은 ‘전의’에 자리잡고 살았던 송시열 직계 제자였다. 여기까지 보면 성리학 계보에 전혀 관심이 없는 독자에게는 결코 친근감이 안 생긴다.

이재는 천안이 자랑하는 역사인물, 조선 최고의 과학사상가 홍대용의 스승의 스승이라고 소개하면 어떤가. 홍대용의 스승은 김원행이고, 김원행의 스승이 이재다. 이재와 홍대용이 관련되어 있다 하니 천안을 사랑하는 천안시민에게는 친근감이 조금이나마 생길 법하다. 그런데 또 홍대용이란 이름을 처음 듣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래서 홍대용이라는 이름에 약간 뜨악한 표정을 짓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번에는 이재라는 인물을 가슴에 훅하고 다가오게 만들 수 있는 이야기를 해보겠다. 이재는 우봉이씨의 인물이다. 우봉이씨는 인구가 그리 많지 않다. 우봉이씨 하면 떠오르는 실로 안타까운 인물이 하나 있다. 바로 이완용이다. 이완용은 이재의 방계후손이다. 이재는 이상을 흠모하여 문집을 엮었고 이완용은 이재를 흠모하여 글씨를 남겼다. 어떤가? 복구정 바위의 한시가 갑자기 머리를 치지 않는가?

글 송길룡(천안역사문화연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