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진영의 그림책 이야기, "엄마 구실"
전진영의 그림책 이야기, "엄마 구실"
  • 천안아산신문
  • 승인 2023.04.05 22:45
  • 댓글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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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낳았습니다. 내가 낳은 생명을 키워야 하는 엄마가 되었습니다. 어떤 엄마가 되어야 할까? 어떤 엄마가 될 수 있을까? 고민했습니다. 생명을 책임져야 하는 엄마 구실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모든 걸 잘하는 엄마가 될 수 없는 건 당연합니다. 넉넉하지 못한 살림살이와 뛰어난 재주가 없는 엄마는 아이에게 책 읽어주기만은 하겠다고 다짐합니다. 아이가 먼저 곯아떨어져 잠들지 않는 이상 잠자기 전에 책을 읽어주었습니다.

도서관을 다니며 책을 찾았습니다. 어떤 책을 읽어줘야 할지 몰라 성인열람실에서 독서교육 책도 뒤적거렸습니다. 첫째 아이 하나일 때는 아이가 원하는 만큼 다 읽어주었습니다. 제가 먼저 책을 읽고 등장인물의 성별이나 유의할 점들을 파악한 후 아이에게 읽어주었습니다. 읽어주는 게 아니라 함께 보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읽은 책이건만 아이와 함께 보면 달랐습니다. 저는 놓친 부분이 많았고, 그림책은 여러 번 볼수록 더 재미있었습니다.

아이에게 읽어주는 책으로 그림책은 적합했습니다. 내용이 길지 않다는 점은 읽어주는 엄마에게도 좋았고, 주의력이 짧은 아이에게는 집중하기에 알맞은 시간이었습니다. 또 그림으로 아이와 소통할 수 있습니다. 아이는 엄마가 읽어주는 내용을 들으며 그림을 봅니다. 글자를 읽을 필요가 없기에 그림에 집중합니다. 구석구석 작은 그림을 잘 봅니다. 숨어 있는 이미지를 발견하는 아이에 엄마는 감탄합니다.

그림책의 내용은 공간적 배경과 시간적 배경 안에서 스토리가 영상처럼 흘러갑니다. 그림은 그중의 한 장면을 종이 위에서 보여줍니다. 어떤 경우는 “엄마, 그 말은 왜 없어?” 아이가 묻습니다. “이 책 만든 아저씨가 이걸 그리고 싶었나 봐.” 아이 표정이 좋지 않습니다. “네가 그려볼래?” 아이가 그린 그림을 그림책 사이에 끼워두기도 했습니다. 아이 그림이 들은 그림책은 더 반갑습니다. <구룬파 유치원>, <반쪽이>에는 아이 그림이 함께 있습니다.

책을 읽고 나면 이것저것 캐묻지 않았습니다. 아이가 물으면 답하고 저도 궁금한 걸 아이에게 묻고 그저 대화를 주고받았습니다. 그러다 둘째를 임신했습니다. 첫째에게 부탁했습니다. “동생이 태어나면 한 권밖에 읽어줄 수 없겠어. 너 한 권, 동생 한 권.” 아이 둘을 키우면서 체력적으로 지쳐가는 저를 인정해야 했고, 첫째가 받을 상처도 염두에 둬야 했습니다. 저의 이런 엄마 노릇은 이원영의 <젊은 엄마를 위하여>와 이상금의 <어린이와 그림책>이 영향을 미쳤습니다. 아이의 인격을 이해했고, 그림책이 아이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게 해주었습니다.

엄마 구실은 여전히 어렵습니다. 몇 달째 <코스모스>를 부여잡고 있는 어느 날, 고등학생인 둘째가 묻습니다. “엄마가 왜 이 책을 읽어?” 몇 마디 대화가 이어집니다. “그럼 <총, 균, 쇠>도 읽어 봐.”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게 좋습니다.

글 전진영(달님그림책연구소장) 

공주대학교 유아교육과 박사, 그림책 칼럼 연재(홍성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