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싼 낮잠
비싼 낮잠
  • 천안아산신문
  • 승인 2023.02.27 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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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세 시쯤 비몽사몽 화장실을 찾았다. 볼일을 보고 나가다 어스름 거울 속 익숙한 얼굴이 스친다. 누구지? 아……. 엄마!

엄마가 일찍이 서둘러 하늘나라로 떠나던 그 나이 즈음이다. 최근 꿈에 엄마가 자주 보인다. 어린 시절 엄마의 품을 늘 갈구했지만 바쁘고 피곤한 엄마는 내게 내어 줄 시간이 없었다. 아니 마음은 굴뚝같지만, 삶의 궤도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을 게다. 몸이 허약한 아버지를 대신해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던 가장이었다. 결국, 하나뿐인 육신이 여기저기 고장이 나고서야 겨우 누울 수 있었다. 비로소 힘을 뺀 엄마의 모습. 병석에 눕고서야 본인이 좋아하던 연보라색 한복을 가끔 입고 있었다. 비로소 내 엄마가 된 것 같았다. 평생의 노동에서 벗어나 병석에 눕던 날, 내게로 향하던 따뜻하고 평안한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고.고.. 맙 데이…….”

“미.미..안 하 데이…….”

뭐가 고맙다는 말인지, 무엇이 미안하다는 말인지 말끝을 흐렸다. 이미 뇌혈관 질환으로 발음도 시원찮았지만, 충분히 내 귀에 들리고도 남았다. 말을 끝마친 엄마의 눈가가 축축이 젖어있다. 비로소 엄마와 나의 눈높이가 같아진 시간이다. 엄마는 어린 시절 나에게 따뜻한 품을 못 내어줘서 미안했고, 20대 초반의 내가 생활전선에 서 있는 것이 아프도록 마음이 쓰였었나 보다. 그즈음 칠 남매나 되는 우리 집 형제들은 결혼, 이민, 사업 등등 다들 자기 일로 바빴다. 졸지에 나는 연로하신 부모님과 대학에 다니는 여동생, 그리고 나 이렇게 네 식구의 실질적인 가장이 되었다.

엄마가 쓰러지고 아버지의 눈물겨운 수고가 이어졌다. 평생의 미안한 마음이 아버지 손길에 묻어났다. 그 정성으로 얼마 후 겨우 걸음을 걸을 정도가 되었다. 집 모퉁이 햇볕이 잘 드는 곳에 나무로 얼기설기 만든 사과 상자에 흙을 넣고 엄마는 당신의 희망을 심었다. 엄마가 유일하게 감정의 사치를 누리는 기회였다. 거기에 가끔은 감사가 주렁주렁 열렸고 또 가끔은 눈물이 또르륵 매달렸다. 여름이면 오색의 채송화와 백일홍이 가을이면 연보랏빛 과꽃이 아른아른 피어났다. 그것을 바라보며 엄마의 눈과 입가에 모처럼 미소가 스쳤다. 어쩌면 엄마가 꿈꾸던 행복은 이처럼 소소한 것이었는지도…….

어린 시절 나는 비나 눈 오는 날이 좋았다. 그날은 엄마가 생업을 쉬고 집안일을 보는 날이다. 엄마는 재봉틀 페달을 밟으며 인생의 아픈 조각들을 이어 붙여 아름답고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학교가 끝나면 집으로 쪼르르 달려가 엄마 무릎을 베고 엄마의 하루 품과 바꾼 비싼 낮잠을 청하곤 했다. 빗소리를 들으며 깊은 꿈의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내 머리를 쓰다듬는 엄마의 귀한 손길을 그 얼마나 기다리던 순간이었던가! 눈 오는 날 창밖을 바라보며 엄마와 함께 실뜨기하고 공기놀이한 기억. 오빠들은 대학까지 보내면서 딸들은 중학교도 가지 말라는 아버지 몰래 곱게 접은 쌈짓돈을 내 손에 쥐여주었다. 딸 중에서도 마음도 몸도 허약한 나를 유난히 챙기며 아끼시던 엄마. 그 가늘고 떨린 기억의 조각들이 따뜻했던 엄마의 추억으로 가슴에 남아있다.

제주로 이사하면서 꽃밭에 몰두했다. 구절초, 버베나, 로즈마리, 라벤더, 수국, 백일홍, 쑥부쟁이 등등……. 보랏빛 야생화에 눈길이 간다. 엄마가 좋아하던 보랏빛을 나도 좋아한다. 머리는 희끗하고 화장기 없는 수수한 얼굴과 손에는 호미가 들려있고 손톱 밑은 거뭇한 흙이 박혀있다. 엄마가 쓰던 낡은 재봉틀로 들들들 바지 단을 박고 소박한 원피스도 만들어본다. 조각 천을 요리조리 이어 붙여 또 다른 무늬와 모양으로 손바느질하는 것을 좋아했다. 자투리 천을 바늘로 한 땀 한 땀 이어붙이며 언제 제모양이 되어 나올지 기대하며 온 정성을 들인다. 작던 크던 그것은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작품이 된다. 그렇게 모자가 되고 가방이 되고 크게는 이불도 되었다. 어느 구석은 바늘땀이 곱고 어느 구석은 얼기설기 지나가고, 완성된 모습이 만족스러울 때도 있고 처음부터 뜯어내 다시 만들고 싶은 것도 있었다. 그렇지만 쏟았던 시간도 정열도 아까워서 못난 내새끼 끌어안듯이 장롱 속에 고이 넣어둔다. 삶도 그렇게 조각 천처럼 소소한 것들이 모여 이어지고 기워져서 나만의 예술품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닐까. 위대하고 멋진 성공만이 역사가 되는 것은 아니니까. 한 사람의 길고 짧은 호흡 과정들이 한 가정을 이루고 또 다음 세대를 향해 삐거덕거리며 걸어간다.

나의 삶 여기저기 엄마의 모습이 퀼트 조각 무늬처럼 아롱다롱 새겨져 있다. 대부분의 딸들은 원하던 그렇지 않던 엄마의 모습을 리폼해서 살아간다. 가끔은 햇볕이 잘 드는 창가에 앉아서 엄마 생의 데쟈뷰를 보는 듯한 착각이 든다. 재봉질하다가, 꽃밭에서, 장독대에서, 빨래를 널다가도 곱고 곱던 울 엄니가 문득 그리워진다.

글 김순례 

<한국산문> 등단수필집마음속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