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철학사산책04] 있음이 있음을 이루지 못하는 그때
[천안철학사산책04] 있음이 있음을 이루지 못하는 그때
  • 천안아산신문
  • 승인 2023.12.13 21:4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천안에서 백년도 더 되는 옛날에 있었던 목천판 동경대전 간행(1883)과 동학농민혁명 세성산전투(1894)를 지역사의 측면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하고 어찌하여 이런 역사적 사건이 천안에서 일어날 수 있었는가를 탐구해보는 것이 천안철학사산책의 기본적인 줄거리다. 동학농민혁명은 호남에서 시작했다고는 하나 사실 전국적으로 번져나가 어느 한 지역의 사건으로 좁혀질 수 없는 한반도 전역의 사건이다. 그 가운데서 세성산전투를 살펴본다는 것은 동학농민혁명의 전개과정에서 천안이 차지하는 지리적 특성을 따져보는 방식으로 가보자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목천판 동경대전 간행의 경우에는 강원도에 은신하고 있던 동학 2대 교조 해월 최시형을 중심으로 그 당시에 곧이어 충청도에 동학을 전파하려고 시도하던 때의 배경과 과정을 살펴보자는 쪽으로 방향잡히기 마련이다.

목천판 동경대전 간행소터를 ‘민족혼의 발상지’라고 평가할 정도라면 목천판 동경대전 간행은 말하자면 ‘민족혼’의 탄생을 일컫는 사건이라고 평가하는 것에 다름아니다. 이를 지역사의 측면에서 다시 조명하자면 한편으로 천안철학사의 사건으로 조명해볼 수 있다. ‘민족혼’의 철학이 천안에서 시작했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꼼꼼히 따져보자는 것이 천안철학사의 목적이 된다 이 말씀이다. 그렇다면 천안은 당시 새로운 철학을 받아들일 수 있는 어느 정도 준비된 지역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동경대전을 간행했다고 그때부터 철학이 시작됐다고 보는 것은 아주 단순한 생각이다. 오히려 반대로 동경대전을 간행할 만큼 천안은 이미 철학이 숙성되어 있었고 그랬기 때문에 그 역사적 사건을 견인해낼 수 있었다고 가정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그렇다면 천안철학사의 출발점을 언제로부터 잡아야 할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천안의 대표적인 역사인물 담헌 홍대용(1731~1783)이다. 그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시피 조선시대 최고의 천문학자이자 실학의 한 갈래인 북학파의 선구자이고 탁월한 사회개혁사상가이다. 그의 철학적 이념을 한 마디로 압축하자면 ‘인물균(人物均)’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인물균’은 사람과 사물이 그 가치가 같다는 뜻을 담고 있다. 평등의 관념을 사람들 사이뿐만 아니라 사물의 세계에까지 적극적으로 넓혀놓은 사상이다. 좀 더 심각하게 말하자면, 성리학적 인본주의를 타파하고 과학적 세계관을 적극적으로 끌어놓은 가히 혁명적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만물평등’의 사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그의 저술『의산문답』(1766)을 천안철학사의 출발점으로 삼아도 전혀 무리가 없을 것같다. 더욱이 ‘인물균’의 평등사상은 동학의 평등사상과 서로 일맥상통하는 면모도 있지 않은가.

곽청창의 부친 곽시징의 옛터를 찾아가는 산책길에서 바라본 병천면 도원리 도원골 입구. 도원정 아래 바위에 우암 송시열의 글씨 ‘백석탄’이 새겨져 있다.
곽청창의 부친 곽시징의 옛터를 찾아가는 산책길에서 바라본 병천면 도원리 도원골 입구. 도원정 아래 바위에 우암 송시열의 글씨 ‘백석탄’이 새겨져 있다.

그런데 나는 이 시점에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홍대용 이전 시기의 천안 역사인물 중 철학사의 관점에서 주목할 인물이 있지 않을까 두루두루 탐색해 보았다. 당연히 홍대용 이전에도 천안에서 활동한 유학자들이 많았다. 물론 따지고 보면 유학도 철학이다. 하지만 앞서도 잠시 언급했듯이 홍대용은 그것을 넘어선 철학을 제시했다. 그의 철학은 지금도 유효한 철학이다. 현재성의 내용을 가지는 철학이다 이 말씀이다. 그러니까 무조건 거슬러 올라가보자는 것이 아니라 홍대용의 철학과도 연결될 수 있는 또다른 철학을 찾아보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하나의 철학적 시작점을 확인해보기에 이르렀다. 물론 나의 관점에서 보는 천안철학사의 출발점이다. 그게 누구냐?

내가 나의 관점에서 제시하고자 하는 천안철학사의 출발점은 바로 곽청창(郭晴窓)이다. 17세기 천안의 유학자 곽시징(1644~1713)의 따님이시고, 김철근(1678~1728)의 부인이시다. 아 이렇게 존칭의 어법을 써드리고 싶은 존경스러운 여성 철학자이시다. 그녀는 남편이 세상을 떠나 느끼게 된 커다란 슬픔을 짧은 한 편의 묘지명으로 남겼는데, 이 묘지명이 얼마나 아름다운 명문인지 많은 유학자들이 높게 평가하고 흠모해 마지않았다. 이 묘지명을 수록한 실학자 정동유(1744~1808)의 『주영편』(1806)이라는 문헌이 그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만큼 나만의 독단은 아닌 것이다. 묘지명이니까 무덤 속에 봉인되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벌써 세상이 다 알 만큼 18세기에 벌써 널리 알려져 있었으니 그 명성은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렇다면 이제 이 묘지명을 내가 어떻게 철학적 텍스트로 읽어냈는지 풀어내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곽청창은 남편의 죽음에 대하여 커다란 안타까움을 품고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공은 나라에서는 강상의 절개를 세우고 집안에서는 백 가지 행실의 근원인 효를 바르게 실천하였으니 이는 천성에 뿌리를 둔 것이라, 공이 바른 자질을 가지고 있다 하겠다. (...) 바른 바탕을 가지고 바른 덕을 지녔으니, 마땅히 장수를 누리고 높은 지위에 오르며 큰 복을 누려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나이는 겨우 쉰을 넘겼고, 지위는 가장 낮은 벼슬도 얻지 못하였으며, 복은 아들을 많이 두지도 못하였다. 이러니 과연 있는데도 그 있는 것을 지니지 못한 것이 아니겠는가?”(이종묵, 『부부』(문학동네, 2011) 273-274쪽)

자질과 덕행이 있었으면 부귀와 행복도 있었어야 하는데 자신의 남편에게는 그렇지 못했음을 따져묻고 애달파 하는 내용이다. 이게 언뜻 신세타령을 하는 듯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은 것이 자신이 살펴본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형이상학적으로 파악한 대목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러니 과연 있는데도 그 있는 것을 지니지 못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 질문은 자질과 덕행의 이상적인 ‘있음’이 부귀와 행복의 현실적인 ‘있음’으로 이어지지 않은 사실을 문제삼고 있으면서 ‘있음’과 ‘있음’의 동어반복을 통해 형이상학적인 질문으로 스스로를 격상시키고 있는 것이다. 질문의 차원이 한 층 높이 올라섬에 따라 다음과 같은 문장이 이어지게 된다.

“이치를 따져보아도 이치가 어찌 이렇게 어긋나는가? 하늘이 어찌 이렇게 뜻을 알기 어려운가? 반드시 헤아릴 수 없는 것이기에 거듭 공을 위하여 애석해하노라.”(같은 책, 274쪽)

이 인용문은 앞서의 인용문에 이어지는 것으로 눈앞에 펼쳐진 사실을 두고 ‘이치’를 따져보고 ‘하늘’의 뜻을 짐작해도 알 수 없는 또다른 무언가가 작용하고 있다는 내용을 담아내고 있다. 즉 ‘헤아릴 수 없는 것’에 대한 철학적 문제의식이 노정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기존의 사유방식으로는 ‘이치’와 ‘하늘’을 통한다면 세상의 작동방식을 무리없이 이해할 수 있었겠지만, 자신이 경험과 체험을 통해서 보는 현실적인 상황에서는 기존의 사유방식이 이상적으로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또다른 사유의 영역, 그러니까 ‘헤아릴 수 없는 것’에 대한 사유방식으로 전환되지 않을 수 없다는 인식이 중요해진다.

그러니까 형이상학적으로 ‘있음’이 ‘있음’을 이루지 못하는 그때 새로운 또다른 철학이 발생되고 그 철학은 ‘헤아릴 수 없는 것’을 향하게 된다. 이상이 깨지고, 이상과 연결되어 있던 현실 역시 깨지며, 이렇게 깨진 현실을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인식이야말로 과거의 철학을 넘어서는 지점이라 할 수 있다. 다시 정리해 말하자면, 있음이 있음을 이루지 못하는 그때 철학은 시작됐다. 이것은 홍대용이 과거의 철학을 극복하고 제시한 새로운 철학과도 상통하는 면이 있기에 그 연원으로서도 가치가 있다고 평가될 수 있다.

곽청창의 부친 곽시징의 옛터를 찾아가는 산책길에서 바라본 병천면 도원리 도원골 입구. 도원정 아래 바위에 우암 송시열의 글씨 ‘백석탄’이 새겨져 있다.
곽청창의 부친 곽시징이 경한정이라는 정자를 지어놓고 강학활동을 했다고 전해지는 병천면 도원리 덕신골 어귀. 하천 상류를 약간 거슬러 올라가면 노은정이 나온다.

결론적으로 나는 곽청창의 남편묘지명(1728)을 천안철학사의 출발점으로 삼아도 전혀 무리가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다. 다시말해 천안철학사는 18세기 초 곽청창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곽청창에 대한 이야기는 아주 소략한 형태로 남아있기는 하지만 여러 모로 그 배경을 살펴본다면 풍성한 또다른 이야기가 엮여나올 것만 같다. 앞으로 차근차근 곽청창 이야기를 풀어가 보기로 한다.

글 송길룡(천안역사문화연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