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철학사산책03] “나라를 바로잡고 백성을 편안하게”
[천안철학사산책03] “나라를 바로잡고 백성을 편안하게”
  • 천안아산신문
  • 승인 2023.12.07 0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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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금 살고있는 동네는 천안시 북면 연춘리다. 이름하여 복구정마을이다. 코로나19 사태가 시작되기 직전인 2019년에 이사 오면서 면밀하게 천안동부지역 답사를 다니자는 원래의 계획이 일거에 물거품이 돼버렸다. 3년 내내 꼼짝없이 방안에 갇혀서 애꿎은 책들만 이리 던지고 저리 던지며 살았다. 누가 이렇게 될 줄 짐작이나 했겠나. 영국의 과학자 뉴튼도 고약한 전염병 페스트가 창궐하는 바람에 별수없이 고향마을에 고립돼 살면서 오히려 고전역학을 완성했다는 이야기가 위로가 될 법하지만 그건 그런 천재들에게나 통하는 신화이고 나 같이 평범한 향토사 연구자에게는 가당치도 않는 망상에 불과하다.

그 극성맞던 세월도 지나가기는 지나가는가 보다. 벌써 마스크 쓰는 습관도 잊어버릴 만큼 코로나19로부터 멀어졌다. 천천히 신발을 신고 언제나 그렇듯이 자연스럽게 문을 열고 나가서 바깥공기를 들이마시면서 걸어가는 일과의 시작이 얼마나 고귀한 일상인지 매일매일 느끼는 요즘이다. 지난 12월2일 아침도 그렇게 시작했다. 위례산에서 흘러내려오는 북면천(지금은 병천천)을 연춘교 다리로 건너서 바로 세성산을 바라보며 둑길을 걸어갔다. 그 옛날 인근지역에서 속속 모여들었던 동학도인들도 추운 아침공기에 몸을 움츠리며 뭔가 마음속으로 주문도 외우면서 종종걸음으로 산을 향해 이 길을 찾아왔을 것이다. 한참 걸어서 화성교차로에서 발길을 꺾어 화성리로 접어들었다. 산책하러 왔느냐고 누군가 물을 것 같지만 사실 산책하는 기분으로 세성산 행사장에 가보려 했던 것이라고 대답해야겠다.

동학농민혁명 세성산전투 희생자 위령탑, 짧게 말해서 세성산 위령탑 주위에는 벌써 행사준비를 하는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행사내용을 알리는 현수막도 벌써 촤악 펼쳐져 걸려있었다. 동학농민혁명 129주년기념 제25회 천안세성산전투 희생자 합동위령제.

지난 11월18일 도올 김용옥 선생이 동행 시민들과 함께 찾아와 참배를 했던 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 가운데 연례행사로 거행해온 위령제가 막 시작했다. 목천판 동경대전 간행의 주역 김은경 접주의 4대손과 5대손이 초헌의 역할을 맡아 첫잔을 올렸다. 그리고 세성산 안자락에 자리잡은 햇살 좋은 동네 화성2리 공달원마을의 어르신들이 아헌으로 그 다음 잔을 올리고 재배했다. 25년 전 위령제가 시작되기 전에는 마을에 음산한 기운과 우울한 소리가 끊이지 않고 흘러다녔다고 했는데 위령제가 이어지고부터는 그것이 감쪽같이 사라졌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이 위령제는 언제나 공달원 마을사람들이 함께하는 행사가 됐다. 예전에는 마을회관에서 점심식사도 하고 즐겁게 대화도 나누는 시간이 있었지만 지금은 퍽 간소해진 것 같다. 그 다음에 종헌의 역할로 이 행사를 주관하고 준비한 동학관련단체와 농민회 지도자분들이 마지막 잔을 올렸다. 그리고 여러 행사참여자들의 추모사가 이어졌다.

12월2일 세성산 위령제에 마련된 동학 깃발
12월2일 세성산 위령제에 마련된 동학 깃발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위령탑 주위에 서있는 장대에서는 그 옛날 동학군들의 구호였던 4글자 깃발들이 펄럭거렸다. (혹시 바람도 별로 없었는데 내 눈에만 그렇게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세성산 전투에 참여한 당시의 동학군은 자료에 따라 작게는 1,500명에서 많게는 3,000명, 또는 4,000명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아무튼 당시에 세성산 능선에는 촘촘하게 동학의 오방색 깃발들이 무수히 꽂혀 있었고 세성산 바깥에서 그 능선을 올려다보면 그 형상이 가히 장관이었다고 한다.

지금 행사장에 우뚝우뚝 서있는 깃발의 4글자들을 소개하면 이렇다. 그 하나는 ‘보국안민(輔國安民)’, 쉽게 풀면 ‘나라를 바로잡고 백성을 편안하게’. 다른 하나는 ‘척양척왜(斥洋斥倭)’, 쉽게 풀면 ‘반외세 반일제 민족자주’. 마지막 하나는 ‘광제창생(廣濟蒼生)’, 쉽게 풀면 ‘민생을 살리고 세상을 구제하라’. 물론 쉽게 풀어 나타낸 말도 깃발 안에 쓰여져 있는 것이다. 혁명에 나서 전쟁에 임한 동학군들의 구호이지만 다시 잘 생각해보면 동학의 사회철학이자 정치철학의 핵심을 나타내는 말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철학이란 책상 앞에 또는 교실 안에 있는 게 아니란 생각이 든다. 사람들의 생동감있는 삶이 펼쳐지는 현장에서 나누게 되는 철학이야말로 진정으로 살아있는 철학이 아니겠는가. 진짜 쓸모가 되는 철학이 아닌가 이 말이다.

이 마당에 도올 선생의 동경대전 번역문으로 ‘보국안민’이 들어있는 구절을 함께 들여다보면 좋을 것 같다.

“지금 대세를 관망하건대 우리나라는 나쁜 질병이 사회 곳곳에 가득차서, 백성들이 사시 하루도 편안할 날이 없으니, 이 또한 상처받아 해가 다가오는 운수이니라. 이에 비하면 서양은 전쟁을 일으키면 반드시 이기고, 공격하면 반드시 취하는 운세를 타고 있으니 성공치 아니하는 일이 없다. 이런 추세로 천하가 다 멸망하게 되면, 입술이 없어지면 이빨이 시렵다는, 곽나라·우나라의 고사와도 같은 탄식이 우리나라에도 닥치게 될 것이다. 이런 정황 속에서 나라를 바로잡고 국민을 편안케 할 수 있는 계책이 과연 어디서 나올 수 있단 말인가!”(도올의 『동경대전 2』94쪽)

지금으로부터 160여년 전인 1860년대 초반에 동학 창시자 수운 최제우 선생이 ‘포덕문’이라는 글 속에 담은 구절이 위의 인용문이다. 본래 한문으로 되어있는 것을 도올 선생이 지금의 우리말로 번역해놓은 것이다. 이 구절에서는 한자 4글자로 되어있는 ‘보국안민’이 우리말 번역어 속에 잘 풀어져서 숨어있다. 어떤 부분이 ‘보국안민’의 풀이말인지 알아볼 수 있겠는가? 아 바로 그렇다. 위 인용문 끝 문장에 “나라를 바로잡고 국민을 편안케 할 수 있는”이라는 표현이 그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160년 전의 탄식이나 지금의 탄식이나 얼추 비슷하게 생각되니 참 귀신이 곡할 노릇이 아닐 수 없다. 혹시 걱정 많은 나만 이렇게 느끼는 걸까? 아이고 모르겠다. 바르고 좋은 철학대로 펼쳐지지 않은 세상은 그저 살기 어려운 세상이라고 생각할 밖에.

12월2일 세성산 위령제를 마치고 기념사진을 찍는 행사참여자들. 목천판 동경대전의 역사적 가치를 알리며 ‘동학농민혁명기념도서관’을 건립하자는 제안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 천안역사문화연구회.
12월2일 세성산 위령제를 마치고 기념사진을 찍는 행사참여자들. 목천판 동경대전의 역사적 가치를 알리며 ‘동학농민혁명기념도서관’을 건립하자는 제안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 천안역사문화연구회.

위령제가 끝나고 행사장 주변을 깨끗하게 정돈하고 삼삼오오 빠져나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도 천천히 걸어서 위령탑 아래 마을길로 내려왔다. 그리고 왔던 그 길을 거슬러 병천천을 따라 둑길을 걸었다. 아침 찬 공기는 점심 들어 약간 냉기가 누그러진 공기로 변해 있었다. 산책이기도 하고 위령이기도 하고 철학이기도 하고 봉기이기도 한 12월2일 하루의 내 발걸음은 그러하였다. 돌아온 복구정마을의 햇살도 따뜻했다.

글 송길룡(천안역사문화연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