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무궁화를 국화로 대접하고 있을까
우리는 무궁화를 국화로 대접하고 있을까
  • 천안아산신문
  • 승인 2023.09.30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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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강아지와 어김없이 아침 산책을 한다.  요즘 아파트 화단에는 배롱나무 꽃이 포도송이처럼 가지마다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꽃이 백일을 간다고 백일홍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이맘때쯤 피는 무궁화도 꽃이 백일동안 핀다는 생각이 미치자 내친김에 아파트에서 무궁화를 찾아보기로 한다. 제법 큰 세대수를 자랑하는 아파트를 한 바퀴 다 돌았는데 무궁화는 한 그루도 보이질 않는다. 내친김에 근처 신안동 행정복지센터까지 갔는데도 무궁화는 한그루도 없다.

짬을 내어 병천으로 향했다. 지난해 광기천 변에 피어 있던 무궁화가 생각이 나 자연스레 발길이 그곳으로 향한다. 분홍색 여린 잎 속에 붉은 단심을 가진 무궁화가 하늘을 향해 고고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다리를 건너니 유관순 열사 사적지 입구와 태극기 주변, 유관순 열사 동상 근처에도 무궁화는 활짝 피어 있었다. 유관순 열사 생가 앞에도 무궁화는 잘 자라 있었다. 역시 호국의 마을답다.

무궁화는 왜 국화가 되었을까

옛 기록에 우리 민족은 무궁화를 고조선 이전부터 하늘나라의 꽃으로 귀하게 여겼고, 신라는 스스로를 무궁화 나라(근화향,槿花鄕)라고 불렀다고 한다. 16세기에는 무궁화를 목근화(木槿花)라고 표기하는데 목근화 → 무긴화 → 무깅화 → 무궁화의 형태로 변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유관순 열사 사적지 무궁화
유관순 열사 사적지 무궁화

갑오개혁 이후 열강들의 이권 다툼 속에서 민족의 자긍심을 높이기 위해 남궁억과 윤치호는 국화의 필요성을 느낀다. 국화를 무궁화로 정한 것은 두 사람에 의해 정해졌다기보다 고조선 시대부터 무궁화를 귀히 여겼고, 마을 골목마다 무궁화를 심었던 우리 민족의 정서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애국가 가사 후렴구에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라는 가사를 보더라도 우리 민족이 무궁화를 얼마나 애정했는지를 알 수 있다.

이후 1945년 광복을 맞고, 1948년 정부가 수립되면서 무궁화는 자연스럽게 우리나라의 국화가 되었다.

유관순열사 생가의 무궁화
유관순열사 생가의 무궁화

일제의 무궁화 탄압

무궁화에 대해 잘못된 상식이 있는데 이것은 일제가 태극기와 무궁화가 우리 민족 정신을 상징한다 여겨 괴담을 퍼뜨렸다. 진딧물이 많이 생긴다고 하여 부스럼꽃, 눈병이 나는 꽃, 꽃이 아름답지 않아 국화의 자격이 없다는 등의 거짓을 만들어 냈다. 또한 무궁화를 캐내고 그 자리에는 벚꽃을 심었다고 한다.

남궁억 선생은 고향이 강원도 홍천 보리울이었다. 선생은 개화파의 한사람으로 교육의 중요성을 알아 60세에 홍천군 모곡리에 국민학교를 설립했다. 그리고 뒤뜰에 무궁화 7만 그루의 묘목을 길러 사람들에게 몰래 나누어주었다. 그러던 중 일제가 그 사실을 알고 남궁억 선생을 체포했으며, 학교는 폐쇄되었고, 무궁화동산은 불을 놓아 없애 버렸다. 일제가 우리 민족의 혼을 말살하기 위해 벌인 정책들은 무궁화에도 예외는 없었다.

예전에는 관공서와 학교에서 의무적으로 심던 무궁화가 도심에서 구경하기가 힘들다. 우리는 과연 고조선부터 귀하게 여기고, 일제강점기의 탄압을 견디고 국화가 된 무궁화를 지금 귀하게 여기고 있는지. 국화로서 격에 맞는 대접을 하고 있는지 돌아볼 일이다. 공원 한편이 아니라 거리 곳곳에 무궁화가 좀 더 많이 심어지는 날을 기대해 본다.

글 김경숙 마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