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하타’ 신문기자 배방읍 유해 발굴지 취재 동행기
‘아카하타’ 신문기자 배방읍 유해 발굴지 취재 동행기
  • 천안아산신문
  • 승인 2018.07.20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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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언론도 관심 두는 민간인학살, 우리는 어떠한가
“일본 일으킨 전쟁이 한반도 분단 계기 만든 것 … 한국전쟁 종전 관련 취재로 더 좋은 한국 만들려는 사람들과 연계 바라”

7월 16일 오전 11시, 아산시 배방읍 중리 설화산 유해 발굴지를 오르는 길은 풀이 무성했다. 금방이라도 삶아버릴 것처럼 더운 날씨였다. 김장호 한국전쟁민간인희생자전국유족회장(이하 유족회장)은 고령에도 불구하고 길을 헤치며 일행을 안내했고, 유해 발굴지를 찾아온 일행은 땀을 쏟으며 쉼 없이 언덕을 올라갔다.

일본 아카하타 신문 쿠리하라 치즈루 기자 김장호 유족회장

일본 아카하타 신문의 쿠리하라 치즈루 기자는 아산의 민간인학살 유해 발굴지 현장을 취재했다. 그와 동행한 기자는 그가 왜 이곳까지 방문 취재했는지 인터뷰했으며, 유해 발굴지에서 다시 만난 김장호 유족회장의 못다 한 이야기를 글로 옮겼다.

민간인학살에 대해

6.25 전쟁 전후 이승만 정권은 ‘빨갱이 처벌’이라는 이름으로 전국 곳곳에서 민간인을 학살했다. 빨갱이에 부역했다는 혐의를 씌운 학살은 민주적이고 합법적인 절차 없이 의심만으로도 자행됐다.

배방 유해 발굴지 현장

민간인학살 추정 장소는 전국 168곳으로, 그중 발굴이 이루어진 것은 단 13곳뿐이다. 아산에도 10곳을 추정한다. 그나마 발굴이 이루어진 배방읍 설화산 폐금광에서는 유해 200여 구가 넘게 나왔다. 유전자 감식 결과 주로 여성들과 노인, 어린아이들의 유해였다. 이렇게 희생된 민간인 수는 전국에서 약 100만 명으로 추정된다.
5월 14일 세종시 추모의 집에 유해를 모시기 위해 열린 안치식에서 유족들은 설움을 삼키듯 울었다. 억울하게 죽어간 부모 형제들의 넋을 보낸 유족들은 다시는 이런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랐다.

“두 살짜리가 무슨 사상과 이념을 알았겠어요?”

김장호 유족회장은 유해발굴 현장에서 쿠리하라 기자에게 설명을 이어갔다. “부역혐의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집단 학살당했어요. 국가가 국민을 무참히 학살했다는 사실은 국가의 수치예요. 사실 해외언론까지 알리고 싶지 않았어요. 이런 역사 창피하잖아요.”

발굴 당시

김 회장이 가족을 찾아야겠다고 결심한 건 노무현 정부 때 일이다. 이때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화위)’가 조직됐고 김 회장은 유족회를 만들고 학살현장을 찾으러 다녔다.
“진화위 보고서가 아산이 가장 늦게 나왔어요. 근데 이명박 정부가 진화위를 없앴잖아요. 활동이 중단됐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이런 사실을 알려야겠다고 용기를 냈어요. 이대로 가면 내 가족과 후손이 똑같은 아픔을 겪을 거 아니에요.”
유족들은 부역 혐의 말고도 또 다른 아픔을 겪으며 살았다. 김 회장은 눈시울을 붉히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가족을 죽이고 일부 남은 가족에게 국가는 철퇴를 가했어요. 마음대로 해외를 못 나가게 하고 공무원도 될 수 없었고 심지어 군 장교로 갈 수 없게 한 ‘연좌제’라는 철퇴로 가둬놨어요. 유족은 신원 조회하면 다 걸렸어요.”

발굴 당시

김 회장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이승만이 6.25를 막지 못하고 총소리가 나니 자기만 살겠다고 도망갔어요. 민간인들이 살기 위해서는 부역을 안 할 수가 없었어요. 근데 두 살짜리가 어찌 사상을 알고 이념을 알았겠어요. 말도 안 되는 거죠. 사실을 정확히 알면 빨갱이라는 소리 못합니다.”
전쟁통은 국민 서로가 반목하게 했다. 특히 이념과 사상의 대립은 형제 같은 이웃을 하루아침에 적으로 만들었다. 한 번 적으로 간주하면 아이도 노인도 이유가 되질 않았다. 그저 무참히 죽여야만 자신이 살 수 있는 지옥 같은 이념전쟁의 잔혹함은 고스란히 국민의 몫이었다.
“국가가 나서서 이 문제를 해결하고 유족에게 진실한 사과를 하고 끝을 내야 해요. 단순한 희생자가 아니고 학살당해 가족을 다 잃은 거예요. 그 철퇴 밑에서 60년 이상을 산 게 억울해요.”


전쟁 일으킨 가해국 일본언론의 역사 바로잡기 노력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사건을 교과서에서 배운 적 없는 세대들은 알지 못했다. 이 사건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또 얼마나 우리 민족을 오랫동안 아프게 만들었는지. 이제 서서히 그 어두운 역사가 드러나고 있고 해외언론에서도 관심 갖고 바라보고 있다.
일본언론과 기자의 동행은 일부분이다. 하지만 일본언론이 한국전쟁의 비극이 빚어낸 아픈 역사의 현장을 찾은 것은 일본 식민지배가 한국전쟁까지 이어지게 했다는 사실인정과 역사를 바로잡겠다는 의지에 대한 분명한 답변이었다.
민간인학살 유해 발굴지를 직접 찾은 일본언론의 모습은 우리의 반성은 어디까지 왔는지 돌아보게 했다. 억울하게 희생당한 유족들을 우리 역시 불신의 눈초리로 바라보지 않았는지, 그들의 아픔을 조금이나마 이해하려고 노력했었는지 돌이켜볼 일이다.

노준희 기자 dooaium@hanmail.net

미니 인터뷰 - 쿠리하라 치즈루 취재기자
아카하타신문, ‘우리는 가해자입니다’ 책 펴내 일제 침략과 식민지배 잔혹사 알려

아카하타 신문의 쿠리하라 치즈루 취재기자는 촛불집회와 위안부 문제 등 한국의 정치 사회문제 취재를 주로 담당했다. 그는 이번 취재 내용이 7월 말 또는 8월 초 아카하타 신문 일간 연재기사 또는 특집판에 실릴 예정이라고 밝혔다.

-. 아카하타신문을 소개해달라

1928년 일본 공산당이 창간한 아카하타 신문은 올해로 90주년을 맞았다. 창간 이후 줄곧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지해 왔으며 일제 식민지배를 비판해온 언론이다. 1931년 3월 1일 발행 신문에서는 3.1운동을 지원하며 식민정책을 취하는 일본 정부에 이의를 제기한 역사가 있다. 일간신문이면서 매주 일요일 특집판을 발행하며 113만에 이르는 유료독자를 확보하고 있다.

-. 이곳 아산까지 취재를 온 이유는

남북정상회담 북미회담 등 한국전쟁 종전에 대해 일본 내 관심은 높다. 그러나 한국의 휴전상태를 모르는 일본인이 많다. 이번 취재는 한국전쟁 종전 관련 취재다. 한국전쟁이 민간인에게 준 영향과 한국인들이 종전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느끼는지 알고 싶었고 더 좋은 한국을 만들려는 사람들과 연계하기 위해서다.

-.민간인학살에 왜 관심이 많나

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한반도 분단의 계기를 만들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민간인학살 외 한국전쟁 전반의 이야기를 일본인에게 알리고 싶다.
 
-. 아카하타 신문은 일본이 전쟁에서 가해한 부분에 취재를 많이 했다고 들었는데, 이유는

일본이 침략전쟁으로 다른 나라 사람들을 죽인 부분을 직면해야 아시아 나라들의 신뢰를 받는 나라가 될 수 있다. 일본에서도 원폭과 공습 피해 희생자들을 알리며 전쟁 자체를 비판 보도하고 있다.

-. 아카하타 신문이 ‘우리는 가해자입니다’라는 책을 펴냈던데

한·일 간 역사 문제 해결을 위해 바른 역사를 알리는 작업의 하나로 펴낸 책이다. 일제 침략과 식민지배의 잔혹사를 엮었다. 내가 직접 취재한 내용도 들어있다.

-. 이번 취재를 마친 소감은

용기를 내 사건을 고발해준 김장호 회장과 유족에게 경의를 표한다. 고발을 통해 다음 세대가 같은 경험을 하는 걸 막고 싶었다는 김 회장의 말에 감동했다. 어느 나라 전쟁도 피해를 본 건 일반 시민과 아이들 여성 노인이었다. 전쟁을 증오하는 마음은 똑같다는 것을 실감했다. 많은 분과 협조해 전쟁을 없앨 수 있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