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다니던 길에 깃든 새로움 ‘근대화의 길’
매일 다니던 길에 깃든 새로움 ‘근대화의 길’
  • 천안아산신문
  • 승인 2017.11.20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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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며가며 보던 풍경이 새삼스러워지는 가을날의 걷기

가늘 하늘 공활한데 높고 구름 없다 했다. 딱 어울리는 하늘이다. 그 아래 산과 나무는 제대로 물올랐다. 가을은 산이고 마을이고 길가 가로수까지 색색으로 물들여 놓았다. 온 기운을 다 쏟아내어 가을색을 들여 놓았으니 이제 곧 파삭, 부스러질 시간도 가깝겠지. ‘오늘을 보내면 또 한 번의 가을을 기억 속에 묻겠구나’ 싶어 아쉬움이 살짝 다가온 하루였다.
그동안 도솔 둘레길은 천안을 둘러싸고 있어 수많은 역사적 흔적을 담아낸 산을 꾹꾹 밟으며 걸었다. 반면, 11월부터 3개월은 천안을 가로질러 곳곳을 걷는 구간이다. 내가 살고 있는 동네, 어쩌면 차를 타고 빠르게 지나가느라 눈길 한 번 제대로 둘 틈 없었던 곳곳을 찬찬히 바라볼 시간이다.
11월은 망향의 동산 버스정류장에서 출발해 백석동 현대아파트까지 구간이다. 이름 하여 ‘근대화의 길’. ‘천안 사랑 뽈레 뽈레 도솔 둘레길 걷기(이하 도솔 둘레길)’ 구간을 정리한 한마음고등학교 구자명 교장이 붙인 이름이다. 망향의 동산(석교리)에서 시작해 망향휴게소 - 요방1리 - 국사봉 - 천안IC 전망대 - 두정동 공단 - 두정역 - 두정동 선사유적지 - 노태산을 거쳐 백석동 현대아파트에서 맺는 계획이다.

외나무다리와 지하도로를 걷는 참가자들. 길 끝엔 놀라운 장소가 기다린다.
외나무다리와 지하도로를 걷는 참가자들.
길 끝엔 놀라운 장소가 기다린다.

외나무다리와 지하도로만 건넜을 뿐인데… =

쌀쌀한 바람이 제법이었다. 하늘이 이렇게 파란데, 태양이 저렇게 강렬한데 어물쩍 믿었던 마음은 모이는 장소에 도착하자마자 흔들렸다. 11월의 바람은 차가운 미소로 반겼다.
11월 11일 진행한 도솔 둘레길은 망향의 동산 앞 버스정류장에서 시작했다. 이곳에서 출발해 도착할 곳은 백석동 현대아파트. 상상컨대 천안시내를 가로지르는 모양새라 어떻게 걷게 될 지 궁금함이 컸다. 그 궁금함은 텔레포트라도 한듯 상상도 못한 공간에 서고 나서야 해소했다.
망향의 동산 앞 버스정류장에서 횡단보도를 건너 길로 접어들 때까지도,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외나무다리를 건너고 지하도로를 지날 때까지도 이 길이 어디에 연결되나 떠올릴 수 없었다. 그런데, 지하도로에서 나오자마자 눈앞에 펼쳐진 곳은 망향의동산 휴게소. 상상 못한 장소에 들어선 참가자들의 얼굴에는 모두 개구쟁이 같은 미소가 번졌다. 도솔 둘레길을 걸은 사람만이 아는, 누구도 모르는 길을 알게 된 재미가 또 하나 쌓였다.
망향의동산 휴게소 뒤로 가면 곧 한적한 시골마을이 펼쳐진다. 좀 전까지만 해도 먼 길 오가는 설렘과 피곤함이 뒤석이던 휴게소였는데, 그 뒷길에 자리한 요방1리 마을은 그지없이 고요하다. 이방인들 출현에 집집마다 개들이 목청껏 소리를 합해 소란했지만, 김장 앞두고 배추 뽑는 동네 아주머니의 모습 앞에서는 그마저도 평온하다.

국사봉
국사봉

마을 사람들 산책하며 오가는 정겨운 ‘국사봉’ =

11월 도솔 둘레길은 산책길이라고 하면 가장 어울릴 구간이다. 지금까지 중 가장 둘레길 같다고나 할까. 오르기보다 타박타박 걸으며 계절을 느끼고 곳곳을 눈에 담기 좋았다. 숨소리 한 번 거칠어질 틈이 없었다.
어느 정도 걸어 처음 도달한 곳은 국사봉이다. 하지만, 사실 누가 국사봉이라고 알려주지 않았다면 그냥 스쳐지나갔을 지도 모른다. 눈에 띄는 표지판이 없고 그 앞에 가까이 다가가야 볼 수 있는, 어느 개인이 세워놓은 자그마한 표지가 전부다. 물론, 국사봉은 흔한 명칭이다. 전국 2137개 산봉우리 중 138곳 봉우리가 국사봉이라 불리고 있을 만큼이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이런 취급을 받고 있을 줄이야…. 오가는 길의 안내와 표지판이 아쉬웠다.
곧 이어 걸음을 이어나가는 동안 동네 주민들을 곧잘 만나게 되는 걸 보니 주민들에게 사랑 받는 산책길은 분명한가 보다. 그 중 만나게 된 어르신 한 분. 여든은 훌쩍 넘은 듯한 연세인데도 온간 연장을 동원해 쓰러진 나무들을 자르고 치워내며 길을 만들고 있다. 부인과 함께 오가고 싶은데 길의 상태가 좋지 않아 직접 나서서 치우고 있노라는 한 마디. 보다 못한 개인이 나서야 문제가 개선되고 해결됨을 이 길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다. 어느 한 개인을 위함은 아니다. 시민들의 편안한 일상을 위한 행정의 관심은 사소한 것에서 시작한다. 부인을 생각하는 속 깊은 어르신의 마음과 애쓰신 시간 덕에 이후 참가자들의 걸음이 먼저 편안해졌으니 감사할 따름이다.

켜켜이 쌓인 낙엽이 전하는 바스락 바스락 소리 =

국사봉을 뒤로 하고 내내 가을이 잔뜩 든 동산을 걸었다. 걷는 동안 구자명 교장이 찾아냈다는 일명 ‘천안IC 전망대’를 들러 이야기를 듣고, 그 다음 향하는 곳은 천안 최초로 공단이 조성되었던 두정동 공단이다. 지금 천안엔 백석 직산 등에 많은 공장이 들어서 있고 5산단까지 조성해 공장들을 유치하고 있지만, 그 처음은 1980년대 두정동에 조성된 천안1공단이다. 지금은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주거지역으로 발달하고 있다. 걷는 동안 그 옛날 충남방적에 얽힌 이야기를 나누는 참가자들은 오래 전의 추억과 그 시절의 사람들을 되짚는다.
두정동 공단에서 나오면 바로 두정역이다. 원래 예정대로라면 이어 선사유적지와 노태산을 거쳐 백석동 현대아파트까지 가는 것이 이날의 일정이었으나 도솔 둘레길을 진행한 11일은 마침, 친일 문제 연구의 선구자인 역사학자 임종국 선생의 28주기 추모식이 있던 날. 모두 함께 추모식에 참가하기로 하고 신부공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가기로 한 구간을 모두 걷지 못한다고 해서 아쉬움은 없었다. 한 달 후 다가온 12월 도솔 둘레길은 오늘 멈춘 지점에서 다시 시작해 이어나갈 것이기 때문. 12월의 도솔 둘레산 걷기는 두정동 선사유적지 - 노태산 - 백석동 현대아파트를 거쳐 봉서산 - 불당동 선사유적지 - 쌍용도서관 - 월봉산 - 쌍용고 - 삼일원앙A - 용곡중학교까지 이어진다. 함께하는 걸음이 있어 못 다한 이야기는 다시, 또 이어진다.

김나영 리포터 naymoon@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