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봄바람이
그 봄바람이
  • 천안아산신문
  • 승인 2023.03.20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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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 대 태반이 백수라는, 이태백이 넘쳐나는 세상에 오랫동안 백수인 내가 일할 곳이 어디 있을까. 고민 끝에 공인중개사 학원에 등록했다. 난도 높은 강의라 하여 시간 전에 와서 강의실 앞자리에 앉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오른쪽 끝자리에 칠판을 사선으로 하고 앉았다. 칠판 글씨는 일부분만 눈에 들어왔다. 일주일을 엄부렁하게 보내고 이주 째, 꽉 찬 강의실 한가운데 여자 혼자 앉아 있었다. 나보다 몇 살 적어 보이는 여자는 공부의 달인 같았다. 책상 한편에 필기구를 쌓아놓고 시선을 고정한 채 열심이었다. 나는 마땅한 자리가 없어 그녀 옆에 앉았다. 마지못해 필기구를 옮겨주는데 왠지 온도 차가 느껴졌다.

여자는 왼쪽으로 얼굴을 돌리며 외면하더니 나를 안 보려는 듯 고개를 더 돌렸다. 기분도 나쁘고 신경도 쓰이고 그대로 있기에는 멋쩍어서“저기요? 왜 그러세요?” 그 여자 왈, “냄새가 나요.” “제가요? 제가 개를 키우는데 그래서인가 봐요.” 얼떨결에 그렇게 말했지만, 그럴 리 없었다. 개와 함께 사는 사람을 이해 못 한다는 듯 여자는 아예 나의 반대쪽으로 몸까지 돌아갔다. 웬만하면 잘 참을 것 같은 펑퍼짐한 체구에 동글동글한 생김새와는 다르게 코를 움켜쥐며 심각하게 괴로워했다.

아침에 샤워까지 하고 왔는데 무슨 냄새가 난다는 걸까? 누구보다 냄새에 예민한 나한테 냄새가 난다니 망신살이 뻗친 건가? 건망증이 심해 불이 날 뻔했던 일도 냄새 잘 맡는 덕에 모면했었다.

“근데 무슨 냄새가 난다는 거예요? 비린내가 난다고요?” 헐,~이게 무슨 일인가? 앞사람 뒷사람이 나를 쳐다보았다. 내 옷에 똥이라도 묻은 양 행동하는 그녀가 미웠다. 냄새가 나면 또 얼마나 나겠냐 싶기도 했다. 빽빽한 의자와 의자 사이가 좁아서 큰 가방을 끌고 나가기도 어려워 쉬는 시간까지 앉아 있자니 가시방석이었다. 강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개 코가 강력한 개 코를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나 자신도 워낙 냄새에 민감하기에 정중히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쉬는 시간에 나갈 테니 조금만 참아달라고 부탁했다. 10분의 휴식이 주어졌고 사람들은 우르르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내가 나오자 그 여자 구성원 몇 명이 소곤대며 나를 쳐다보았다. 마치 그들의 안줏거리가 된 성싶었다. 가방을 끌고 엘리베이터 문을 나왔다. 뒤통수가 따가웠지만, 별일을 다 보겠네! 누가 뭐래도 나는 청결해, 애써 찝찝한 마음을 달래려 "봄, 봄, 봄, 봄이 왔네요. 그대가 앉아 있었던 그때 그 향기 그대로" 귀에 익은 로이킴 노래 한 줄을 흥얼거렸다. 그러자 봄바람이 살랑살랑 블라우스 자락을 흔들었다. 순간 내 몸에서 비린내가 훅 풍겨왔다.

아차, 생각났다. 아침에 샤워하면서 온몸에 달걀노른자로 맥질을 했던 것이, 그랬구나! 달걀 비린내가 이토록 심한 줄이야. 비누로 씻어냈으니 냄새가 나리라는 생각은 못 했다. 바쁘게 바르는 동안 내 코는 이미 달걀 비린내가 배어서 둔감해진 것이다.

그동안 로션 하나 바르는 것도 게으른 내가 봄바람이 불었는지 가끔 얼굴에 팩을 하는 중이었다. 모 방송프로에서 보고 응용한 마사지였다. 밀감껍질을 말린 뒤 분쇄기에 갈아서 걸쭉한 요구르트에 버무려 얼굴과 몸에 펴 바르고 씻어내면 피부가 부드럽고 매끄러웠다. 밀감껍질에는 과육보다 비타민C가 무려 4배나 더 들어 있고 향기 성분인 정유도 풍부하다고 한다. 밀감껍질과 요구르트는 배합이 잘 맞았다. 그런데 그날 아침엔 요구르트는 없고 금 간 달걀이 눈에 들어왔다. 맑은 이슬이 배어 나온 두 개의 달걀을 보고 마침 잘됐다. 싶어 준비한 과일 가루에 섞어 마사지한 것이 사단 냈다.

예뻐지려고 안 하던 짓 한번 했다가 정말 우습게 됐다. 미끄러진 김에 쉬어간다고 달걀노른자 마사지법 조금만 알고 가기로 하자.

달걀노른자로 마사지하면 모공을 좁혀주는데 한마디로 피부를 탄력 있게 만들어준다. 비린내는 바닐라 기름을 넣어 잡는다. 또한 달걀노른자와 와인을 비슷한 양으로 섞어서 마사지해도 부드러운 피부를 유지 할 수 있다. 오이를 갈아 즙을 낸 다음 노른자를 잘 섞어서 얼굴에 골고루 바르고 40~50분 후 따뜻한 수건으로 닦아내는 것도 좋은 마사지법이다.

터덜터덜 가방을 끌고 24시 여성 사우나로 향했다. 비린내를 없애려고 한증막에서 물을 마시며 땀을 내고 비누질을 반복했다. 강의도 빠진 채 말끔히 사우나를 마치고 집으로 오면서도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싶었으나 어설픈 내 행동이 불러온 결과라는 결론을 내렸다.

살아오면서 아무 생각 없이 냄새난다고 얼마나 많이 코를 쥐었던가. 얼마나 많이 눈살을 찌푸렸던가. 지난날 나의 예민한 행동들이 스쳐 갔다. 모든 것은 우연이 아니라 돌고 돌아서 부메랑으로 돌아오는 법, 내가 알지 못한 일도 있었을 거라고, 상대에게 무심코 무안을 준 적이 있었나를 뒤돌아본다.

이제 달걀 마사지는 신중히 해야 하겠다. 두루뭉술 짹소리 한번 안 내지만 내게 경각심을 주었다.

글 김지현

숭의여자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2014한국산문수필 신인상 수상, 2018년 캐나다 한카 문학상 수상, 2017문학의오늘앤솔로지로 작품 활동 시작

한국산문 작가협회 회원, 시 산맥 특별회원, 시집 <선홍빛 서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