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왕자산
천안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왕자산
  • 천안아산신문
  • 승인 2017.11.15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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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거진 숲과 오솔길, 그리고 그 끝에 잠든 아픈 역사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한 곳이다. 천안의 진산이라는 이야기는 익히 들었지만, 태조산 태학산 광덕산 등에 비해 딱히 관심을 두진 않았다. 하지만, 이제야 발자국을 찍었다는 것이 얼마나 아까웠는지 모른다. 천안에 터를 잡고 산 지 이십년 가까이 되어서야 비로소 만나 한눈에 반한 왕자산을 걷는 내내 떠나지 않은 생각이다.

8월 12일 진행한 도솔 둘레길은 왕자산이다. 찾는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아 고즈넉해 한여름 우거진 숲 사이 오솔길을 걷는 호사를 누린 시간이었다. 계성군과 숙의 하씨의 이야기를 품고 하늘까지 뻗은 전나무숲의 시원한 바람을 건네주는 걷기의 끝에는 우리의 아픈 역사가 잠들어 있었다.

이날 걸은 구간은 상명대 입구에서 출발해 왕자산 - 망향봉 갈림길 - 문암저수지 전망대 - 망향봉 - 망향의 동산이었다. 8월 도솔 둘레길은 특히 광복절을 기념해 망향의 동산에 잠드신 김학순 할머니 묘소 참배로 마무리 지었다.

한여름의 숲이 있는 힘껏 전하는 진한 여름 =

8월은 여름의 절정. 그렇지 않아도 위협적인 폭염이 계속되는 중이었다. 맞으면 아플 것 같은 엄청난 비가 전날 한바탕 위세를 선보인지라 하늘은 아침부터 쾌청. 이날이야말로 숨 턱턱 막힐 진한 여름을 각오해야 하는 터였다.

출발 전 이날 오르는 왕자산 구간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 있고 곧 걷기를 시작했다. 상명대 다리 옆의 작은 길이 오늘 걷기의 시작점. 항상 지나다니던 길이었음에도 전혀 발견하지 못한 진입로다.

그다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길은 아니어서인지 주변은 한적했고, 오직 매미와 새가 내내 목청을 높였다. 전날 내린 비로 어느 정도 젖고, 아침부터 내리쬔 볕으로 어느 정도 마른 땅은 쿠션감이 상당히 좋아 한여름 더위에도 발걸음은 경쾌했다. 한 명씩 걸어가야 할 법한 오솔길로 이어지는 구간에 가득 들어찬 진한 여름을 느끼며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었다.

이윽고 올라선 왕자산 정상. 천안의 곳곳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특히 전날 내린 비로 하늘이 맑게 씻겨나간 탓인지 멀리까지 탁 트인 전망이 제법이라, 펼쳐놓은 지도 확인하듯 천안의 곳곳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점점 높아져가는 기온과 뙤약볕을 감수하고 오른 보람이 느껴지는 순간.

산이 주는 선물은 이뿐만이 아니다. 조금 더 걸어가다 보면 하늘 끝까지 오르고야 말겠노라는 전나무들이 모인 전혀 다른 세상인 듯한 공간이 펼쳐진다. 뒤이어 바깥 더운 공기를 싹 베어낸 듯한 시원한 바람과 나무들이 전하는 푸릇한 냄새가 휴식을 전한다. 더위에 허덕이던 몸이기에 시원함은 갑절. 몇 시간 후면 한기가 들 것 같은 신기함 마저 드니 이대로 한동안 머물고픈 마음만 가득하다.

아쉬운 것은 산을 찾는 이들을 위한 제대로 된 안내가 마련되어 있지는 않다는 점. 그동안 걸었던 구간은 지금 가는 곳이 어디쯤인지, 어느 곳으로 가야 제대로 길잡이를 하는 것인지 중간 중간 확인할 수 있었지만, 왕자산은 달랐다. 많이 오간 사람의 안내가 아니고서야 어디가 맞는 길인지 알아낼 수 없을 만큼 안내는 거의 없었다. 절경임에 분명해 어디에고 자랑할 만한 전나무숲도 설명을 듣고서야 멈춰서 하늘 끝을 바라볼 수 있었기에 한 참가자는 “나중에 혼자서 오면 이 길을 찾아 올 수 있을까”라는 말로 아쉬움을 토로했다. 이 좋은 공간을 많은 이들이 오가고 아끼며 볼 수 있으려면 방안 마련이 필요하다는 것에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구간으로 발길을 옮겼다.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아픈 역사를 깨닫는 시간 =

시원한 바람을 가득 맞은 후 다시 걷기의 시작. 한동안의 걸음 후 발견한 것은 계성군과 숙의 하씨의 묘를 알리는 표식이다. 계성군과 숙의 하씨의 묘소가 지역에 있음은 부끄럽게도 이날 처음 알게 된 이야기. 계성군은 성종의 둘째 아들로 연산군의 이복동생이자 중종의 이복형. 숙의 하씨는 영의정 하연의 딸로 성종의 후궁이자 계성군의 어머니다. 이 둘의 묘소는 왕자산에, 엄밀히 말하자면 왕자산과 성거산이 이어지는 곳에 자리했다. 경기도 시흥군에 묘소가 있었으나, 1971년 서울특별시의 도시 확장 계획으로 지금의 자리에 이장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부끄러움은 뒤이어 또 한 번, 진하게 다가왔다. 구간의 마지막인 망향의 동산에 잠든 김학순 할머니의 묘소를 찾으면서였다. 김학순 할머니는 1991년 8월 14일, 최초로 본인이 ‘위안부’임을 밝혀 일제의 만행과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한 계기를 마련한 분이다. 1997년 별세하신 후 망향의 동산에 잠들어 계신다. 8월 14일은 현재 ‘세계 위안부의 날’로 지정되어 있다.

하지만, 정작 묘소를 찾은 것은 이날이 처음. 이곳에 잠드셨다는 것을 모르는 이도 상당할 것이라는 것에 마음이 아렸다. 그나마 죄송함이 덜어진 것은 이미 묘소를 찾은 이들이 남긴 하얀 국화의 흔적 때문. 잊지 않고, 우리 세대에서 반드시 역사를 바로잡아야 죄송함을 씻겠노라는 마음이 담겼음을 알기 때문이다.

뜨거웠던 2017년 8월의 어느 하루는 그렇게 부끄러움과 죄송함, 다짐으로 채워졌다. 내 고장 만나기가 하루하루 쌓일수록 그래서 의미도 쌓인다. 9월에는 또 어떤 이야기가 새로운 마음을 일깨울까. 9월의 도솔 둘레길 걷기는 태학산에서 이어간다.

김나영 리포터 naymoon@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