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인터뷰 -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에 대한 기록, 영화 '해원' 구자환 감독
집중인터뷰 -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에 대한 기록, 영화 '해원' 구자환 감독
  • 천안아산신문
  • 승인 2018.06.22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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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인 학살 매장지 168개소 파악 … 제대로 알고 기억하는 것 중요”
인디플러스 천안서 25일(월) 오후 7시 공동체상영회 진행

참혹 그 자체였다. 눈앞에 고스란히 드러난 현실에 사람들은 모두 말문을 잃었다.
아산시 배방읍 설화산 폐금광 인근은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 매장지로 파악된 곳이다.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이 2월 22일부터 40일간 발굴을 진행해 수습한 유해는 208구. 비녀 90여개와 구슬, 장난감 등도 함께 발견됐다. 수많은 부녀자와 아이들이 학살을 피하지 못했음을 알리는 유품이었다.
아산에서만 있었던 일일까. “1945년 해방 이후부터 한국전쟁기까지 대한민국 곳곳에서 민간인 학살이 자행됐습니다. 진실화해위원회가 파악한 매장지만 168개소로, 미처 파악하지 못한 곳도 분명 있을 겁니다. 그중 현재까지 13개소에서만 발굴이 진행된 상태지요.” 구자환 감독의 설명이다.
구자환 감독은 전국 곳곳을 취재해 수집한 민간인 학살사건에 대한 기록을 영화 <해원>에 담았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6월 25일(월) 오후 7시 인디플러스 천안에서 <해원> 공동체상영회가 열린다. 여전히 땅속 깊은 곳에 파묻혀 있는 현실을 영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촬영 현장에서 구자환 감독 <출처 금정굴인권평화재단>

민간인 학살사건과 영화 <해원>에 대한 이야기를 구자환 감독과 나누었다.

민간인 학살사건에 대한 영화를 제작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

줄곧 생각해왔지만 막상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었는데, 2005년 10월 박근혜 정부가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국회에서 통과시킨 것이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불과 70년 전 일어난 100만 민간인 학살사건조차 자국민에게 알리지 않은 국가가 급기야 역사를 입맛에 맞게 서술하겠다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

<해원> 이전에 <레드 툼>을 제작했는데 두 작품을 설명한다면

2013년 발표한 <레드 툼>은 민간인 학살사건의 한 유형인 ‘국민보도연맹사건’만을 소재로 했고, 제작비 문제로 경남지역에서 발생한 사건만 다뤘다. 국민보도연맹사건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직후 수만 명 이상 국민보도연맹원이 학살된 사건이다. 군과 경찰이 국민을 학살한 것으로, 민간인 학살사건에서 가장 큰 규모다.
<해원>은 1945년 해방 이후 시점부터 한국전쟁기까지 발생한 대한민국 곳곳 전체의 민간인 학살사건을 다루고 있다.

<레드툼> 상영 당시와 <해원>을 상영하는 지금 달라진 점이 있나

아산에서 발굴된 유해

<레드 툼>은 국가가 숨겨온 민간인 학살사건을 공개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됐다. 이후 민간인 학살사건을 조사한 연구문헌이 제법 나왔다. 영화진흥위원회 스코어 2700여명, 유튜브 13만여 명이 관람했고, 개봉 후 영화 파일을 공개해 2000회 이상 다운로드가 있었다. 현재, 유튜브에서 (알 수 없는 이유로)영화를 삭제해 ‘비메오’에서 볼 수 있다. 최근 개봉한 <해원>은 영진위 스코어 1340명이 보았다.
관객의 반응은 대체로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었나’ ‘왜 우리는 이 사실을 지금도 모르고 있나’ 등이다. 이유도 모른 채 죽어간 수많은 이들의 죽음 앞에 말을 잇지 못한다.
아쉬운 부분은 여전히 단편적인 정보여서 민간인 학살이 국민보도연맹에 한정되어 알려지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민간인 학살문제가 사회적으로 알려지거나 부각되지도 않고 있다. 방송과 기사를 통해 간간히 개별사건을 소개하지만, 대중들은 여전히 전체 사건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올 초 아산에서 진행한 발굴현장도 직접 확인했는데, 그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여러 발굴현장을 다녀보았지만 아산처럼 끔찍한 학살 현장은 처음 보았다. 피해자 80% 이상이 20대 전후 기혼여성이었다. 어린 자녀와 함께 집단 학살당하고 불태워졌다. 심지어 2~3세 아이 유골까지 나왔다. 인민군 점령기 3개월 동안 부역을 했다는 이유로 가족단위로 학살당했다. 부역자 학살의 처참함이 드러난 것이다. 그들이 설사 부역을 했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아이를 데리고 있는 엄마를, 어린 아이를 죽일 수 있나.

천안에서는 움직임이 없는데, 민간인 학살이 없었던 건가

시·군 단위로 보면 학살이 없었던 지역을 찾는 것이 더 어렵다. 노무현 정부 당시 활동했던 진실화해위원회 조사 기록을 보면 천안에서도 부역자 학살사건이 있었다. 아산 학살과 비슷한 서울 수복 이후 시점인 1950년 10월과 11월 사이에 발생했다. 피해 장소는 군동리 금광구덩이 등인데, 이곳에서만 200여명이 직산지서 경찰에 의해 학살된 것으로 나온다.
국민보도연맹사건도 있었는데, 주목할 것은 현재까지 주동자급 몇 명 외 피해자는 없는 것으로 조사됐다는 부분이다. 천안경찰서 유치장에 보도연맹원 50여명이 갇혀 있었는데, 당시 김종대 경찰서장이 풀어주어서 살아났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볼 때 억울한 죽음을 방지한 김종대 서장의 공덕비를 세웠으면 한다. 당시 보도연맹원을 풀어주는 일은 자신의 목숨을 걸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 일로 인해 인민군 점령기에 우익인사에 대한 보복학살이 적었다는 분석도 나온다. 

   

앞으로 해결해야 하고, 또 필요한 부분은

미신고자들이 더 많고, 가족단위로 학살당한 세대는 드러나지 않고 있다. 피해사실을 숨기고 살아가는 유족도 많다. 여전히 70년 전 민간인 학살사건이 해결되지 않고 있는 상태다. 그러나 더 늦어지면 당시를 증언해줄 이들이 점점 더 없어질 것이다. 하루라도 빨리 진행해야 하는 부분이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필연적으로 반복된다. 인권이 강조되고 생명의 소중함이 각인된 국가에선 어떤 정권도 국민을 학살하지 못한다. 과거 자행된 학살사건이 오히려 정권을 유지하고 운용하는데 도움이 되었기 때문에 반복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민간인 학살사건을 제대로 알고 기억하고 해결하려는 의지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 이 일은 당시 국가폭력에 피해를 당한 100만 원혼을 달래는 동시에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완성하는 일이다.

 

25일 있을 <해원> 공동체상영회를 앞두고 천안·아산시민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는

아산에서 처참한 학살현장이 공개되었지만, 사회적 파장과 시민의 관심이 크지 않았다. 어쩌면 팍팍한 현실에서 과거의 어두운 역사에 관심 기울일 여유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내 나라의 근현대사, 지역에서 발생한 억울한 죽음에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좋겠다. 역사를 아는 것만으로도 피해자와 유족의 피맺힌 한을 풀어줄 수 있다. 이것이 현재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일이자 유일한 행동이다.

김나영 기자 namoon@canew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