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해방일지 촬영지 ‘성환역’
나의 해방일지 촬영지 ‘성환역’
  • 천안아산신문
  • 승인 2023.08.23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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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환역에서 당신을 만나고 싶어요

대한민국이 해방됐을 때 우리 국민들도 해방됐나요. 진정한 복지는 해방됨에서 시작된다는 걸, 우리가 아직도 독립과 해방의 문으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는 걸, 드라마를 보고서야 깨달았어요. 신민과 조센징 따위로 사람의 등급을 매기더니, 요즘은 인서울 아니면 견딜 수 없이 촌스럽다느니 끔찍하게 미개하다느니 너나없이 생각하면서 살고 있잖아요. 일본인들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서로를, 아직도!

“끼리끼리는 과학인데!” 노른자 땅에서 사는 서울특별 시민과는 다르다는 정도가 아니라 틀리다는 낙인이 된 경기도민으로서의 장벽. 그 장애감은 전철(지하철 아님 주의)에 실려 경기도를 넘어서자마자 닿는 성환역에서 도시를 싹 다 훑어 들어옵니다. 낙인의 고통이 없으면 살 거 같지만 경기도를 넘어선 충남의 노른자 땅 천안까지, 선긋기는 아산 신창역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게서 멈추지 않고 마치 ‘밑’이라는 듯 이 비아냥거림들은 지방도로를 따라 아랫녘으로 흘러갑니다.

그치만 멈추거든요, 한정된 곳에서는, 무한한 곳으로의 출구가 열리게 마련이거든요. 자기를 깨야 하는 정점에 이르렀을 때 ‘내리라구!’ 하는 소리를 듣게 되거든요. 당미역에서 내린 사람 구씨에게 열린 것처럼, 애정하는 집으로 가는 출구가 준비된 채 우리 모두를 기다리고 있거든요. 이제 그만 내려야 할 때를 알려주는 사람과 그 소릴 알아듣는 사람이 그렇게 당미역(堂尾驛)에서 만나거든요. 만나서, 더 이상 꽁무니에 뭘 감추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그 사람 전부를 그냥 사랑하거든요.

그 당미역 촬영지가 천안 성환역이라는 걸 본방 땐 몰랐습니다. 천안서 산지 30년이 되었지만 한 번도 이 곳에서 전철을 타거나 내린 적 없거든요. 초록색 아치형 지붕이 꽃잎처럼 펼쳐지는 성환역사를 이제야 처음 봤어요. 계단 내려와서 밖으로 나갔더니 오른쪽 한시 방향과 왼쪽 열한시 방향에 구씨와 미정이 연애하던 곳들이 있었어요.

<moon Toast Coffee> 운영 10년이 된 요즘에서야 황문순 대표는 ‘비로소 평안’을 얻은 게 가장 큰 소득이었다 합니다. 마침 시원한 차를 마시며 쉬던 20대 청년 셋 중 한 명은 드라마 촬영 당시 흡연장에서 손석구와 마주쳤고, 황 대표님을 대신해 아들이 함께 사진을 찍었답니다. “손석구씨는 참 싸가지 없을 것 같은 외모와 달리 품이 정말 큰 사람이었어요.” 황 대표는 자신의 아들에게 싸인해 준 손석구의 ‘윤정원 사랑해요 정말!!’ 이라는 문구에서 그의 너른 가슴을 느꼈다 하시네요.

카페 맞은편에는 유복순 점장이 15년째 분식 장사를 하시구요. 그 오른쪽 PLUS슈퍼도 아흔 넘으신 할머니와 할아버지께서 광천상회를 하시던 때부터 간판을 몇 번 바꿔 70년 넘게 가족들이 가게를 운영해왔고, 제가 들른 때에는 편의점식으로 운영 중인 슈퍼에 30대로 보이는 손녀가 있었어요.

이 가게들은 ‘나의 해방일지’ 스텝들이 드라마를 촬영하던 그 즈음 며칠 장사특수를 누렸다 합니다. 촬영지가 이름을 날리게 되면 돈을 더 많이 만지게 될 터인데, 정작 이곳에서 유일하게 입소문을 타서 전국각지로부터 단골이 생기기 시작한 카페지기 문순씨는 유명해지는 걸 꺼립니다. 서울에서 공연 중인 손석구의 연극을 매회 관람할 정도의 극성팬들은 이 카페에서 정모를 하기도 하니까, 북적거리는 재미가 있는데도 말입니다. 옛날 같지 않아서 알바생을 둘 형편은 안 되는데 느닷없이 손석구 추앙 팬들이 몰려오면 난감해서, 허둥거리지 않아도 될 정도로만 찾아오셔서 ‘세~상 평안한’ 카페지기로서 손님들을 대접하고 싶다 십니다.

그녀처럼 우리는, 근본적인 존재와 동떨어져서 길을 잃은 것까지는 아닌 거죠. 다만 뭘 그렇게 사냥해야 하는 것처럼, 굶주린 것처럼 과속하고 있는 거죠, 이 속도가 공포스러워서 미처 가족과 옆 사람을 쳐다볼 여력조차 잃은 채. 곧 탈선할 거 같고 머리칸에서 끊어져 숨마저 끊어질 거 같으니까요. 하지만, 사실은 먹히기 직전이고 그물에 걸려있는 거 같달 까요. “해방이 하고 싶어요. 해방되고 싶어요. 어디에 꼭 갇힌 거 같아요. 깝깝하고 답답하고. 뚫고 나갔으면 좋겠어요.” 염미정은 서울내기들의 잡담이 헝클어트린 ‘머리’에서 나오고, 당미역에서 내린 뒤, ‘가슴’을 여는 사람입니다.

“알아라, 쫌! 너 자신을 알라고.” 자신을 너무나 잘 아는 구씨가 자기 인생의 중심줄을 잡고 싸울 때, 미정에게 던져준 말. 그 한 줄의 힘. 그렇게, 자신을 온 생명으로 추앙하면 꽉 채워지고 충만한 자기가 되는 거였어요. “우리 다, 행복했으면 좋겠어. 쨍하고 햇볕 난 것처럼. 구겨진 것 하나 없이.” 행간의 의미가 많은 편인 박해영 작가의 의도를 염미정 내면의 불씨로 구현해낸 것처럼, 박 작가의 해방클럽에서 마술주문에 걸터 앉아있고 싶어요. 그저 ‘나’의 거울이 되어주는 ‘너’와 눈맞춤 하면 반짝반짝 웃음이 나겠죠.

김석윤 감독은 ‘성장이란 죽을 때까지 이뤄진다.’ 하는 믿음으로 동시대 인류를 사랑하는데 창의력을 불태우고 있는 거 같아요. 자기 자신의 노른자를 뺏기지 않은 시청자들은 성장하리라 믿고 있는 거 같아요. 손석구 씨가 “촬영 내내 행복했고 내 인생의 감독이다” 한 김 감독은 어깨가 식지 않는 유형이라네요. 다음 작품에서 그의 어깨에 기대거나 올라타서, 동틀녘으로 나가고, 내려야 할 곳에서 잘 내린 사람들과, 또 복작복작 만날 것 같습니다. 성환역에서 내린 그들과 만나, 토스트나 떡볶이로 허기를 채우고, 카페에서 차나 맥주도 한 잔 했으면 싶어요. 그리고 헤어질 땐 가게에서 소주 두 병과 아이스크림을 사서 집으로 가고 싶어요.

글 김난주 스토리발굴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