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열사의 초상은 누가 그리는 게 옳을까
독립열사의 초상은 누가 그리는 게 옳을까
  • 천안아산신문
  • 승인 2023.04.19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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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지역사 산책노트 08] 

주차장으로 변해있는 천안역 동부광장을 전체적으로 사진에 담아보려고 광장 주변을 돌며 촬영지점을 잡아보려던 때였다. 나는 큰길가 쪽으로 돌아서 걸어가고 있었는데 마침 횡단보도를 건너오던 한 쌍의 연인이 눈앞에 보이는 유관순 열사의 초상을 가리키며 뭔가 속삭이는 소리를 우연히 곁에서 듣게 됐다. 남성과 여성 중에 특히 여성이 유관순열사사적지를 다녀온 이야기를 자랑삼아 늘어놓는 것을 나는 귀를 닫고 있어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 경험은 한국인의 자긍심이면서 동시에 천안시민의 자긍심이다. 좋은 감정이고 의미깊은 체험이다. 하지만 이 초상의 내력을 알고 있는 나는 마음 한편이 씁쓸했다. 에휴~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걸. 하지만 어떡하나. 정확히 알아야 하는 것은 당연히 확실하게 알아야 한다. 그래야 부끄러움을 덜 느끼게 된다.

이번에는 유관순 열사의 초상 이야기나 좀 풀어보련다. 다른 지역에서는 혹 초상의 내력을 모른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천안에서는 알 만한 사람은 알아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다. 천안역 동부광장 앞에 이동녕 선생의 사진과 나란히 있는 유관순 열사의 초상은 과연 누가 그렸겠는가? 이런 걸 궁금해한 적이 있는가? 이 초상은 대표적인 친일화가 김인승(1910-2001)의 1959년 작품이다. 이 초상의 원본은 서울의 이화여자고등학교 안에 있는 유관순기념관 벽면에 걸려있다. 코로나가 있기 전 몇 년 전에 내가 직접 가서 내 눈으로 그 초상을 확인했다. 화가가 누구인지를 빼고나면 아름답고 꿋꿋한 한 소녀의 초상으로 정감을 담아 관람하겠지만 화가의 정체를 알고 나면 투명하게 관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천안역 동부광장 앞 유관순 열사 초상. 친일화가 김인승의 작품.
천안역 동부광장 앞 유관순 열사 초상. 친일화가 김인승의 작품.

차라리 일제식민지 시기 최고의 한국인 화가 중 한 사람이었던 나혜석 화백이 그렸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근대적 여성으로서의 주체성을 선구적으로 보여주었던 나혜석 화백은 한국의 근대미술사에서도 커다란 족적을 남긴 빼어난 화가였다. 오만원권 지폐의 도안 대상으로 심사임당과 함께 각축을 벌였으나 전근대 유교문화의 전통에 밀려 아쉽게도 선택을 받지 못했다. 나혜석 화백은 경기도 수원이 고향이라서 수원 지역에서 주로 기념행사와 유적홍보를 진행하고 있다. 천안지역과는 어떤 뚜렷한 인연은 없어 보인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봉서산 가까이에 있는 청룡공원의 그림 있는 담벼락에 나혜석 화백의 작품이 하나 붙여있다는 사실!!

어쨌거나 친일화가 김인승은 일제식민지 시기의 여느 친일 미술인들과 마찬가지로 예술적 기예가 뛰어났는지 조선총독부가 추진하는 강제동원의 일선에서 동료 친일화가들과 함께 동족의 민중을 전쟁터로 병참기지로 보내는 일에 자신의 빼어난 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했던 것이었다. <친일인명사전>의 김인승 항목에서 한 대목을 읽어보자.

1943년 2월에는 조선의 선전 추천작가와 일본 출신 유화가 등 총 27명이 “성전하 미술보국에 매진할” 목적으로 결성한 단광회에 참여하며, 이 단체의 일본인 화가 12명과 심형구, 김만형, 박영선, 손응성, 조병덕, 이봉상 등과 함께 공동으로 <조선징병제시행기념> 기록화 제작에 함께 했다.(...) 1944년 결전미술전의 심사위원으로 <○○으로 돌진하다>(원래 작품명에 ‘○○’으로 되어 있음)와 <숨막히는 순간>을 출품하여 군국주의를 찬양하고 전쟁분위기를 고조시키는 데 적극 참여했다.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군국주의가 한국인 청년들을 총알받이로 군사보조원으로 충원시키는 일을 전개하는 상황에서 친일화가 김인승은 동료 친일화가들과 함께 적극적으로 징병을 고무하고 전쟁을 찬양하는 등의 작품을 만들었다는 내용이다. 동족의 청년들을 불의한 전쟁터로 몰아가면서 그것을 거짓 아름다움으로 치장하는 일을 자행한 친일화가가 세상에나! 해방이 되고나서도 그 부끄러움의 의미를 정녕 몰랐던 것일까? 어떻게 똑같은 손길로 독립열사의 초상을 그릴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일까?

유관순 열사의 초상에 대한 친일화가 작품 논란은 사실 병천 유관순열사사적지에 있는 추모각의 영정에 의한 것이 더욱 유명하기는 하다. 친일화가 장우성(1912-2005)에 의해 제작된 옛 초상이 추모각에 모셔져 있는 것을 수많은 시민들의 비판과 교체 요구에 의해 바뀌게 되었을 때조차도 새로운 작품 제작을 또다시 친일화가 장우성에게 맡기는 해프닝도 벌어졌었다. 이랬으니 또 얼마나 시민들은 분개하고 또 얼마나 격렬하게 재차 화가 교체까지 요구했겠는가. 어쨌건 간에 기어이 친일 문제가 없는 화가에 의해 새로이 제작된 영정이 현재 추모각에 배치되어 있게 되었다.

그런데 친일화가 김인승의 유관순 열사 초상은 참으로 괴이하게 비판의 흐름을 벗어나 있는 듯 보인다. 지금 당장 인터넷에서 검색을 해보시라. 분명히 친일화가 김인승의 초상에 대해 문제제기하는 뉴스와 블로그들이 쏟아져나옴을 알 수 있다. 상황이 그렇건만 이상하게도 여전히 김인승의 유관순 열사 초상은 이리저리 논란을 피해다니며 버젓이 이 거리에 저 거리에 살아남아 게시되고 있다. 그리고 아니 세상에 유관순 열사의 본고장이라고 할 수 있는 천안에서, 그것도 천안의 심장부인 천안역 광장에서, 그것도 수많은 사람들이 유관순을 기리며 자긍심을 느끼는 그 자리에서 친일화가가 그린 초상인 줄도 모르고 독립정신을 되새기게 되는 상황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좋은 것인가 이 말이다. 뭐 물론 조만간 천안역 증개축사업이 전개되면 낡아빠진 그 초상은 자연스럽게 철거되기는 하겠다. 하지만 설마 하니 멋진 새 광장에 또다시 그 초상이 재등장하는 건 아닐지 불안감은 못 떨치겠다.

글 송길룡(천안역사문화연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