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정신사의 전환적 장소 '복구정'
천안정신사의 전환적 장소 '복구정'
  • 천안아산신문
  • 승인 2023.04.11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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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지역사 산책노트 05] 

조금 이른 듯 벚꽃이 만발하더니 다시 갑자기 기온이 뚝 떨어지는 이상기후를 체험하면서 한 주일을 보냈다. 이런 경험이 참 놀랍지 않느냐고 주변에 얘기했더니 돌아오는 말은 “꽃샘추위가 다 그렇지 뭐!” 하는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기후위기는 심각하다고들 하는데 막상 자기 피부로 느끼는 날씨는 별 무관한 듯 여겨지는가 보다. 전국적으로 수십 군데서 거의 동시적으로 발화된 산불 소식도 여간 불길한 분위기를 연출한 게 아닌데 한 차례 내린 비 소식에 걱정까지 다 쓸려내려간 것 같이 여겨지는 것도 다 기우에 불과한 것일까. 이런 가운데 벚꽃 구경을 가는 것은 세상 소식을 잊어보기 위한 도피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벚꽃 하면 뭐니뭐니 해도 북면 병천천 상류 계곡길이다. 올해도 역시 주말에는 벚꽃길로 접어들어 가려는 자동차들로 도로가 꽉 막혔다. 그 초입에 있는 연춘리 마을에서는 시내버스 타기도 어렵다. 하지만 벚꽃은 그만두고 천안의 근대사 중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는 복구정 정자를 찾아가 보기로 하자. 벚꽃순례객의 차들로 앞뒤가 꽉 막힌 이 연춘리 도로변의 마을은 아닌 게 아니라 바로 복구정 마을이다. 현재 휴업중인 유명한 복구정 식당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마을이름의 원천이기도 한 복구정 정자를 찾아가는 길은 약간 애매하다. 도로를 따라가면 찾기가 편하긴 한데 도보를 해서 가는 답사자에게는 인도가 없어 위험한 길이다. 천상 마을 안길로 접어들어야 한다.

다시 처음부터 길안내를 해보기로 하자. 천안역에서 400번 또는 401번 버스를 타고 병천행으로 장장 40분을 터덜거리며 가다가 연춘리 정류장에서 내렸다고 해보자. 횡단보도로 길을 건너서 천안방면 정류장으로 잠시 걸어가면 그 앞으로 복구정2길을 가리키는 이정표를 만날 수 있다. 일단 그 길로 들어가면 된다. 죽 걸어가면 연춘1리 마을회관이 나오고, 계속 걸어가면 작은 정자가 나오는데 이것을 복구정이라 착각하면 안 된다. 이 정자의 왼편길로 약 5분 정도 길 따라 걸어가면 이 길 끝에서 ‘들밥’이라는 음식점의 널찍한 정원으로 들어서게 된다. 우리의 주인공 복구정 정자는 바로 이 정원의 한쪽에 자리잡고 있다.

동학도인들의 회합의 장소 복구정 마을 정자
동학도인들의 회합의 장소 복구정 마을 정자

과연 여기서 눈앞에 보고 있는 저 정자가 그 옛날 그러니까 130년 전의 그 정자가 맞을까는 확언하기 어렵다. 1894년 가을 동학농민혁명이 있었던 그때 동학도인의 핵심 회합지였던 복구정 마을은 관군에 의해 깡그리 불태워졌다고 전해진다. 그 난리통에 복구정 정자가 고스란히 보존되었으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여하튼 재로 변했던 마을터에 다시 한 집 두 집 생겨나 다시 어엿한 마을로 부활했다. 이런 과정에서 복구정 정자도 복원되었을 것이다.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나 현재의 모습은 아담하게 기품을 간직한, 격동의 역사에 대한 기억의 장소로 손색없다.

한편, 동학농민혁명 시절 임시로 향촌에 사는 장정들을 모아 출진시킨 진압군 보조부대를 당시에 민보군이라 불렀는데 천안지역에서 활약한 민보군의 대장으로 윤영렬이라는 이가 있었다. 내가 ‘활약’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사실 동학농민군 입장에서 보면 관군앞잡이의 포악한 ‘행패’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중에 이 윤영렬이라는 인물에 대해 상세히 이야기할 날이 있을 것이다. 아무튼 이 인물을 왜 꺼냈느냐면 이 인물의 보고서가 복구정의 존재감을 확증하는 결정적 증거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체포한 동학도인 김화성을 심문하여 얻은 내용 중 중요부분은 이렇다.

1883년에 보은에서 최시형에게 동학도를 전수받아 목천 복구정에 있는 대접주 김용희, 김성지와 함께 결의를 하여 자칭 3노(老)라고 하고 각각 동서에 포를 만들어 널리 펼 것을 도모하였습니다. ((윤영렬의 보고서 중 김화성의 진술 부분 중에서 발췌))

이 부분의 내용만 보더라도 1894년이 오기 전 11년 전에 벌써 복구정은 동학 전파의 구심점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보고서는 ‘동학 3노’, 즉 동학의 세 어른인 김용희, 김성지, 김화성에 의해 이후 <동경대전> 목천판의 간행과 배포, 이후 세성산 전투 준비까지 천안지역 동학농민혁명이 복구정을 중심으로 오롯이 전개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내가 이 복구정에 대해 천안정신사의 전환적 장소라고 자리매김하는 이유는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기 전에는 천안유림의 오래된 명소였고, 18세기 실학자들의 쉼터였으며, 병인박해를 당하기 전 천주교 신자들의 회합장소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동학 전파의 지역 거점으로 궁극적으로는 혁명적 장소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으니 가히 복구정은 천안정신사를 관통하는 주맥을 품고 있다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여기에 더해 흥미로운 것은 복구정을 세우고 유지시켜오고 동학농민혁명의 성지로 만들게 한 장본인이 강릉김씨 문중이라는 것이다.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강릉김씨 총랑공 복구정파 문중이다. ‘동학 3노’의 3김 어르신도 강릉김씨로 여겨지며, 동면 죽계리에 <동경대전> 간행소를 제공한 김은경도 강릉김씨이다. 그렇다면 천안지역 동학 전파에 강릉김씨 문중이 대단히 중요하고 핵심적인 연결고리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강릉김씨와의 연결이 가능했던 것일까?

내가 생각하는 하나의 실마리는 이렇다. 1871년 경상도 영해봉기 후 강원도로 피신했던 최시형은 우여곡절 끝에 동학교조 최제우의 둘째아들인 최세청의 처가가 있는 강원도 인제로 찾아간다. 이 처가가 바로 강릉김씨였다. 여기서 나중에 최시형의 수제자 중 한명으로 활동하게 되는 김연국이 등장하게 된다. 강릉김씨는 저멀리 교조 최제우와도 혼맥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것은 과연 우연에 불과한 일일까?

글 송길룡(천안역사문화연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