덤으로 얻은 인생
덤으로 얻은 인생
  • 천안아산신문
  • 승인 2023.04.09 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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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랑이에서 ‘우지직’ 판자 쪼개지는 소리가 귀에 들렸다.

몸에 문제가 생긴 탓인지 뻐근한 날이 연일 계속되었다. 이순을 지난 탓이라고 하지만 무예인으로서 누구에게 말하는 것도 창피했다. 사실 하루 한 시간 정도만 말 등에 올라갔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무예인이 아파서는 안 된다는 법은 없다. 하지만 내가 건강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 무예를 배우겠다고 찾아오는 벗들에 대한 예의다.

몸을 원상회복 시켜야 했다. 그냥 말을 탈까 하다 둔한 몸을 먼저 풀어야 할 것 같아 간단히 어깨와 허리, 그리고 다리 찢기 등 하체 운동을 시작했다. 양쪽 다리를 펴고 가랑이를 벌렸으나 그냥 정삼각형이다. 무예인의 몸이 아니었다. 상체를 흔들며 가랑이를 땅을 향해 누르니 조금씩 벌어지는 것 같더니 순간 ‘우지직’ 판자 쪼개지는 소리가 귀에 들렸다. 허벅지 근육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운동할 때 가끔 생기는 통증이겠지 하고 액체로 된 진통제를 뿌렸다. 그런데 웬걸 시간이 갈수록 통증은 견딜 수 없게 심해졌다. 결국, 진통제 몇 알을 입안으로 털어 넣고 참았으나 다음 날은 온몸이 얻어맞은 것처럼 쑤시기까지 했다. 진통제 대신 소주를 몇 잔 마셨다. 몇 병을 마셔도 끄떡없었는데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마약을 한 것처럼 취한 상태로 온종일을 보내야 했다.

요즘을 백세 시대라고 하는데 벌써 몸이 노쇠해진 것일까? 병원을 찾았다. 의사가 이것저것을 묻더니 우주선처럼 둥그런 원통으로 생긴 자기공명 영상기(MRI) 속으로 나를 밀어 넣고 관찰했다. 컴퓨터 모니터를 통해 내 몸 부분 부분을 마우스로 누르며 빨간 동그라미 표시를 했다. 고개를 좌우로 흔들더니 동그라미 친 부분을 가르치며 심각하게 말했다. 무릎 연골이 많이 상했다. 근육이 많이 퇴화되어 운동을 계속하면 위험할 수도 있다. 혈액순환이 잘 안 될 때 생기는 현상이라며 내시경을 하자고 했다.

간호사가 수면 주사를 놓았다. 난 몽유병 환자처럼 스르르 잠이 들었다. 그 사이 그들은 내 입과 항문으로 소형 카메라를 넣고 내장을 관찰했다. 그는 내가 깨어나자 지방이 간을 덮고 있어 몸에 들어오는 독소를 해독시키지 못한다고 했다. 피로를 많이 느끼게 되는데 이유는 간이 역할을 못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다시 컴퓨터 모니터에 뇌 사진을 올려놓고 이리저리 마우스를 움직이더니 갱년기 장애가 있다며 신경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조물주가 사람에게 준 명줄은 쉰 살이다

운동으로 다져온 몸인데 무슨 갱년기냐며 별 실없는 소리 말라고 했다. 의사는 지긋이 나를 쳐다보고 조물주가 사람에게 준 명줄은 쉰 살 전후라며 말을 이어갔다. 그는 생명은 신의 영역인데 현대과학이 고무줄처럼 명줄을 쭉 늘려 놓았다. 걱정이다. 사람이 오래 살게 된 것은 현대인이 잘 먹고 잘살아서가 아니다. 한동안 전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 전쟁 이후 벌써 70년이 지나도록 전쟁이 없었다. 물론 휴전상태라 가끔 혼란기는 있긴 했으나 평화 시대였다. 그 덕분에 의학은 인류 역사상 가장 크게 발전했다.

그는 자동차에 들어가는 부속품을 예로 들었다. 쇳덩어리가 강철이 되기까지는 섭씨 칠천 도의 용광로에서 담금질을 당한다. 사람은 어떠냐? 어머니 태내에서 고작 열 달 동안 모셔져 있다가 세상 밖으로 나온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가 어른이 되고 노년이 될 때까지 특별한 사고를 당하지 않는다면 오십 육십까지도 문제없이 그냥 사용할 수 있다. 그런데도 노인이 되면 뼈가 아프다. 장이 기능을 못 한다며 야단이다. 참 뻔뻔한 것이 인간들이다. 하늘이 준 품질보증 기간은 오십 년에 불과한데 하루라도 더 살고 싶어 난리다.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서방을 떠돌다 객사한 진시황제보다 더하다.

전쟁 등 국가 재난이 일어나 병원문을 닫으면 평균연령이 오십 정도도 안 된다

옛날에 환갑을 지나면 장수했다고 했다. 그보다 한 십 년 더 살면 천수를 누렸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백 살도 짧다며 백 오십을 이야기하고 있다. 오십이 지나 사는 것은 모두 의학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인위적으로 얻은 생명에 불과하다. 즉 유효기간이 지나 덤으로 얻은 것이라며 지금 나도 덤으로 얻은 삶을 누리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전쟁이 나서 의료시설이 문을 닫게 되면 쉰 이상 중년 중 절반 이상이 사망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친절하게 당뇨와 혈압 치료제를 복용하는 이들의 통계를 보여주며 자신의 주장을 이해시키려고 했다. 나는 맞는 말이라고 맞장구를 치면서도 병원이 완전하게 폐업하는 경우는 없을 것이라고 답했다. 그는 전쟁과 같은 국가 재난이 일어나게 될 때를 가정해보자고 했다. 만일 그런 불행이 없다면 백 오십이 아니라 이백까지 사는 것은 시간문제다. 사회 질서가, 자동차 나사 하나가 쑥 빠지듯이 시스템이 무너지게 되면 병원은 물론이고 폐허만 남게 된다며 지금 사람들이 멋모르고 덤으로 받은 생은 모두 비누 거품처럼 날아가 버릴 것이라고 했다.

그때 간호사가 들어와 “선생님! 진료하셔야지요. 밖에 대기 환자가 줄을 섰어요.”라며 나에게 눈을 흘기고 나갔다. 의사는 순간 깜박했다는 듯이 컴퓨터 마우스를 이리저리 움직이더니 “간호사에게 주사 한 대 맞고 약은 15일분이니까 나가서 처방전 받아 가세요. 참, 뼈 주사는 맞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뼈 밀착 농도가 강해서 특별한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라며 운동요법이 쓰인 종이를 프린트해 주며 진료실 문을 나서는 나를 향해 “지금까지 내가 한 이야기는 갱년기로 괴로워하는 선생님에게 정신과 진료를 한 것입니다.”라며 유쾌하게 웃었다.

차라리 포르노를 보라면서 TV채널을 용감하게 바꾸는 어르신은 없었다

병원 로비로 나오자 벽에 걸린 커다란 TV에서 로켓포가 날아가고 있었다. 하단 자막 뉴스엔 ‘일제 징용 피해에 대한 3자 배상 결정’ ‘시민단체, 통일로에 '강제징용 해법 폐기' 현수막 100개 걸기로’란 큰 글씨가 물 흐르듯이 다음 소식을 위해 비켜 가고 있었다. 이어 몇 명의 시사 평론가라는 사람들이 모여 앉아 이번 한미일 군사훈련에 미국에서 전투기를 몇백 대가 이착륙할 수 있는 세계 제일의 핵항공모함이 왔다, 북한 ICBM은 실효성이 확인되지 않았다며 전쟁을 억제하기 위해 더욱 강력한 훈련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순번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TV 뉴스에 관심이 없었다. 콧물과 고열로 치료받기 위해 오직 자기 순서를 기다릴 뿐이었다. 그 속에는 덤으로 유효기간 지난 생을 이어가고 있는 노인들도 꽤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저것은 뉴스가 아니다. 아이들에게 자본이 아니라 평화를 유산으로 물려줘야 한다. 저런 뉴스를 보려면 텅 빈 지구를 채우기 위해서 차라리 포르노를 보라면서 TV채널을 용감하게 바꾸는 어르신은 없었다.

글 최기영(자유기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