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이 괴수는 정체가 무엇이냐
도대체 이 괴수는 정체가 무엇이냐
  • 천안아산신문
  • 승인 2023.04.04 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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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지역사 산책노트 04]

앞서 남산공원 이야기가 나왔으니 꼭 빠뜨리지 말아야 할 또다른 이야기를 해야겠다. 천안중앙시장에서 남산공원으로 계단을 타고 오르면 그 꼭대기에 좌우로 서있는 정체모를 괴수들을 볼 수 있다. 마치 서울 광화문 앞 좌우로 서있는 해태상처럼 보이는 이 괴수상은 정체가 무엇인지 처음부터 수상하게 보였고 알쏭달쏭했었다.

최근에 찾아가 좀 가까이 사진에 담아보려고 했는데 그때 마침 나는 매우 신기한 광경을 보게 되었다. 약간 캐주얼한 옷차림을 한 중년남성이 씩씩하게 계단을 뛰어오르더니 예의 그 괴수상 앞에 떡하니 멈춰섰다. 그러고는 한 손으로 그 괴수의 코를 감싸쥐더니 뭐라뭐라 주문을 외우는 행동을 보였다. 나는 멀찌감치서 딴데를 쳐다보는 체하며 그 사람이 대체 뭘 하는가 하고 슬쩍슬쩍 훔쳐보았다. 주문을 외우는 것인지 기도를 하는 것인지 도통 알 수 없는 행위를 심각하게 지속하던 그 사람은 한쪽 괴수의 코에서 떨어지더니 이번에는 다른쪽 괴수의 코를 덥썩 움켜쥐는 것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하고 있는데 나는 웃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방해할 수는 없기 때문에 빈 하늘만 공연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 사람이 사라지고 난 후 가까이 가서 보니 괴수들의 코가 과연 맨질맨질해져 있었다. 그 사람의 행동은 건강을 비는 행동이었을까?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괴수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계단 이야기를 꺼내야 할 것 같다. 사실 남산공원을 오르는 계단의 모양도 좀 수상하기는 마찬가지다. 물론 별 의심없이 오르내리는 시민들이 많을 줄로 안다. 내가 이런 부분에서 공연히 민감하게 생각하는 게 아닐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계단의 정체를 잘 알고 있다. 지금은 용주정이라는 우람한 정자가 주인처럼 자리잡고 있는 남산공원에는 일제식민지 시기에 역시 우람한 일본신사가 위치해 있었다! 신사가 자리한 남산을 오르는 계단은 그렇기 때문에 신사 건축양식을 따라 만들어진 계단이었던 것이다. 한 치의 휘어짐도 없이 정직선으로 똑바르게 계단이 놓여져 있다는 것이 바로 그런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어느 고을마다 설치되어 있던 일본신사는 해방 직후 주민들에 의해 모두 철거되었고 신사가 있던 장소는 애초의 모습을 유지하지 못하도록 변형시킨 것이 일반이었다. 공원으로 조성하면서 부득이한 경우에는 계단의 정직선 모양을 해체하여 자연스러운 곡선 형태로 교체하기도 했다. 하지만 천안 남산공원의 신사 계단은 여전히 옛 형태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이건 철거를 완벽하게 이행하지 않은 결과라고밖에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독립기념관이 있는 도시에서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의아스럽지 않은가?

남산공원 계단에 있는 일본신사 괴수상
남산공원 계단에 있는 일본신사 괴수상

자 이제 괴수상으로 돌아와보자. 계단 위에 서로 마주보고 서있는 이 두 괴수상은 정체가 무엇이겠는가? 그 옛날 식민지 시절 일본신사의 부속물일 것이라는 심증은 있었으나 그동안 결정적인 증거를 찾지 못했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흘러 나는 결국 찾아내고 말았다. 천안시청에 있는 도솔도서관에는 천안지역사 관련 문헌들이 많이 소장돼 있다. 그 문헌들 속에서 식민지 시기 천안의 풍경을 담은 사진첩을 보게 되었고 거기서 그 괴수상이 일본신사 건물 정문 바로 양옆에 서있었던 것을 확인했다. 그때 나는 뒤로 까무러치는 줄 알았다.

왜 이 괴수상을 파괴하지 않았을까? 무슨 식민지 기념할 일이 있다고 내버리지 못해 성스러운 남산공원에 여지껏 고이고이 보관하고 있단 말인가? 아직도 일제식민지 시절을 끝끝내 그리워하는 누군가가 있단 말인가? 조각상 따위가 무슨 큰 대수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이것은 단순한 조각상이 아니라 민족정신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설립됐던 일본신사의 상징물인 것이다. 당시의 식민지 조선인들은 망국의 굴욕을 느끼면서 이 괴수상이 지키고 서있는 신사를 향해 허리굽혀 신심을 다해 요배를 했어야 했다. 이래도 한갓 말없는 조각상이 무슨 상관이냐고 반문할 수 있을까? 유관순 열사가 살아돌아와 이 괴수상을 본다면 가슴을 치고 분통해하지 않을까?

지금은 천안에서 거의 잊혀진 듯하지만 일제식민지 시기에 만세운동 말고도 천안을 자긍심으로 드높였던 매우 귀중한 사건이 하나 있었다. 바로 1938년 신사참배거부운동이었다. 당시 개신교계 장로회나 감리회는 교단 차원에서 신사참배를 수용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어쩌면 상부의 지시대로 순순히 말썽을 일으키지 않고 신사참배를 해도 책임을 모면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거부의 몸짓이 있었다. 감리회 소속으로 천안에서 목회활동을 하던 신석구 목사가 바로 신사참배거부의 장본인이었다.

신석구(1875-1950) 목사는 1919년 독립선언서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끝까지 일제에 대해 전향이나 변절을 하지 않은 몇 명 중의 한 사람이다. 1935년에 천안으로 파송되어 목회활동을 하고 1939년에 다른 곳으로 다시 파송되어 천안을 떠난다. 나중에 그는 북한에서 목회활동을 하다가 역시 북한정부의 회유에도 불응하여 재판을 받고 처형됐다. 그는 일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신앙을 지키고 순교했다.

이렇게 천안에서 값진 민족적 자존심을 보여준 신석구 목사에 대해 그의 고향이 충북이라는 이유로 천안시민들은 어쩌면 소홀히 대접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 신사참배거부운동은 종교 차원을 넘어서는 민족 차원의 운동이다. 아닌 게 아니라 청주 삼일공원에는 그의 동상이 서있지만 관련 기념관 추진의 활력은 그리 큰 것 같지는 않다. 신석구 목사가 2개월 동안 천안경찰서에서 고난을 받았던 그 터에서 가까운 남산공원에는 여전히 일본신사의 흔적도 남아있다. 이를 어찌할까?

글 송길룡(천안역사문화연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