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군이 천안관아를 쳐들어가는 상상
동학군이 천안관아를 쳐들어가는 상상
  • 천안아산신문
  • 승인 2023.04.03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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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지역사 산책노트 03] 

천안의 향토사를 살펴보다 보면 심심찮게 ‘오룡쟁주(五龍爭珠)’라는 표현을 마주치게 된다.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그것은 ‘다섯 마리 용이 여의주를 다툰다’는 천안의 풍수지리적 형상을 나타낸다. 이게 왜 중요하냐면 고려 태조 왕건이 후삼국통일을 위해 건설한 계획적 전략도시의 입지를 함축하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오룡쟁주’는 천안의 탄생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그렇다면 다섯 마리 용과 여의주는 실제로 천안 도심 속에서 어느 위치에 비정될 수 있을까 궁금증이 생겨난다. 고려시대로 거슬러올라갈 수 있다면 그 당시의 치소를 중심으로 비정해볼 수 있을텐데 아쉽게도 그와 관련해 전해 내려오는 자료가 없다. 천안향토사 자료에서는 언뜻 지금의 성성동(聖城洞)이 고려시대의 치소 지역이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제시되고 있을 뿐이다. 동이름의 한자들이 성스러운 성곽을 의미하는 데서 다소 옹색하나마 힌트가 마련된 것이다. 그래도 그런 추정이라도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나중에 기회를 내어 더 자세히 이야기해보기로 하자.

어찌되었든 천안의 향토사가들은 조선시대의 천안 치소 즉 천안관아를 중심으로 다섯 마리 용과 여의주를 나타내는 주요 산을 비정했다. 남산공원에 있는 오룡쟁주 조형물 안내판에 따르면 여의주는 남산, 동쪽의 청룡은 장대산, 서쪽의 백룡은 일봉산, 남쪽의 적룡은 청수동 수도산, 북쪽의 흑룡은 천안초등학교 정봉, 그리고 중앙의 황룡은 천안중앙초등학교 산자락이다. 여기서 특히 주목할 곳은 여의주에 해당하는 남산과 황룡의 천안중앙초등학교다. 황룡의 자리는 사실 천안관아가 있던 자리이고, 여기서 남산까지의 곧게 뻗은 거리 위에 천안중앙시장이 들어서 있다. 이곳이 바로 천안 원도심의 핵심구역이다.

자 이제 오룡쟁주의 여의주라 일컬어지는 남산으로 가볼까. 편의상 천안역에서 출발한다고 치자. 천안역 동부광장 정류장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온양나드리 정류장을 지나면 바로 천안중앙시장 정류장에 도착할 수 있다. 물론 내가 애용하는 400번 버스 말고도 천안역을 거치는 거의 모든 버스들이 천안중앙시장을 거쳐간다. 매우 짧은 거리이니 차라리 슬슬 걸어서 가봄직도 하다. 천안역이 1905년 경부선 철도가 완성될 때 준공되었고 이후에 이 역을 중심으로 천안이 근대도시로 발전하면서 일찌기 상가가 들어섰던 곳을 발로 밟아보는 체험을 얻어볼 수도 있다.

천안중앙시장은 1918년에 개설된 남산중앙시장을 모태로 한다. 그로부터 100년만인 2018년에 인근에 있던 천일시장과 중앙시장을 통합하여 지금의 천안중앙시장이 됐다. 정류장에서 시장입구를 쳐다보면, 언제나 그렇듯이 인파로 북적거리는 것을 볼 수 있는 만큼 대단히 규모가 큰 상설화된 시장이다. 1919년에 여기서도 우렁찬 함성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었으니 뜻깊은 유적임을 알 수 있다.

다시 움직여보자. 시장입구로 향하지 말고 고개를 살살 돌려 산 위로 올라가는 계단을 찾아보도록 하자. 찾았는가? 맞다. 거기다. 계단을 타고 올라가보자. 중간에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는 공중화장실도 있으니 볼일이 급하면 이용해도 좋겠다. 나는 거기 갈 때마다 너무나 화장실이 깔끔해서 기분이 왠지 좋아지기도 했다. 마지막 계단을 밟고 올라서면 눈앞에 의외로 탁트인 공간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저만치 위엄있게 생긴 길쭉한 정자를 맞닥뜨리게 된다. 일반적인 정자로 보기에는 너무나 규모가 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름이 용주정(龍珠亭)이라 불리는 정자다. 눈치빠른 이는 벌써 알아차릴 수 있듯이 ‘용주’는 ‘용의 구슬’, 즉 여의주를 나타낸다.

남산공원에 있는 용주정
남산공원에 있는 용주정

옛날 건축물의 형태를 보이는 용주정은 사실 최근에 지어졌다. 원래는 천안관아의 부속건물 중의 하나인 객사의 건축재료였던 것을 재활용한 것이다. 객사는 임금의 위패를 모시고 지방관이 매일 의례를 행하는 신성한 장소로 대체로 우람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 천안관아의 매우 많은 부속건물들은 일제식민지 시기에 거의 대부분 철거되어 다른 곳의 건축재료로 재활용됐다. 그나마 최후까지 남아있던 객사 건물은 해방 이후에 와서 다소 축소된 채로 남산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그것도 이제는 임금을 위한 건물이라기보다는 시민들의 쉼터로서 정자가 되었다니 감회가 새로울 뿐이다.

나는 이 용주정의 자태를 볼 때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때 천안 동학도인들이 천안관아를 쳐들어가던 상상을 해본다. 얼마쯤 사람들이 모였을까? 당시의 모습을 자세히 알려주는 자료는 없지만 세성산에 쌓아두었던 무기들의 양으로 보아서는 상당히 많은 동학도인들이 관아의 인원들을 제압하고 관아 전 구역을 일거에 점령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압도할 만큼의 위세가 있었으니 고스란히 무기창고를 접수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지금 천안중앙시장의 자리는 아마도 몰려든 동학도인들로 북적북적 왁자지껄 쩌렁쩌렁 했을 것이다.

지금은 평화로운 촛불집회의 형태로 대한민국 주권자들의 목소리가 울려퍼져 나간다. 그토록 호탕하던 권력자들도 진정한 나라의 주인들 앞에서는 주눅이 들 수밖에 없다. 이런 당당한 주권자들의 위세가 드러나던 그 역사의 원형을 따져본다면 우리는 이제는 쉽게 동학농민혁명을 떠올리게 된다. 천안관아를 들썩들썩 뒤흔들었던 동학군들의 모습에서 그제야 명실공히 주권자의 모습을 갖추게 된 민중의 우뚝한 첫걸음을 그려볼 수 있다.

그동안 얼마나 임금과 벼슬아치들이 백성을 우롱하고 멸시해 왔던가. 나라를 엉망으로 만들고 대책없이 얼마나 백성을 쥐어짜고 왔던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우리는 이제 일어섰다. 우리가 주권자다!! 그 함성이 하늘 같이 울리는 듯하다.

글 송길룡(천안역사문화연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