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을 제주에 연결시킨 인물에 대해서
천안을 제주에 연결시킨 인물에 대해서
  • 천안아산신문
  • 승인 2023.03.29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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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지역사 산책노트 02] 

버스 안에서 한 남성 중년이 병천장은 언제 열리냐고 물으니 옆에 있던 한 여성 어르신이 “1일, 6일날 장이 서지요.”라고 대답한다. 그런데 그 남성은 다시 되묻기를 “한 달에 이틀만 열리나 보네요.” 하자 갑자기 까르르 웃음소리가 번진다. 그제서야 그 남성은 끝숫자가 1과 6인 날에 시장이 선다는 것을 깨닫고 함께 웃는다. 코로나19 방역체제가 이뤄지던 3년 내내 버스는 거의 텅텅 비었었지만 차츰 해체상황이 되자 요즘 들어 부쩍 버스 승객들이 많아졌다. 독립기념관에 왔다가 병천을 들러가는 듯해 보이는 방문객들도 많아지니 불쑥 길을 물어보는 일도 잦아졌다. 그 대화는 그런 중에 나온 한 대목인 것이다.

그런 고로 3월 26일은 병천에 시장이 열리는 날이었다. 확실히 시장이 예전보다 풍성해보였고 오가는 장꾼들도 더욱 북적거리는 듯이 보였다. 400번 버스는 병천우체국 정류장을 지나 병천3리 정류장이 종점이다. 401번 버스는 같은 정류장을 거치되 한걸음 더 나아가 유관순열사사적지가 종점이다. 나는 운행횟수가 훨씬 더 많은 400번 버스를 타고 병천3리 종점에 내려 유관순열사사적지로 걸어가는 방편을 선택했다. 그렇지만 나의 진짜 행선지는 그곳이 아니라 용두리에 있는 조병옥박사생가지였다. 요즘에 제주항쟁에 대해 폄훼하는 망언들이 심심찮게 뉴스에 나오니 마음도 심란하여 찾아가는 길이었다. 조병옥은 제주항쟁 시기에 있었던 민간인학살에 대한 가해책임자 중 한 명이다.

병천 용두리에 있는 조병옥박사생가지
병천 용두리에 있는 조병옥박사생가지

조병옥(1894-1960)은 해방 직후 전개된 미군정에서 치안의 총책임자인 경무부장을 역임했다. 제주항쟁은 미군정 시기에 시작되어 정부수립 이후 시기에까지 이어졌다. 특히 이승만 정권은 제주민중의 정당한 저항을 가공할 폭력으로 진압하며 민간인 대량학살까지 자행했다. 제주항쟁은 이러한 전 시기를 아울러 겪어야 했던 제주민중의 고난과 저항을 일컫는 용어다. 조병옥은 미군정 시기의 제주 민간인 탄압 및 학살의 주요 책임자다. 그리고 정부수립 이후의 대학살에도 원인제공을 한 장본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사실 이런 이야기는 1980년대 민주화가 이뤄진 이후에도 공개되지 않은 채 금기시되어 꽁꽁 숨겨져 있었다. 2000년대 이후 ‘제주 4.3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을 위한 법률이 제정되면서 그동안 소문처럼 떠돌던 이야기들이 그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병천3리 정류장에서 유관순열사사적지로 향해 가는 길은 병천 시가지를 빠져나가는 길이기도 하다. 걸어서 찾아가는 방문객들이 별로 없어서인지 사적지 입구까지 가는 길은 별로 정비가 되어 있지 않아 좀 번거로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사적지 입구는 ‘열사의 거리’라는 이름으로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보통 방문객들은 자동차로 진입해 들어가기 때문에 일부러 내려서 살펴보려고 하지 않는 한은 그대로 지나치게 되는 길가의 가로수길 같다. 이 공원에는 천안의 역사인물을 소개하는 공간도 자리잡고 있는데 역시 조병옥에 관한 패널도 포함되어 있다.

그는 오랫동안 천안이 자랑스러워하는 근현대사 인물 중의 한 명이었던 것이다. 여전히 누군가에게는 예나 지금이나 위대한 역사 속 영웅일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조병옥은 식민지 시기에 독립운동을 했으며 그래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정부의 국제승인을 위해 세계 각국을 돌며 외교활동도 했던 사실도 중요한 업적이다. 더욱이 이승만 독재정권 연장에 반기를 들고 반독재 민주화운동에 앞장선 투쟁의 기록도 그를 더욱 빛나게 만드는 부분이다. 지금은 유관순 열사에 대한 지나친 상징화를 경계하는 편이지만, 해방 이후 천안의 독립영웅 유관순 열사를 3.1만세운동 전체에 있어 최고의 상징으로 떠받들게 하는 데에도 지대한 공을 세운 그다.

‘열사의 거리’를 지나 유관순열사사적지 앞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돌아가는 길로 접어들면 유관순열사생가지로 향하게 된다. 이렇게 가는 길은 사실 매봉산을 돌아가는 길이기도 하다. 매봉산의 병천 방향 쪽에 유관순열사기념관 등이 있는 것이고 산 뒤쪽에 유관순열사생가지가 있는 것이다. 매봉산을 돌아가는 길에 아우내만세운동 당시에 목숨을 잃은 유관순열사의 부모 묘소를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나는 바삐바삐 스쳐가며 용두리로 향해갔다. 조병옥박사생가지는 유관순열사생가지가 있는 마을에서도 더욱 골짜기 안쪽으로 들어가는 또다른 마을까지 가야 나온다. 마침 이정표가 친절하게 안내를 한다.

조병옥은 1960년 대통령 선거에 이승만에 맞서는 후보로 나서게 된다. 선거운동을 하던 시기에 맞춰 출간한 것으로 보이는 <조병옥 나의 회고록>이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본래 1959년에 출간되었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그의 아들들에 의해 1986년에 재출간된 책이다. 조병옥은 자신이 동학농민혁명이 있던 1894년에 태어난 것을 매우 의미심장하게 생각했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주로 ‘동학란’이라고 불렀던 것을 그는 특별히 ‘동학혁명’이라고 표현하며 자세하게 그 혁명의 과정을 소개하고 평가하는 내용을 회고록의 첫 꼭지로 삼았다.

그는 ‘동학혁명’에 대해 ‘부패한 특권층에 대한 평민적 혁명이 얼마나 일반민중의 적극적 지지를 받았는가’라고 서술하며 역사적으로 대단히 높게 평가한다. 이러한 역사인식이 왜 제주항쟁에 대해서는 똑같이 적용될 수 없었던 것일까? 그의 회고록에는 제주항쟁에 관한 내용이 단 몇 줄로 스치듯 언급되고 만다. 조병옥박사생가지는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로 아주 정갈하게 초가집으로 복원되어 관리되고 있다. 동학농민혁명에 나섰던 민중의 마을이 불태워지고, 제주항쟁에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되던 민중의 마을이 또한 불태워졌다. 역사정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불타버린 민중의 초가집에 있는가, 아니면 예쁘게 복원된 ‘영웅’의 초가집에 있는가?

글 송길룡(천안역사문화연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