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라는 부적
부모라는 부적
  • 천안아산신문
  • 승인 2023.02.05 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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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란다 문을 여니 공기가 얼음장처럼 쩍쩍 갈라지고 바람에 날이 섰다. 아파트 앞마당은 옷깃을 여미고 걷는 듯 뛰는 듯 바삐 움직이는 몇몇 사람들과 지하로 숨어든 차들로 한산하다. 이 칼바람을 어떻게 피할지, 매운 추위를 무슨 수로 견딜지, 어머니 생각에 마음이 무겁다. 그저 이 겨울이 빨리 지나가길 바랄 뿐이다.

‘날이 안 좋아 길이 나쁠 텐데 오는 길 조심해서 와.’ 어머니가 걱정스레 전화를 했다. ‘조심히 갈 테니 걱정 마시고 밥 잘 잡숫고 기름 아끼지 말고 보일러 때고 추운데 나가시지 마셔.’ 서로 주위와 당부를 하며 전화를 끊었다.

팔순 노모에게 본인만 모르는 비밀이 생겨 근래 전화가 잦다. 생의 기로에 선 큰 병을 당사자가 눈치채지 못하게 대수롭지 않게 포장해 넘기려고 온 가족이 애쓰는 중이다. 모르는 게 약이다 싶어서 내린 결정이다. 어머니 때문에 걱정이 늘어졌는데 정작 어머니는 시골집과 병원을 오가는 며느리가 고생한다고 그게 또 걱정이다. 자식 걱정은 부모가 살아있는 날까지 따라다니는 스토커 같은 지독한 놈인가 보다. 며칠 동안 해는 얼굴도 안 비치고 눈만 오락가락한다. 내려갈 길이 걱정스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하늘도 알았는지 다음 날, 아침부터 해가 창을 뚫고 들어와 거실에 드러누웠다. 고속도로도 말끔했다. 가락 눈이 오기도 했지만 오랜만에 밝은 하늘을 볼 수 있었다. 활짝 열린 대문으로 들어섰다. 해가 쨍하고 떴는 대도 마당 한쪽에는 녹지 않은 눈이 근심처럼 쌓여있었다. 응달이라 쉬이 녹을 것 같지 않았다.

집안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어디 가셨나.’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어머니가 언제 나왔는지 대뜸 빨간 종이를 내밀었다. ‘집에 오자마자 이게 뭐지.’ 하고 보니 지니고 다니는 부적이었다. 지갑에 넣고 다니라고 당부했다. 거실 문 앞에는 토끼가 그려진 하얗고 긴 부적이 벽에 찰싹 붙어있었다. 아는 스님이 해마다 써 주신다고 했다. 어머니 가지라고 준 걸 내가 가져도 되느냐 물으니 작년에 받은 것이 있으니 나보고 가지라고 했다. 종교와 상관없이 어머니가 주신 부적이 어머니 마음 같아서 기분 좋게 받아 주머니에 넣었다. 빨간 부적은 어머니가 내게 주는 빨간 하트 같았다. 고마웠다.

결혼해서 30년 동안 단 한 차례도 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어머니의 지혜와 인품은 내 자랑 중에 큰 자랑이었다. 어머니는 부처님 같은 분이다. 딱하게도 아버지는 그 반대편에 계신 분이었다. 어머니에게 아버지가 제일 잘한 일은 먼저 가신 것이라고 했더니 수긍하실 정도다. 고생은 우리 어머니들이 그러했듯이 말도 못 하게 했다. 험한 세월을 살아내고도 노모가 건강한 것이 우리 복이라고 가족들은 입을 모았다. 말잔치만 했던 지난날이 지금은 후회막급이다. 세월 앞에 우리 어머니만 장사일 순 없는데 미련하고 어리석었다. 조금 더 살피고 조금 더 챙겼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 어머니께 죄스럽기만 하다.

어머니를 서울로 모시고 올라오는 길에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났다. 무뚝뚝하고 버럭버럭 화를 잘 내는 어머니한테는 모진 남편이었지만 막내며느리인 내겐 세상에서 제일 좋은 시아버지였다. 모르는 사람들은 딸이냐고 묻기도 했다. 베개 없다고 아버지 무릎 끌어다가 베개 삼으면 시아버지한테 이러는 며느리가 어딨냐고 하면서도 무릎을 내어주었다. 드라마 내용을 놓쳐 물으면 자세히 설명도 해주고 명절 때 화투를 치면 며느리들이 시아버지 돈 다 따먹는다고 웃고 떠들기도 했다. 꿈만 같은 기억도 있다. 아버지가 쓰러져 정신이 온전치 못했을 때 가 있었다. 자고 있던 나를 한참 내려다보았나 보다. 느낌이 이상해서 눈을 떴는데 어린애처럼 아버지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이 그렇게 밝을 수가 없었다. 우린 이유도 없이 서로 보며 한참을 웃었었다.

어느 날엔 가는 아버지와 통화하다가 장난기가 발동해서 ‘아버지, 나 얼마만큼 사랑해?’ 물었다. 갑자기 받은 질문에 뭐라 말을 못 하고 우물쭈물하길래 ’하늘만큼 땅만큼 사랑하지!’라고 답을 주었다. 그랬더니 세상, 쇠막대기 같은 분이 헛기침을 몇 번 하면서 ‘하늘만큼 땅만큼 사랑혀.’라고 답했다. 그 후로 가끔 ‘아버지, 나 얼마만큼 사랑해.’ 물으면 하늘만큼 땅만큼이라는 말이 자동을 튀어나왔다. 녹아내린 아버지 말이 좋아서 나도 ‘하늘만큼 땅만큼’ 사랑한다고 그랬었다. 겉과 다르게 살가운 면이 있는 시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한동안 사무치게 가슴 앓이를 했다.

아버지를 모시고 다녔던 길에 어머니와 함께 있다. 아버지처럼 어머니를 쉬이 잃을 수는 없다. 힘을 다해 어머니의 병마와 싸울 것이고 하나밖에 없는 내 엄마를 지킬 것이라고 다짐했다.

룸밀러 속에 엄마는 까무룩 잠이 들었다. 볼 때마다 미안하고 고맙다고 한다. 미안하고 고맙긴 나도 마찬가지다. 아무래도 부적은 돌려드려야 할 것 같다. 한낮 종이에 불과할지라도 실오라기라도 잡아야 할 사람은 엄마다. 뭐가 됐든 나는 기대고 싶고 잡고 싶다. 하나님이고 부처님이고 온 사방 천지 신들에게 빌고 싶은 심정이다.

병원 진료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엄마를 설득했다. 내 논리는 이러했다. 스님이 왜 부적을 일 년에 한 번씩 써주는지 아느냐, 부적 효과가 일 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개 있다고 올해 받은 걸 나눠주면 안 된다. 지금 엄마는 수술도 해야 하니 엄마가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말이 통했는지 부적을 돌려줄 수 있었다.

나는 이미 강력한 엄마라는 부적이 있다. 아버지 역시 하늘만큼 땅만큼 사랑을 준 큰 부적이었다. 다시 엄마라는 부적을 마음에 크게 붙인다. 엄마는 늘 든든하다. 부모는 이래서 늙고 병들어도 버팀목이 되어주고 그늘이 되는구나 싶다.

‘여보세요.’ 대신 ‘엄마여.’ 하는 우리 엄마 목소리를 오래도록 듣고 싶다.

글 김형주 (2015년 한국산문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