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동안 잊혀진 이름을 찾다 - 기억과 평화를 위한 1923역사관
100년 동안 잊혀진 이름을 찾다 - 기억과 평화를 위한 1923역사관
  • 천안아산신문
  • 승인 2023.02.02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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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천면 은석산 중턱에는 아우내 쉼플스테이가 있다. 그곳은 기억과 평화를 위한 1923역사관, 젊은 예술가들이 활동하는 아리아리 협동조합, 주민신용협동조합이 ‘아우내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사업을 하고 있다. 이 중 기억과 평화를 위한 1923 역사관은 1층에는 간토 학살 과 시민단체 활동사진이 전시되어 있고, 2층에는 역사관 관장실과 1923 제노사이드 연구소가 있다. 지하에는 학살과 관련한 다양한 사진과 그림, 자료들이 전시되어 그날의 참혹함을 전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간토 학살의 피해 사실과 일본 정부의 증거인멸 및 진실규명에 앞장서고 있으며, 시민과 청소년들에게 올바른 역사교육을 위한 답사와 독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기억과 평화를 위한 1923역사관
기억과 평화를 위한 1923역사관

일본 정부의 진실 은폐와 멈추지 않는 코리안 제노사이드

1923년 9월 1일 가나가와현(神奈川県)에서 진도 7.9의 지진이 일어났다. 지진으로 인해 일본 간토지역(일본 혼슈 중앙에 있는 이바라키현, 도치기현, 군마현, 사이타마현, 치바현, 가나가와현, 도쿄도의 1도 6현 지방을 말한다)에서는 건물 붕괴와 화재로 인한 사상자와 행방불명자가 10만 5천여 명에 달했다.

지진 직후 도쿄(東京都)와 요코하마(横浜)에서는 ’조선인들이 불을 질렀다‘는 유언비어가 퍼졌다. 일본인들 사이에 조선인들에 대한 불신이 싹트기 시작하는 가운데 일본 내무성은 9월 2일 계엄령을 시행했다. 내무성은 각 경찰서에 ’재난을 틈타 이득을 취하려는 무리가 있다. 조선인들이 방화와 폭탄에 의한 테러, 강도 등을 획책하고 있으니 주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내용은 일부 신문에 사실 확인 없이 보도되어 일본인들에게 조선인에 대한 적개심을 고조시켰다.

이후 각 지역에서는 자경단이 결성되었다. 이들은 죽창이나 몽둥이, 일본도, 일부는 총기로 무장을 하였다. 조선인 복장을 한 사람들은 즉결 처분하였으며, 외국인에겐 발음이 어려운 15엔 50전(十五円五十銭)을 말해보게 시켜서 발음이 어눌한 사람은 가차 없이 학살했다. 또한, 보호받기 위해 경찰서에 있던 조선인들도 자경단에 의해 습격을 받아 죽임을 당했다.

관동대지진 - 민중화백 신학철
관동대지진 - 민중화백 신학철

일본 정부는 자경단의 만행을 사회질서 회복을 명분 삼아 수수방관하거나 가담하였다. 학살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도쿄에 흐르는 스미다가와(隅田川)와 아라카와(荒川)의 두 강은 흘러 다니는 시체로 붉게 물들었다고 한다. 일본 정부는 그해 12월 중의원 본회의에서 구제조치나 배상 등에 대한 조치에 대해서 사실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기록이 없다는 답변을 내놓았다.

일본의 주요 도시에서는 ’재일 코리안의 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모임‘이 조직되었고, 일본 정부의 국가주의, 민족주의에 발을 맞추었다. 이들의 구호와 코리안 증오 연설은 마치 유언비어를 날조하여 조선인들을 적으로 삼았던 1923년 간토대학살의 분위기와 흡사하다. 재일동포에 대한 제노사이드(국민, 인종, 민족, 종교 따위의 차이로 집단을 박해하고 살해하는 행위)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일본 현지에서 탁본해 온 추도비 

죽은 자들의 권리를 기억하지 않는 사회는 산 자들의 인권도 지켜주지 않는다

2023년 1월 13일 간토 학살 100주기 추도사업추진위원회는 기독교회관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간토 100 추진위 소속 연구자들은 이승만 정부 당시에 급조한 【일본진재시피학살자명부】를 수정하고 보완하는 작업을 통해 일본 사료에서 발굴한 간토 학살 피해자 명단 205명을 추가했다. 일부 일본진재피학살자에 수록된 피해자의 이름과 학살일시와 장소 등의 오류를 사료에 근거하여 바로 잡았다.

엿장수 구학영
엿장수 구학영

2년 전 기억과 평화 1923 김종수 관장은 ’엿장수 구학영‘이라는 동화책을 출간했다. 구학영은 6,000여 명의 간토 학살자 중 유일하게 고향과 출신을 알 수 있는 인물이다. 동화 출간에 대해 김 관장은 “2008년, 사이타마에서 추도회를 할 때 구학영의 고향 나라 사람들이 이곳에 참여한 것은 처음이라는 말에 굉장히 부끄러웠다”라며 “간토 학살에 대해 국내에 나와 있는 것은 대부분 학술서이기 때문에 시민들이 좀 더 쉽고 편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동화책으로 만들었다.”라고 말했다.

앞으로 계획에 대해 김 관장은 간토학살 사건의 진상규명과 피해자 명예회복을 바라는 특별법이 국회에서 만들어질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며, 추도비를 평화의 소녀상처럼 주요 도시에 만들어 대중들에게 알리는 것을 꼽았다. 또한, 현재 간토 학살 역사관은 기억과 평화 1923역사관이 유일하다며 국가가 간토 학살 역사관을 지을 수 있도록 하겠다고 했다.

1923역사관 전시실에서 김종수 관장
1923역사관 전시실에서 김종수 관장

김종수 관장은 “간토 학살 사건은 이웃으로 살던 사람들을 적으로 만든 사건이었다. 우리가 추구하는 방향은 일본을 적으로 놓는 것이 아니라 올바르게 역사를 기억하고 그들이 갈라놓았던 노동자 연대, 시민 연대, 민주화 세력들을 이제 다시 평화적으로 회복해야 한다”라고 덧붙였다.

올해로 간토 학살 100주기가 되었다. 여전히 일본 정부는 간토 학살에 대한 책임을 민간으로 돌리고 있다. 지금까지 시민단체와 연구자들은 학살 피해자에 대한 사료를 찾아내고, 오류를 수정하는 작업을 해왔다. 그러나 민간에서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다. 이제 정부와 국회는 일본 정부가 책임 있는 모습을 보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일본에서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죽임을 당하고, 아직도 이름조차 찾지 못한 이들의 명부를 찾아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죽은 이에게도 인권은 존재하기 때문이다.

글 병천마을신문 김경숙 마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