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소주 한잔하실래요
아버지 소주 한잔하실래요
  • 천안아산신문
  • 승인 2023.01.30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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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밤에 잘 가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무슨 근심 그리 많아 이적지, 딸자식 걱정 내려놓지 못하고 꿈속에 다녀가셨을까. 지지리 못난 제가 곤히 잠든 아버지를 또다시 흔들어 깨웠나 봅니다. 바람이 차갑습니다. 창밖에는 눈이 날리고 있어요. 아버지 누워계신 그곳에도 지금쯤 하얀 눈이 쌓여 가고 있겠지요.

마음이 힘든 날 딱히 갈 곳 없던 제가 생각해 낸 곳이 아버지 계신 곳일 줄 눈치채셨던가요. 지난가을 오랜만에 찾은 아버지의 산소가 예년보다 늘어져 있었습니다. 봉긋하던 봉분이 수그러지면서 옆으로 퍼져나간 것은 세월의 이치겠지요. 예민하던 성격이 느슨하게 풀리는 것처럼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 그런 것이겠지요.

아버지는 말수가 적은 분이셨어요. 수없이 많은 질문을 해대는 어린 제게 간간이 미소만 지어주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 아버지도 저녁 술상 앞에선 마법처럼 이야기보따리를 펼쳐 보이셨죠. 소주와 함께인 밤. 독백처럼 풀어 놓던 이야긴 주사였던 걸까요. 아버진 콧노래 흥얼거리며 옛날 옛적 남모르는 사연 펼쳐 보이며 긴 밤을 지새우곤 했죠. 당시 아버지가 소주를 좋아했던 것인지 그저 술을 좋아했던 것인지 딱히 모르겠습니다. 다만 어느 쪽이든 아버지를 수다쟁이로 만드는 그것이 싫지 않았습니다. 유쾌해 뵈던 아버지가 마냥 좋았습니다. 겨울밤 내복 차림으로 앉아 아버지 비어가던 잔을 마저 채울 때였어요. 마을 노래자랑에서 일등 한 적 있었다고 수줍게 이야기하셨죠. 상으로 커다란 솥단지도 받았었다고요. 그때 일등 했을 때 불렀던 노래를 나지막이 흥얼거리셨죠. 아버진 어린 제 앞에서 그러그러한 자랑도 하실 줄 아는 분이셨어요. 술상 앞에서만큼은 한없이 천진난만하셨던 우리 아버지. 저도 그때의 아버지 나이쯤 되고 보니 속울음 머금고 인생의 쓴맛 소주 한 잔에 담아내는 날도 있게 되네요. 가끔 홀로 마시는 소주에 취해도 보고요. 때때로 어미 아비 못 알아본다는 낮술을 마시는 날도 더러는 생기곤 해요. 술을 핑계 삼는 술 삼매경에 빠지는 일에 가끔 익숙해지면서 요즘은 아버지와 곧잘 재회하네요. 저는 애주가는 아니지만 속상한 날에는 소주 한 잔 마시며 참았던 눈물을 뿜어내고는 하였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눈물도 귀해져 어지간한 일로는 울음 따위 어림없어요. 이게 인생일까요.

얼마 전 아버지의 큰 외손자와 말다툼이 있었습니다. 늦은 귀가가 원인이었어요. 녀석은 이제 컸으니까 간섭하지 말라 대들었고 전 엄마니까 간섭해야겠다고 언성을 높였지요. 엄마와는 말이 안 통한다고 녀석은 나가버렸고 전 잡지 않았어요.

돌아오지 않는 녀석을 기다리면서 밤을 지새우는 날이면 아버지 생각이 나요. 살구를 주인 허락 없이 따왔던 날이었어요. 화 한번 내지 않던 아버지가 처음으로 회초리를 들었던 날이기도 했죠. 겁에 질린 저는 무작정 뛰쳐나왔었지요. 한참을 집 밖에서 배회했어요. 애꿎은 울타리 나무를 꺾고 꼬랑지를 흔들며 아는 체하는 강아지 약 올리는 것 같아 공연히 한 대 쥐어박고요. 배는 고프고 걱정은 한 짐이고 울음보가 터지기 일보직전이었을 거예요. 때마침 아버지가 외출하시는 거예요. 이때다 싶어 슬그머니 집으로 돌아와 잠든 척했던 언젠가의 저처럼 제가 없는 사이 녀석도 무사히 돌아오겠지요. 밖에서 맴도는 저 때문에 일부러 외출하셨던 아버지의 마음. 그때 아버지도 지금의 저처럼 아이가 들어오길 바라면서 밖에서 배회하진 않으셨나요. 제가 아버지의 마음을 뒤늦게 알아챈 것처럼 녀석도 제 마음 아주 조금은 헤아려 주겠죠.

퍽 오랜 시간 아버지를 잊고 살았어요. 미안해요.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시작된 통증은 긴 세월 아버지를 괴롭게 했었죠. 하지만 신음도 빈 소주병 놓인 밤엔 잔잔했습니다. 소주는 아버지의 오랜 아픔을 잠시나마 멎게 하였고 칼날 같은 통증을 뭉그러뜨렸습니다. 술은 아버지를 금방 취하게 했고 쉬이 잠들게도 했어요.

오랜 병치레 끝에 더 이상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병원에선 아버지를 집으로 모셔가라 했어요. 병의 증세가 나빠지면서 아버지의 술에 대한 집착은 더욱 커져만 갔었죠. 우린 차마 아버지에게 술을 드리지 못했어요. 행여 더 위독해질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56년 짧을 생을 마치고 영 떠나가셨습니다. 그토록 간절하게 찾았던 소주 한 잔으로 아버지의 타는 목을 축여드렸더라면 이제껏 마음 아프진 않았을 테죠. 만일 그때 술을 드렸더라면 마지막 가시는 길 콧노래 흥얼거리시면서 생전 설움 모두 잊고 가벼운 걸음으로 떠나가셨을 텐데. 미안해요. 미안해요.

곧 아버지의 기일이 돌아오네요. 아버지는 제삿술 잔 받으시고 저는 퇴주잔 받으며 아버지와 나 그리고 큰 외손주 녀석과 함께 술자리 한번 가져보아요. 사랑하는 아버지 이제 자식 걱정 그만 내려놓으시고 편히 쉬세요.

글 - 강명화
글 - 강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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