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내장터에서 즉사한 김구응 열사 평가 제대로 이루어져야
아우내장터에서 즉사한 김구응 열사 평가 제대로 이루어져야
  • 시민리포터 김경숙
  • 승인 2021.05.02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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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 1일에 부르는 만세운동 ‘제2회 아우내 4·1 문화제’

'아우내 4.1 문화제'는 1919년 4월 1일 아우내 만세운동에서 희생된 김구응·최정철 열사를 추모하고자 천안역사문화연구회가 기념일로 제정하고 기념행사를 진행하는 문화제이다. 당시 3.1 만세운동의 양력 날짜는 4월 1일이었다. 
최정철·김구응 열사의 행적을 살펴보고 ‘4·1 문화제’에 참여해 그들의 숭고한 뜻을 다시 기리는 시간을 가져봤다. 

아우내독립만세기념공원에 설치된 최정철 김구응 모자상

아우내장터에서 즉사한 최정철·김구응 열사

「천안군 병천시장에서 의사(義士) 김구응은 남녀 6400명을 소집하여 독립선언을 할 때 일본 헌병이 조선인의 기수를 해치고자 했다. 조선인들은 맨손으로 이를 막느라 피가 낭자했다. 그러자 일본 헌병은 이들의 복부를 칼로 찔러 죽음에 이르게 했다. 김구응이 일본 헌병의 잔인무도함을 꾸짖자 일본 헌병은 돌연 총구를 김구응에게 돌려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김구응은 머리를 맞아 순국했으나 일본 헌병은 사지(四肢)를 칼로 난도질했다. 이때 김구응의 노모( 최정철 지사(志士))가 일본 헌병을 향해 크게 질책하자 노모마저 찔러 죽였다.」

위의 내용은 김병조가 지은 ‘한국독립운동사략’에 기술된 1919년 3월 1일 (당시 음력 4월 1일) 천안 아우내 만세운동에 대한 기록이다. 

김구응 열사는 1887년 7월 천안 병천면 가전리에서 태어났다. 청신의숙, 장명학교를 거쳐 병천 진명학교 교사로 일하며 제자들에게 독립운동의 정신을 가르쳤다. 당시 진명학교는 병천 6개면 학생들 150여 명이 다닐 정도로 마을 아이들 대부분이 병천학교에 다녔다.

1919년 4월 1일, 그날에 있었던 일을 종합하면 이렇다.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김구응 열사는 천안 동부 6개의 면과 오창, 청주, 진천, 연기 등 각지에 봉화 신호에 맞추어 일제히 궐기하도록 비밀연락망을 짜고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전개했다. 일본 관헌의 눈을 피하기 위해 나이가 어린 유관순이 연락책을 맡았다. 최정철 열사는 장년층과 노년층을 설득하고 부녀자를 동원하는 역할을 했다.

1919년 4월 1일 아우내장터에는 6000여 명의 군중이 모여들었으며, 오후 1시 김구응 열사는 독립선언문을 낭독했고 유관순이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했다. 우레와 같은 만세 소리가 아우내장터를 흔들고 군중이 점점 늘어났다. 오후 2시경 천안 헌병대가 아우내장터에 도착해 군중을 향해 총을 쏘고 칼을 휘둘렀다. 헌병들은 깃발을 들고 있던 기수를 찌르려 했고 기수가 맨손으로 칼을 잡자 그대로 찔러 숨지게 했다. 

헌병대의 잔인무도함을 꾸짖는 김구응 열사를 일본 헌병은 총으로 쏘고 총검으로 머리를 짓이겼다. 가까운 곳에 있던 최정철 열사가 일본 헌병을 질책하자 일본 헌병은 총을 쏘는 것도 모자라 총검으로 마구 찔렀다. 1919년 4월 1일 아우내장터에서 일본 헌병의 총검에 의해 최정철(당시 66세)· 김구응(당시 32세) 열사는 한날한시에 목숨을 잃었다. 

천안역사문화연구회 이용길 회장은 “유관순 열사는 만세운동 현장에서 어머니 아버지를 비롯해 7명의 친인척을 잃었다. 유관순은 만세운동을 부르다가 체포돼 옥중에서 고문을 이기지 못해 순국했다. 유관순 열사는 투옥 당시 방대한 재판 기록이 있지만 김구응 열사는 현장에서 순국했기 때문에 남아있는 기록이 거의 없다. 이것이 김구응 열사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이유”라고 말했다. 

아우내독립만세기념공원과 추모비 앞에서 부르는 독립만세

4·1 문화제는 아우내 만세운동의 주역인 김구응·최정철 열사를 재조명하는 날이다. 이날 행사는 천안역사문화연구회, 민족문제연구소 천안지회, 성공회병천교회, 최정철·김구응 열사 유족회의 주최로 열렸다.

오전 10시 반, 문화제에 참가자들과 한마음고 학생 48명은 성공회 병천교회를 출발해서 아우내독립만세기념공원, 김구응 열사 묘소, 구미산 기념탑, 유관순 열사 사당까지 걷는 일정을 소화했다.

아우내독립만세기념공원에는 유관순 조각상 뒤편으로 쓰러진 아들을 안고 있는 어머니의 조각상이 있다. 이 조각상이 김구응·최정철 열사의 모습이다. 이곳에서 천안역사문화연구회 이용길 회장은 한마음고 학생 48명과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오후 2시, 최정철· 김구응 열사의 추모미사가 병천교회에서 있었다. 병천교회는 3.1 만세운동 당시 진명학교가 있었던 자리이다. 진명학교는 김구응 열사가 인근 마을의 학생들에게 독립정신의 교육했던 곳이었고 만세운동 당시에 김구응과 병천교회 교인들, 젊은 청년들이 만세 운동을 주도하도록 구심점 역할을 했다.

김구응 열사 추모비
김구응 열사 추모비

오후 4시, 가전리 산 8-6번지에서는 최정철·김구응 열사를 기리는 추모비 개막식을 진행했다. 가전리에는 어머니 최정철과 김구응 열사의 묘소가 위아래에 자리하고 있다. 추모비는 김구응 열사의 무덤 옆에 세웠다. 추모비를 세우고 참가자들은 만세 삼창을 했다. 추모시는 오래전부터 여성독립운동가들의 삶을 추적하여 헌시(獻詩)를 쓰고 있는 이윤옥 시인이 썼다. 

행사를 주관한 천안역사문화연구회 이용길 회장은 “유관순은 3.1 만세운동을 대표하는 전국적인 인물이며 마땅히 존경받아야 할 인물이다. 그러나 만세운동은 유관순 열사와 6400여 명의 민중이 함께했던 것이다. 이 만세운동을 실질적으로 거사를 준비하고 당일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다가 현장에서 즉사한 김구응 열사에 대한 올바른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며 “진명교회 역시 병천교회가 설립하고 김구응 열사가 교사로 재직하여 아우내 만세운동의 산실이었던 민족독립의식을 일깨운 근대식 학교 교육기관으로 재조명되어야 한다”고 말을 이었다. 

“김구응·최정철 열사처럼 현장에서 즉사한 분들이 19명, 나중에 돌아가신 분들까지 합치면 48명의 순국열사가 있다. 우리는 이분들의 기록을 찾아내고,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기억하고 잘못된 역사는 바로잡아 나가는 것이 후대들의 역할일 것”이라며 마무리했다.

시민리포터 김경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