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부 앞세운 ‘소프트 쿠데타’, 먼 나라 일일까?
사법부 앞세운 ‘소프트 쿠데타’, 먼 나라 일일까?
  • 지유석 기자
  • 승인 2020.12.29 2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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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화제 모으는 다큐멘터리 ‘위기의 민주주의’

 

‘위기의 민주주의’는 지우마 호세프 대통령 탄핵, 룰라 전 대통령 수감 등 브라질 정치 격변을 그린 넷플릭스 다큐멘터리다. (넷플릭스 제공)
‘위기의 민주주의’는 지우마 호세프 대통령 탄핵, 룰라 전 대통령 수감 등 브라질 정치 격변을 그린 넷플릭스 다큐멘터리다. (넷플릭스 제공)

요사이 소셜 미디어 유저 사이엔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위기의 민주주의>가 뜨거운 감자다. 이 다큐멘터리는 일부 유저들이 리뷰를 올리면서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그러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윤석열 검찰총장 징계위원회를 앞두고 자신의 소셜 미디어에 이 다큐멘터리를 봤다고 적으면서 관심은 폭주하기에 이른다. 아닌 게 아니라 이 다큐멘터리는 현재 한국의 정치 상황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들이 속속 등장한다. 

차근차근 살펴보자. <위기의 민주주의>는 브라질 정치 상황을 감독 페트라 코스타의 1인칭 시점으로 풀어 내려간 다큐멘터리다. 이 다큐멘터리에선 감독의 가족사와 브라질의 정치사가 날줄과 씨줄로 얽힌다. 

지우마 호세프 대통령 탄핵, 그리고 전직 대통령 룰라의 구속수감 등 최근 몇 년 사이 브라질 정치 상황은 급격히 요동쳤다. 페트라 코스타는 이 과정에서 검찰과 법원의 역할에 주목한다. 

지우마 호세프 재임 시절 세르지우 모루 연방판사는 국영석유기업 페트로브라스를 상대로 '세차작전'이란 이름의 대대적인 수사를 벌인다. 이 수사를 통해 페트로브라스의 자금이 정치권으로 흘러간 정황이 드러난다. 브라질 정치인 다수가 여기에 연루돼 있었다. 

그런데 '세차작전'은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흐른다. 의회가 지우마 호세프 탄핵을 의결한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국회 의원들이 ‘세차작전’ 수사망에 걸려들지 않기 위해 지우마 호세프를 희생양 삼기로 한 것이다. 

지우마 호세프는 "정부 수반이 하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갈아치우겠다고 저를 고발한 분들의 바람처럼 적법한 일은 아니다.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국민"이라고 항변했으나 허사였다. 

하지만 호세프의 탄핵은 신호탄에 불과했다. 호세프가 낙마하면서 전임 룰라는 정계에 복귀했다. 대선 레이스에서도 보수 성향의 자이로 보우소나로를 여유 있게 앞서고 있었다. 이러자 모루 판사의 칼끝은 룰라를 향한다. 여기서 다시 한 번 국영석유기업 페트로브라스가 등장한다. 수사팀은 페트로브라스로부터 솔라리스 콘도미니엄을 받았다는 혐의로 룰라를 법정에 세운다. 

법정에 선 룰라는 거칠게 항변한다. 항변을 들어보면 룰라를 향한 수사가 철저한 증거에 입각한 게 아님을 강하게 시사한다. 

"저는 거짓에 근거한 파워포인트 한 장 때문에 재판받고 있어요. 이런 심리에서는 검찰청이 '룰라는 자기 소유가 아니라고 하지만 돈을 지불했다는 법적 서류가 있으니까 사실이야' 이렇게 해야 합니다. 제가 원하는 건 빈정거림은 그만두고 내가 저지른 범죄가 뭔지 알려달라는 겁니다!"

이 같은 항변에도 법원은 유죄를 인정해 2018년 4월 룰라를 투옥했다. 다행히 룰라는 지난해 11월 석방됐지만, 그 사이 브라질 상황은 뒷걸음질 쳤다. 

룰라-지우마 호세프 집권 시기 브라질은 라틴 아메리카의 선도국으로 급부상했다. 2014년 월드컵과 2016년 올림픽을 잇달아 유치하며 브라질의 위상은 한층 더 도약하는 듯했다. 

하지만 현재 브라질의 모습은 초라하기 이를 데 없다. 무엇보다 올해 전 세계를 엄습한 코로나19 팬데믹에서 브라질은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큰 피해를 입었다. 개인적인 견해임을 전제로 하면, 현 보우소나루 대통령은 코로나19 대응에 사실상 손을 놓은 것 아닌가 하는 인상마저 준다. 

도대체 브라질에선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민주정부의 좌초, 뒤이은 퇴보 

룰라 이나시오 다 시우바 전 브라질 대통령은 퇴임시 까지 높은 지지율을 누렸지만 부패 혐의로 법정에 섰다. 다큐멘터리 ‘위기의 민주주의’는 룰라가 기득권층의 소프트 쿠데타에 몰락했다고 본다. (넷플릭스 제공)
룰라 이나시오 다 시우바 전 브라질 대통령은 퇴임시 까지 높은 지지율을 누렸지만 부패 혐의로 법정에 섰다. 다큐멘터리 ‘위기의 민주주의’는 룰라가 기득권층의 소프트 쿠데타에 몰락했다고 본다. (넷플릭스 제공)

<위기의 민주주의>는 바로 이 지점에서 진가를 발휘한다. 

무엇보다 페트라 코스타는 '관행'에 주목한다. 룰라가 이끄는 브라질 노동자당은 집권 이전엔 급진적인 의제를 내세웠지만, 집권하면서 제도권 정당으로 서서히 고착화한다. 게다가 노동자당은 브라질 정치의 오랜 관행, 즉 기업이 주는 선거자금에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했다. 

감독 페트라 코스타는 "사회 시스템을 개혁하겠다는 약속을 믿고 표를 준 정당이 변화가 거의 불가능하게 설계된 선거운동 자금 구조 안에 더욱더 고착되는 것을 보는 일은 고통스러웠다"며 안타까움을 표시한다. 

룰라의 측근인 지우베르투 카르발류 전 대통령 실장은 더 나아가 노동자당이 정치개혁에 실패했다고 통탄해한다. 카르발류 실장의 말이다. 

"당이 성장하면서 권력을 다루게 되면서 무언가를 잃었어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무언가를요. (중략) 의회를 통해 통치하는 데 더 많이 의존하기 시작했죠. 우린 쉽게 거물들과 친구가 될 줄 알았어요. 선거자금 융통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어요. 정치개혁을 이루지 못한 겁니다. 기업에서 선거자금 받는 일을 그만뒀어야 했는데 말입니다."

노동자당 지지자를 제외한 브라질 시민들은 지우마 호세프의 탄핵, 뒤이은 룰라의 기소에 열광한다. 오랜 부패 관행에 염증을 느끼는 데다, 모루 판사 수사팀이 이런 정서를 효과적으로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9개 족벌이 소유한 브라질 언론은 여론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지우마 호세프-룰라 개혁정부의 몰락에 결정타를 날린 건 바로 사법부였다. 모루 판사는 페트로브라스 정치자금 의혹을 수사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개혁정부를 파멸시켰다. 

법은 누구에게나 평등해야 한다. 하지만 이 같은 원칙론과 별개로 법을 누가 주무르느냐에 따라선 종종 파국적인 상황이 펼쳐지곤 한다. 누구는 자기편이라는 이유로 중범죄를 저지르고도 사법체계의 보호를 받는 반면, 또 다른 누구는 다른 편에 섰다는 이유로 사소한 의혹에도 마녀사냥을 당하는 일이 횡행한다는 의미다. 지우마 호세프와 룰라가 딱 이런 경우다. 

감독 페트라 코스타는 이 대목에서 꽤 의미심장한 독백을 남긴다. 

"제가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건 정치적 분쟁에서 어느 한쪽 편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제도가 불규칙하게 기능하도록 만들 힘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위기의 민주주의>는 현 한국의 정치 상황에도 의미심장한 시사점을 남긴다. 브라질 노동자당은 권력을 갖게 된 순간 과거 자신들이 개혁 대상으로 삼았던 기득권 세력의 행태를 답습했다가 곧장 역공을 당했다. 

어느 나라고 기득권층은 정권이 바뀌었다고 순순히 협력하지 않는다. 더구나 '코드'를 달리하는 정권이라면 더더욱. 브라질 노동자당은 이 점을 간과했고 그래서 허망하게 무너져 내렸다. 

현 한국 집권세력은 이른바 '촛불혁명'에 힘입어 정권을 잡았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문재인 정부 스스로 촛불정부라고 수차례 자부하기도 했다. 

그러나 동시에 보수 언론, 검찰, 법원 등 개혁에 저항하려는 세력의 기세도 만만치 않다. 따라서 상대에게 허점을 보였다간 ‘역습’을 당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위기의 민주주의>가 화제를 모으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는 판단이다. 즉, 사법부를 앞세운 기득권 세력의 역공이 이 나라에서도 벌어질 수 있다는 말이다. 

끝으로 현 집권 세력에게 묻는다. 지금의 대통령 정부 여당이 개혁적이라고 자부할 수 있는가? 오히려 '적폐세력'의 행태를 답습하고, 경우에 따라선 적폐에 편승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자신 있게 답할 수 없다면, 우리의 민주주의 역시 위기라 할 수밖엔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