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함성’을 듣다
‘그날의 함성’을 듣다
  • 시민리포터 김경숙
  • 승인 2020.07.31 2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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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 항쟁, 민주주의 현장을 따라 걷다

87년 6월 항쟁은 군부 독재의 오랜 유산을 걷어낸 결정적 사건이었다. 16년 만에 대통령을 국민의 손으로 직접 선출하게 되었고 헌법이 개정되어 ‘87년 체제’가 가고 오늘날 한국 사회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6월 20일 아스팔트가 녹을 만큼 뜨거운 날, 사회적 협동조합 ‘기억과 평화’팀이 주최한 민주주주의 길을 따라 87년의 6월 항쟁에 대한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①민주인권기념관

처음으로 둘러본 건물은 ‘남영동’ 혹은 ‘남영동 대공분실’로 알려져 있다. 이 공간은 한때 민주주의를 갈망하던 많은 인사들이 고문을 받던 공간이었다.
이 건물은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했다. 외관상으로 까만 벽돌 건물에 수많은 창문이 보이는데 5층 창문의 크기는 다른 층과 달리 유독 작다. 그 이유는 고문받는 사람들의 자해를 막고 신음 소리가 밖으로 나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이곳을 거쳐 간 사람 중 대표적인 인물은 김근태와 박종철이다. 박종철 사망 후 경찰은 초기 발표에서 ‘책상을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고 발뺌했다. 그러나 검안의사와 부검의사의 증언으로 사건 일부가 공개되자 야당과 재야단체는 들끓었다. 이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이하 국본)이 결성되어 6.10 대회를 박종철 치사 조작 규탄에서 4.13조치 철회 및 민주개헌쟁취로 확장했다. 

 

②한국은행 앞 분수대

버스를 타고 남대문 시장 앞에서 내리면 시원한 분수대가 있다. 이곳은 1987년 6월 10일과 18일 시위대와 전경 사이에 가장 격렬한 싸움이 벌어진 곳이었다. 명동 성당에서 밀려난 학생들은 근처 상인들의 도움으로 피신할 수 있었다. 18일 시위대는 무장 경찰을 무장해제 시키고 분수대 안에 들어가게 해 ‘민주주의 만세’를 외치게 했던 장소이다. 

 

③명동성당과 향린 교회

1987년 이 장소는 6월 10일 범국민 대회가 열렸고 밤 10시 경찰이 명동 일대 교통을 차단하자 퇴계로, 을지로, 한국은행 앞에서 후퇴한 시위대가 들어간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 집결한 시위대는 많을 때는 1000여 명에 이르렀다. 11일 이곳에 시위대가 집결했다는 소식을 들은 시민들은 담장 안으로 옷, 음식, 현금 등을 던져주었다. 저녁 성당 앞에서 전두환, 노태우의 화형식을 치렀다. 오후 경찰이 밀고 들어오자 김수환 추기경은 시위대의 사기 진작을 위해 지지성명을 발표했다.
1987년 5월 27일 학생 기독교 청년 연합회는 창립 발기인대회를 열기로 했다. 황인성 학생 기독교 청년 연합회장은 상대적으로 전경 수가 적게 진입할 수 있는 향린교회를 선택했다. 국본 명칭도 이때 확정했다. 

 

④그레뱅 뮤지엄(전미문화원)

전태일 기념관

1980년대 반미운동은 광주에서 시작했다. 이는 80년 광주학살 당시 군사 작전권을 보유한 미국의 묵인과 국가가 국민을 죽였다는 여론이 일었기 때문이다. 미문화원은 당시 경비가 엄격하지 않으면서 치외법권 지역이라 경찰이 들어오지 못했다. 또한 1985년 5월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민주당이 선전하자 이에 고무된 학생들은 광주항쟁 계승 기간을 맞아 미국문화원 점거 농성 계획을 세웠다. 전학련 소속 5개 대학생 73명은 2층 도서관을 점거하고 “광주사태 책임지고 미국은 공개하라” 등의 구호를 건물 바깥에 붙였다. 이 사건으로 서울대 삼민투 위원장 외 25명이 국가보안법으로 구속기소 되었다. 그 배후로 김근태 민청련 의장을 지목했고 남영동 대공분실로 연행했다. 전미문화원은 1990년 서울시로 매각되었고 2015년 프랑스 CDA사 협약에 따라 ‘그레뱅 뮤지엄’으로 바뀌었다.

 

⑤서울시청 광장과 서울 성공회 대성당

서울성공회 대성당

1987년 7월 9일 서울시청 광장은 이한열 열사의 노제가 있었던 장소였다. 당시 100만 명의 시민이 모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서울성공회 대성당은 6월 10일 항쟁의 시작점이었다. 국본은 서울의 중심부였으며 종교 시설이었기 때문에 집결하기 쉬워서 이 장소로 결정했다. 6월 10일 서울 성공회 대성당은 미사 집전에 피아노 연주자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경찰의 시선을 피해 국본 지도자를 성당 안으로 들여보낼 수 있었다. 오후 6시 김성수 성공회 주교는 미사를 마치고 대회 참가자들과 경찰의 봉쇄를 뚫고 거리 진출을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15명이 연행됐고 다음 날 오전까지 단식 농성을 진행했다. 
성공회 대성당 한쪽에는 '6월 민주항쟁 진원지 기념비'가 있다. 이 기념비에는 ‘유월 민주항쟁이 이 자리에서 시작되어 마침내 민주화의 새 역사를 열다’라고 쓰여 있다. 이 기념비가 이곳이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의 중심지였으며 사회정의 활동의 중심지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⑥ 서울역 광장

6월 26일 국본은 전국 34개 도시와 4개 군에서 ‘국민평화대행진’을 개최했다. 이날 전국적으로 총 3467명이 연행됐고, 수십 명의 사람이 연행됐다. 6월 26일 시위는 6월 항쟁 기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집단 시위였다. 결국 6월 29일 노태우 대통령은 직선제 개헌을 수용하고 구속자 석방, 김대중 사면 등을 핵심으로 하는 6.29 선언을 발표했다. 
1987년은 다음 해 올림픽을 위한 사회정화를 위한 강제 수용의 시기였다. 노숙인, 부랑아, 성매매인, 넝마주이 등을 ‘녹화사업’이라는 명분 아래 삼청교육대로 보냈다. 또한 정치적, 민주화에 대한 열망으로 시민단체가 많이 생겨나는 시점이었다. 박종철과 이한열 열사의 죽음은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되었고 6월 항쟁은 사회적 분위기와 국민의 열망이 만들어낸 민주주의 결과였다.

서울역 광장에서 민주주의 길을 따라 걸으며 느꼈던 소감을 말하는 것으로 ‘그날의 함성’ 일정을 마무리했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나는 6월 항쟁을 겪으며 격정의 소용돌이에 있는 이 역사를 후세 사람들은 어떻게 기억할까, 수많은 변수 중에서 이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세대들에 대한 다양한 이해가 필요하다”, “코스를 따라 걸으며 당시 대학 생활을 하셨던 부모님을 떠올리는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97년에 대학 생활을 한 저는 어차피 간접 체험밖에 할 수 없어요. 당시 현장에 계셨던 두 분의 경험이 부럽기도 하고 남영동을 보면서 암울한 역사지만 우리가 놓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다양한 연령층이 참가한 행사였기에 다양한 감상이 나왔다.

,* 천안에 있는 사회적협동조합 ‘기억과 평화’에서 주관한 ‘그날의 함성’은 8월에는 박물관 행사를 계획하고 있으나 코로나19로 인해 박물관 입장이 곤란할 시 행사를 진행하지 않을 수 있다. 9월에는 ‘천안 민주주의 길’을 계획하고 있다. 궁금한 점은 아래 연락처로 문의하기 바란다. 

홈페이지 www.1923news.com
문의 041-552-1923, 041-552-7856

시민리포터 김경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