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의 꿈 좌절 컸으나 근대 음악 연구해 새로운 장르 개척
가수의 꿈 좌절 컸으나 근대 음악 연구해 새로운 장르 개척
  • 노준희 기자
  • 승인 2020.03.05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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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초 근대 대중가요 연구해 박사 된 단국대 교양학부 장유정 교수
2번째 정규 음반, ‘경성야행’…가슴 절절한 근대 가요 다시 불러 조용한 인기몰이

노래 부르는 교수, 장유정 교수를 만났다. 그것도 모양새 난다는 가곡이나 칸초네, 샹송을 부르는 게 아니라 ‘뽕짝’이라고 불리던 트로트를 사랑하는 교수다.

장 교수의 어릴 적 꿈은 가수였다. 하지만 운명은 그에게 가수의 길을 내어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가수의 꿈을 아무도 가지 않은 연구 장르로 승화했다. 일제강점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천시받았던 우리 가요가 밟아온 흔적들을 하나하나 찾아내고 그 역사와 숨은 가치를 발굴해낸 것이다.

그렇게 장 교수는 근대 가요 연구로 국내 처음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실력을 인정받은 그는 ‘렉처 콘서트’라는 새로운 강의법도 개발해 노래하는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게다가 지난 1월 새로운 근대가요 탐구내용이 담긴 ‘경성야행’을 발매했다. 싱글 음원 포함 12번째이며 정규 음반으로는 두 번째다.

노래의 꿈을 학문으로 멋지게 일군 장유정 교수의 인생을 만나봤다.
 
장유정 교수

“정말 가수가 되고 싶었어요” 

어릴 적 장유정 교수에게 가수는 유일무이한 꿈이었다. 가정형편이 어려웠던 그는 노래를 부를 때 즐겁고 행복했다. 책을 읽고 노래 부르는 게 힘든 현실을 이길 탈출구였다. 또 제법 노래를 잘한다고 칭찬을 들어온지라 자신도 있었다.

“1989년 변진섭이 진행하던 ‘밤을 잊은 그대에게’라는 엄청 인기 있던 라디오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거기서 ‘우리들의 가요제’ 상반기 결산 무대에 나가 1등을 했어요. 하지만 대학가요제에선 입선도 못 했지요.”

이유는 많았다. “작곡한 친구가 녹음을 못 하고 군대에 가버려 가요제 전날까지 MR 만드느라 녹초가 되었는데 부유했던 고교 동창은 완벽하게 음악적 준비를 해왔어요. 준비가 부족한 내 모습에 기가 죽어 평소보다 훨씬 못 불렀어요.” 대학가요제로 가수가 되겠단 꿈은 그렇게 산산이 부서졌다.

절망스러웠다. 가수의 꿈을 접겠다고 생각하니 공허했다. 어떻게든 노래와 연관 있는 삶을 살고 싶었다. 고민 끝에 좋아하는 노래의 역사를 공부해야겠다고 맘먹었다. 대중가요를 얘기하려면 서울대학교 대학원에 가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고 박사 취득을 목표로 열심히 공부했다. 대학원 준비 시절엔 하루 16시간씩 공부에 매달렸다.
 
장유정 교수

가수 운명 아님을 깨닫고 연구자의 길에 들어서다 

근대 대한민국 수난의 역사와 함께 자라온 트로트의 감성은 서민들의 한과 슬픔을 어르고 달래주었다.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개발도상국 시기를 거치며 인내해온 우리 민족은 노래로 힘듦과 아픔을 다스려왔던 것이다.

하지만 90년대는 한국 근대 음악과 단절돼 있었다. 요즘은 트로트 열풍이 몰아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대중의 인기를 누리고 있지만, 당시는 전문가들은 일본 엔카의 영향을 받았다며 트로트를 천시하는 경향이 짙었다.

“언젠가 마을버스 안에서 ‘트로트 메들리'를 듣던 할머니가 노래가 너무 좋아 내리기 싫다고 하셔서 놀랐어요. 또 고등학교 시절 TV를 보다가 외딴 섬에서 홀로 살아가시는 할머니를 위로해준 노래가 '눈물 젖은 두만강'이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었죠. 천대받던 그 음악이 한 사람을 위로해주는 모습에. 나도 ‘도로 남’이라는 노래 가사를 음미하다 오열했던 적이 있었는데…. 이때부터 트로트에 대한 마음이 활짝 열렸지요. 왜색을 강조하는 전문가들은 ‘식모가 부르는 노래’라며 폄훼했어요. 반발심이 생겼죠. 정말 웃긴 건 그런 전문가들도 노래방 가서는 트로트를 부른다는 거예요.”

장 교수는 트로트가 가진 서민문화 계승점과 연결점을 찾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쉽지 않았다. 석사는 물론 박사학위를 따기까지 과정은 말로 다 못할 고난의 연속이었다.

“대중가요를 연구하는 일은 자료조사부터 쉽지 않았어요. 서울대 수준을 떨어트린다는 소리도 들었어요. 무조건 비판하고 방해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되니까 더 열심히 공부하게 됐어요. 어마어마한 공부량이었지요. 누가 밟으면 더 오기가 생기나 봐요. (웃음)”

장 교수는 지금까지 쓴 소논문만 74편이 넘는다. 보통 교수들의 두 배가 넘는다. 좋아하는 노래를 연구하니 논문 쓰는 게 이골이 났다. 가요 관련 단독저서만도 7편에 이를 만큼 장 교수는 왕성한 연구활동을 보였다.
 
지난해 장유정 교수가 진행한 렉처 콘서트 포스터 

시대별 가요 불러주며 강의하는 렉처콘서트로 새 장르 개척 

교수가 되고 나니 그토록 원했던 노래 부를 기회가 많아졌다. 직접 가요를 불러주며 근대 가요사를 대중의 눈높이에서 강의하는 렉처 콘서트에서다. 세션은 같은 대학 뉴뮤직과 주화준 교수가 이끄는 이름난 재즈 연주팀 ‘주화준트리오’가 맡았다.
프로들의 연주에 맞춰 한국 대중가요를 시대별로 묶어 이야기하고 노래하는 그의 강의는 여성 관객들이 많다. 지난해 천안에서는 5월 7월 10월 렉처 콘서트를 열었고 기자는 10월 공연을 관람했다.

그날 콘서트는 1980~2000년대 음악 이야기였다. 지나간 시절을 상기시키는 가요들을 듣자 잊었던 추억들이 새록새록, 뭉클했다. 그 무대에서 장 교수는 자신의 노래 실력을 맘껏 펼쳤고 가수로서 손색없는 무대를 보여주었다.
 
올 1월 발매한 장유정 교수의 두 번째 정규 음반

“들어보세요. 경성야행의 감성을” 

노래를 향해 쉼 없이 달려온 그의 열정과 학구열은 우리나라 최초 근대 가요를 체계적으로 연구해 정립한 초석이 되었다. 그는 이에 그치지 않고 직접 노래한 ‘근대가요 다시 부르기’ 시리즈 디지털 싱글을 발매해 근대 가요의 매력을 세상에 알렸다.

2013년 발매한 ‘장유정이 부르는 모던 조선 : 1930년대 재즈송’은 ‘외로운 가로등’, ‘리라꽃은 피건만’ 등 1930년대를 풍미한 가수들의 음악에 원곡을 다시 입혀 그가 불렀다. 이 커버 정규 음반은 잊힌 노래를 복원하고 원로가수들을 오마주(hommage)하는 헌정 작업의 의미가 크다.

새로 발매한 ‘경성야행’도 음악사적 의미가 짙다. 이 음반 첫 곡인 ‘세기말의 노래’는 1930년대 암울한 시대를 노래한 음악으로, 재즈풍으로 편곡한 장유정의 녹진한 목소리와 곡 분위기가 오히려 새롭다. 원곡은 영화 ‘아가씨’에 사용되기도 했다.

우리나라 최초 여성 서양화가로 알려진 나혜석이 작사해 악보 형태로만 남아 있던 ‘노라’를 처음으로 재현한 곡도 수록했다. 헨리크 입센(Henrik Ibsen)의 희곡 ‘인형의 집’의 내용을 나혜석이 노랫말로 만든 곡이다. 이제까지 공개되지 않았던 윤심덕의 미공개 음원 ‘추억’을 재현한 노래도 있다. 이 음원은 유일하게 경주 한국대중음악박물관에 소장되어있다.

총 10곡이 수록된 경성야행과 장 교수의 음반들은 잊힌 노래의 발굴과 기록, 기억의 결과물이다. 장 교수가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고 근대 가요를 사랑하는 연구자가 아니었다면, 우리나라 근대 대중가요의 숨은 매력을 한눈에 파악할 귀한 자료들을 만날 수 있었을까.

더구나 이 음반은 크라우드펀딩으로 목표금액을 초과할 만큼 반응이 좋았다. “서울에서 지난달에 공연했는데 분위기가 매우 좋았어요. 후원해주신 분들께 정말 감사했어요.”

근대 가요 음악사 박사가 되고 난 후 가수의 꿈을 이룬 장유정 교수. 지식과 실력을 아우른 독보적인 장르에서 부르는 그의 노래는 삶의 질곡과 음악사적 기록을 함께하고 있다. 아직 그의 노래를 듣지 못했다면 유튜브에서라도 경성야행의 시대적 메타포를 음미하길 권한다. 100년을 흘러온 노래가 주는 새로운 아름다움에 흠뻑 빠져들 테니까.
 
노준희 기자 dooaium@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