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을 잃은 학교, 선별기능을 약화해야
배움을 잃은 학교, 선별기능을 약화해야
  • 천안아산신문
  • 승인 2020.01.09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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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태 천안불당고 역사교사

배움을 잃은 학교가 불러온 교실 붕괴 현상  

나는 지난해 첫 수업 오리엔테이션에서 겪은 당혹감을 잊지 못한다. 수업 주제는 “나는 왜, 이 과목을 선택했는가?”였다. 동아시아사 과목을 처음 담당하기에 학생들이 이 과목에서 무엇을 배우고 싶어 하는지 궁금했고, 학생들이 이 과목을 통해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 흥미를 높이기 위함이었다.

학생들 대답은 기대에서 너무 벗어나 있었다. 학생 대부분은 ‘쉬울 것 같아서’, ‘동아시아라 익숙해서’, ‘다른 과목은 어려워서’ 등 ‘쉽다’, ‘어렵다’의 표현을 사용했다. 미리부터 평가를 염두에 두고 자신에게 유리한 과목을 선택한 것이다. 그들에게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라는 배움의 기대와 흥미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배움’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학교의 존재 이유이자 목적인데도 학교에서 배움을 기대하지 않는 이율배반적 상황은 왜 나타난 것일까. 그것은 학교가 배움이 아닌 다른 기능을 지나치게 강조해왔기 때문이다. 바로 ‘선별’이다.

지금의 학교는 공정한 선별을 위해 존재하는 기관으로 보인다. 1년 중 방학을 제외하고 아홉 달 동안 정기고사 네 차례, 수능 모의고사 네 차례, 게다가 수행평가가 과목별로 학기당 두세 가지다. 학생들 처지에서는 숨 막힐 수밖에 없는 시험의 연속이다. 입시를 향한 치열한 경쟁 속에서 매일 잠이 부족해 고통스러워하는 그들에게 배움을 기대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되묻게 했다. 내가 너무 경솔했다.
 

배움을 잃은 학교가 불러온 교실 붕괴 현상
 
작금의 모든 학교위기는 바로 이 지점에서 비롯한다. 지나치게 ‘선별’을 강조한 결과, ‘배움’이 상실된 상황. ‘배움’이 사라진 학교는 교실 붕괴로 표현되는 아노미 현상을 낳았다.

한국의 수많은 고등학생은 수업시간에 잠을 잔다. 고등학생 시기는 신체적·지적·정서적·사회적 성장과 발달이 현저히 이루어질 중요한 시기임에도, 무기력하게 시간을 때우는 안타까운 상황이다. 한 반에 절반 혹은 그 이상의 학생들이 일상적으로 잔다. 잠자는 교실 현상은 학생 개인 문제라기보다 사회구조적인 문제다. 외국에서도 이런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다고 하니, 우리 사회가 만들어낸 부정적 일면이 분명하다.

학생들이 잠자는 이유는 자존감 약화가 가장 큰 원인이다. 일상화된 시험과 평가 속에서 낮은 등위를 차지하는 학생들의 충격과 심리를 상상해 보자. 사람은 누구나 인정욕구가 있다. 시험에서 인정받지 못한 학생들은 낮은 자존감을 보이고 치열한 경쟁의 길을 포기할 것이 뻔하다. 나아가 한국사회에서 출세의 길이라 불리는 상위 대학으로 가는 길이 막혀버리니 희망을 찾을 수도 없다. 성적과 입시로는 더 이상 의미를 찾을 수 없는 학생들이 잠을 선택하는 것은 매우 합리적 선택으로 풀이된다.

학교시스템에서 추방된 학생들은 학교와 사회에 반항적 태도를 보이며 하위문화의 유혹에 빠져든다. 잠재된 분노는 이따금 폭력 행위로 분출되며 교권침해로 불리는 현상을 일으켰다. 학생이 교사를 폭행하는 충격적 현상은 이미 내성이 된 지 오래며,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뾰족한 해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반면, 등수와 성적을 위해 열정적으로 임하는 학생들 모습도 썩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들은 학교 질서에 순응하지만, 학교를 단지 도구로만 바라보며 입신양명의 사적 욕망을 실현하는 장으로 여긴다.

그들은 배움과 성장을 기대하지 않기에 교사는 그저 평가하는 사람으로만 여기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평가에 굉장히 민감하며 객관식·수치화된 결과만을 공정하다고 생각한다. 평가를 향한 학생과 학부모의 끊임없는 민원은 교사를 위축시키며 문제 되지 않는 것을 최선으로 하는 방어적이고 수동적인 교육활동이 이어지도록 했다. 이러한 악순환은 학생들이 공동체보다 자신만을 우선시하는 이기적 심성을 갖게 하며. 자신보다 성적이 낮은 사람을 깔보는 엘리트주의 심성을 형성하기도 한다.

지금껏 인류가 쌓아온 공공선을 향한 보편적 가치나 민주적 시민의식은 ‘점수 맞히기’ 그 이상의 의미를 갖기 어렵다. 그들은 인간세계와 기성질서를 향한 냉소적 시선을 보이며. 교육의 가치를 무효화시킨다.
 

학교 정상화의 길, 배움의 기능을 회복해야
 
배움은 이질적인 낯선 타자와의 만남과 관계 속에서 도래한다. 진정한 성장은 깊은 고민과 성찰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지식을 암기하고 습득하며, 문제만 잘 푼다고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배움은 모든 인간이 갖는 욕망이자 권리이며, 성장하는 기쁨을 만끽해 또다시 그 열정을 견인한다. 그 기쁨은 교사들이 감동하게 해 교육열을 자극하는 선순환을 이루어낸다.

교육의 선별기능이 고등학교에서 중요한 거시적 역할기대일 수는 있지만, 그것이 학교 내 모든 구성원의 마음을 지배하고 미시적 역할기대를 규정지으며 학생의 인권과 교육권마저 훼손하고 있다. 학교 정상화의 길, 그것은 선별의 기능을 약화하고 배움의 기능을 회복하는 데에서 시작돼야 할 것이다.